22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5)
‘애송이도 아니고 확실히 하자, 이건 내 본모습이 아니잖아.’
고시엔도 경험한 내가 지역예선에서 벌벌 떤다는 게 말이 되는가, 히라타니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발악을 이어갔다.
‘그래, 이거다.’
공을 받은 센가노 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 판정을 받았지만 컨디션이 좋을 때와 비슷한 공, 지금의 감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금 몰아쳐야 한다.’
후루타 감독은 타석에 선 이시이(3학년)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주문했다.
히라타니는 전형적인 오버핸드 투수, 구위를 살려줄 수 있지만 제구가 안 되면 결과는 끔찍하다.
공도 빠른데 위에서 내리꽂는 투구 폼이라니, 포수 입장에선 블로킹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고, 특히 주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낮은 공은 던지기 어렵다.
그럼 알아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까.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자세는 상대가 회복할 기회를 제공할 뿐, 회복하기 전에 몰아쳐야 했다.
까앙 ~ !!
외야로 걷어 올린 타구, 히라타니는 흠칫했지만 타구는 중견수 글러브로 들어갔다(2사 주자 1루).
안타가 될 만한 타구였는데, 생각대로 풀리던 흐름에 제동이 걸리자 후루타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들 잘 하고 있어.”
말이 없는 감독을 대신해 다나카 코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후보 선수들도 마찬가지, 좋은 흐름이 끊이지 않도록 응원전을 이어갔다.
‘뭐 하는 거야 이 멍청아’
히라카시의 3루수 이마이는 마음속으로 히라타니를 질책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했던 녀석, 야구는 안 하고 정치나 하더니 실력이 떨어진 건가.
문제는 야구부 여론이 저 녀석 편이라는 것, 저 따위로 하고 벤치로 돌아가도 신경 쓰지 말라는 위로가 쏟아질 텐데, 이 경기는 고교의 역사를 빛낸 대선배들도 지켜보고 있다.
‘네가 애송이한테 홈런을 맞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야. 적어도 이기는 경기는 하라고’
2대 0이면 아직 뒤집을 수 있는 경기, 이 이상 추태를 보이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까앙 ~ !!
3루 강습, 타구를 막아낸 이마이가 차분하게 송구를 마무리하면서 길었던 1회 초가 끝났다.
“다들 정신 차려. 지금 못 쫓아가면 계속 끌려 다닐 지도 몰라.”
제 역할을 못한 캡틴이 고개를 숙인 사이, 이마이는 팀 여론을 주도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성과를 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 히라카시 야구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반격에 나섰다.
‘집중하자.’
한편, 마운드에 선 이시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2대 0 리드를 안고 있지만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차이, 이시다는 여름 동안 구속을 끌어올렸지만 그 천하의 히라타니도 제구가 안 되면 어떤 결과가 나는지 보여주었다.
결국 핵심은 제구, 스트라이크존 구석을 찔러보며 주심의 입맛을 파악했다.
“스트라이크!!”
주심은 초구부터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제멋대로 날 뛰던 히라타니의 공에 비하면 훨씬 얌전한 녀석, 타석에 선 고토부키 세이치(히라카시 : 2학년)도 주심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 더 온다.’
이시다는 초반에 빠른 볼과 체인지업 앞세우고 중반부터 커브를 섞어주는 스타일, 고토부키는 일단 커브는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고토부키는 낮은 자세에서 나오는 간결한 타격 폼이 장점이다. 체인지업을 던져봤자 큰 효과가 없다는 건 상대도 알고 있겠지, 다음에도 같은 공이 들어올 거라 확신했다.
‘아라이 감독, 어쩌자고 고토부키를 1번에 배치하셨소.’
후루타 감독은 일찌감치 이시다의 승리를 점쳤다.
일본 야구는 보수적이라 1번 타자는 발이 빠르고 평균 정도의 타격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건 비효율적, 그런 타자는 하위 타선에 어울리지 공격의 선봉장에 어울리지 않다. 바다 건너 메이저리그만 봐도 홈런 치는 테이블 세터가 즐비하지 않는가.
고토부키는 고교 레벨에서만 따지면 쓸 만한 선수지만,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 된 타격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맞추는 데 급급하고 빠른 발을 이용해 내야 안타를 양성하는 유형, 이런 학생은 훗날 프로에 진출해도 살아남기 어렵다.
이런 선수가 탄탄한 내야진을 갖춘 우릴 상대로 활약할 수 있을까? 후루타 감독은 고토부키를 1번에 배치한 건 아라이 감독의 실책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로 온다. 틀림없어.’
한편, 수비 센스가 좋은 2루수 사토는 타구가 날아올 예상지점으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고토부키는 2루 방향으로 밀어 쳤고, 한 수 앞을 내다본 사토는 여유롭게 아웃을 잡아냈다.
‘우리가 완전히 읽히고 있어.’
아라이 감독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를 나름 분석하고 나왔다고 자신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읽히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판은 벌어졌고 뒷수습을 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별 것도 아니네.’
앗 하는 사이 쓰리 아웃 체인지, 벤치로 향하던 다카기는 상대 진영을 향해 비웃음 섞인 미소를 날렸다.
며칠 전부터 히라카시가 이길 거라고 설레발을 치던 여론, 우릴 깔본 대가를 뼈와 가슴에 새겨주고 싶었다.
“뭐야 저 자식?!”
“지금 우리 비웃은 거야?!”
조롱을 당한 히라카시 벤치는 뜨겁게 불타올랐다.
예의를 중시하는 스포츠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마음 같아선 빈볼을 날려주고 싶지만,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면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 라운드 진출이 박탈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 출혈이 클까?
다이이치는 져도 잃을 게 없지만, 예선 탈락은 히라카시의 명성에 먹칠이 되는 일. 목표가 높은 만큼 도발도 감수해야 했다.
“너 첫 경기라고 너무 들 뜬 거 아니냐?”
“벌벌 떠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다나카 코치는 벤치로 돌아온 다카기를 붙잡았다.
괜한 도발로 경기가 과열되면 이쪽도 손해, 하지만 다카기는 새침한 소녀처럼 잔소리를 흘려버렸다.
“너는 거친 투구가 장점이다. 자신 있게 던져.”
“네”
한편, 히라타니는 투수 코치의 조언을 받고 마운드로 향했다.
몸에 맞는 볼이 나오든 말든, 강한 공을 뿌려대며 상대를 윽박지르는 게 내 투구 스타일 아니었던가.
1회에 홈런을 맞은 충격이 커 잠깐 당황했던 거겠지, 하위타선부터 시작되는 다이이치의 2회 초 반격을 이용해 자신감 회복에 나섰다.
‘역시 힘이 부족한가.’
후루타 감독은 하위타선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본인은 프로시절 20홈런도 거뜬히 쳐냈던 타자, 야구부 지휘봉을 잡았을 때도 학생들에게 강하게 치는 타법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기술을 소화할 수 없는 노릇, 배트를 세우고 컨택 지점까지 방망이를 짧게 돌리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이런 선수들이 히라타니의 공을 밀어낼 수 있을까? 그저 상성이 안 좋을 뿐,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다카기라면 다르지. 다음 타석도 기대해 볼 만 하다.’
그에 비해 다카기에겐 기대를 걸었다.
교타자가 방망이를 똑바로 세우는 반면, 장타자는 방망이가 투수 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스윙 거리를 늘리기 위한 자세, 하지만 다카기는 일반적인 장타자들과 다른 스윙을 했다.
장타자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팔꿈치를 뒤로 잡아당기는 반면, 다카기는 그 자세에서 바로 스윙이 나와 버린다.
앞발을 많이 드는 편이라 스윙이 다소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결하게 돌아 나오는 비결이 바로 이것, 이런 자세에서 장타가 나오다니 힘이 얼마나 좋다는 건가.
기회라는 계기만 제공하면 알아서 성장할 괴물, 다카기를 향한 감독의 믿음은 확고했다.
‘어지간한 대학생들 뺨 때릴 수준이다. 절대 밀릴 녀석이 아니야.’
경기는 흘러 다이이치의 3회 초 반격, 다카기가 선두타자로 나섰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허용했던 배터리가 신중한 승부를 펼치는 건 당연, 하지만 포수 센가노는 적극적인 승부를 요구했다.
‘히라타니가 이런 애송이한테 밀릴 리가 없어, 아니 밀려선 안 돼.’
도망치는 승부를 해봤자 다이이치의 사기를 끌어올릴 뿐, 히라타니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쳐 맞고도 정면으로 들어오다니, 배짱 좋군.’
초구부터 빠른 볼, 다카기는 바깥 쪽 공을 가볍게 밀어 쳐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만들어 냈다.
두 타석 연속 초구를 공략해 장타를 만들다니, 후루타 감독은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라운드를 둘러싼 관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마음에 들어요?’
그 사이, 2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벤치를 향해 V사인을 날렸다.
대활약에 사나에가 이끄는 매니저 군단은 이미 흥분 모드,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잘난 척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때 히라카시의 2루수 토모사다(3학년)가 조용히 하라는 핀잔을 줬다. 공수교대 때 도발을 날린 것도 얄미워 죽겠는데, 촐랑거리는 꼴이 눈에 거슬렸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참견이냐?”
“뭐 ··· 뭐라고?!”
1학년 주제에 3학년에게 이게 무슨 말버릇인가, 토모사다는 당장 사과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여긴 그라운드야, 선후배 관계는 학교에서나 따지라고”
말싸움에서 완패한 토모사다가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는 동안, 히라타니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고교 3년 동안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나보다 더 뛰어난 녀석이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상대는 겨우 1학년, 다음엔 갚아주겠다는 투쟁심이 불타올라야 하는데, 다음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할 줄이야.’
예상 밖의 결과에 히라카시의 아라이 감독도 할 말을 잃었다.
히라타니의 구위라면 어떻게든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녀석은 바깥 쪽 공도 간결한 스윙으로 밀어내고 있다.
기술은 물론 힘에서도 밀리고 있으니, 더 이상의 정면 승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선두 타자 2루타가 나왔지만 다행히 3회 초는 실점 없이 종료, 아라이 감독은 벤치로 돌아온 배터리에 굴욕적인 지시를 내렸다.
“다카기는 철저히 거르게.”
“네?!!”
센가노는 반발했다.
연타석 장타를 맞긴 했지만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피하는 승부는 다이이치의 기세를 올려 줄 뿐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다음에는 잡아낼 자신 있나?”
“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빠른 볼이 계속 얻어맞고 있는데, 그럼 변화구로 승부를 볼 건가?”
감독의 반문에 센가노는 입을 다물었다.
빠른 볼이 안 통하는데 변화구가 통하겠는가, 괜한 고집은 대재앙으로 이어질 뿐, 잠시 말이 없던 히라타니는 감독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다음 타석부터는 거르겠습니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은 자존심 앞세울 때가 아니야. 내가 지금 저 자식한테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친구가 고개를 숙이자 센가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녀석은 팀의 자존심, 이런 약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