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4)
드디어 찾아온 결전의 날, 오사카시 텐무(天母) 야구장에서 지역예선 1차전이 열렸다.
전국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스테이지는 아니지만 지역방송국의 관심을 얻기엔 부족함이 없는 경기,
관중석의 열기를 담아내던 카메라맨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특별석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하 ~ 위원님, 오랜만입니다.”
“위원님은 무슨,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히라카시 고교의 역사를 빛낸 전설의 3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교의 고시엔 2연패를 이끈 테라카도 아츠시, 1963년 나츠에서 3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한 킨타 아유무, 결승전 끝내기 안타를 때려낸 사카키 료지, 5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지금도 여름만 되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활약을 펼쳤다.
“자네, 기자들 앞에서 히라카시가 4대 0으로 이길 거라고 했다면서?”
“그게 왜?”
“4대 0이 뭔가. 10대 0이라고 했어야지.”
사카키 료지는 테라카도를 질책했다. 겨우 4대 0이라니, 모교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이이치에는 이시다가 있어, 4점도 나름 높게 잡은 것 같은데”
“그래봤자 히라타니보다 한 수 아래 아닌가.”
“그래, 내가 실언을 했으니 사과하겠네.”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움을 이런 식으로 표하다니, 말싸움도 하기 귀찮았던 테라카도는 친구의 타박을 웃어넘겼다.
“히라타니는 대표 팀에 뽑히는 건가?”
“나는 그런 권한 없네.”
“자네 야구협회 위원이잖아. 기왕이면 후배를 밀어줘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테라카도는 히라타니를 밀어주고 싶었다.
일본은 U-18 대회에서 5번이나 정상에 올랐지만, 최근 2개 대회에선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거기다 작년 후쿠시마에서 열린 WBSC15에서도 준우승, 여론의 우려도 무시하고 밀어붙인 일인데 우승을 하지 못했으니 협회관계자들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다.
히라타니가 그 한을 풀어준다면 여론도 좋아질 테고 모교의 명성도 높아지겠지, 뭣보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은 프로야구의 흥행으로 이어진다.
일단 지역예선을 통과하는 게 우선, 테라카도는 후배가 대활약을 해 주길 기대했다.
* * *
“물 좀 마실래?”
“아니, 괜찮아.”
이곳은 다이이치 고교의 대기실, 쿠로다(3학년 : 3루수)는 매니저가 건넨 물을 정중히 사양했다.
지역예선은 매년 겪는 일이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지만 물을 마시면 당장이라도 지릴 것 같은 느낌,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셔라. 수분이 부족하면 유연성이 떨어져서 안 좋아.”
“예”
코치의 조언에 겨우 들이킨 한 모금,
쿠로다는 옆에서 같이 떨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물을 권했지만, 몇 사람의 손을 거쳐도 내용물은 거의 줄지 않았다.
전장에서 있던 일화의 재현도 아니고,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다카기는 물통을 거침없이 비워냈다.
“경기 중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날도 더운데 거기서 빼낼 수분이 있겠어요? 움직이면 땀으로 나오겠죠.”
무슨 말을 해도 받아치는 녀석, 야구부원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준비 다 됐으면 나와 주십쇼.”
“알겠습니다.”
마침 찾아온 대회집행위원, 선수들은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그라운드에 발을 들였다.
“平加志(히라카시)!! 平加志!!”
오사카 최대 규모의 관현악부를 보유한 히라카시 고교는 언제나 이런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치른다.
세상 누구도 우리의 승리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 그렇잖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이이치 선수단의 어깨는 더욱 위축됐다.
‘하긴, 나도 부활동만 아니면 지금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이치는 전국 수재들의 집합소, 방학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 멍청이가 이 더운 날씨에 귀경 길을 미루고 야구장을 찾을까, 처음부터 응원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다.
“플레이 ~ !! 플레이 ~ !!”
“다이이치!!”
이때 어디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관중석 쪽을 두리번거리던 다카기는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연습경기에서 인연을 맺은 도우묘 고교 학생들이 응원을 와준 것, 상상도 못한 아군의 등장에 다른 학생들도 다카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양 팀 선수들은 정렬해 주십시오.]
안내방송에 따라 양 팀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경기에 앞두고 서로 예의를 표하곤 하는데, 상대를 철저히 부수겠다는 적의를 품는 게 본심 아닌가?
히라카시가 다이이치를 격파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여론, 기분이 상한 다카기는 상대가 먼저 고개를 숙일 때까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애송이가 ··· ’
히라카시의 중심타선을 책임지는 스즈키(3학년)는 애송이와 기싸움을 벌였다.
운동을 하는 놈이 머리를 기르다니, 감독님이 주의할 녀석이라며 영상자료를 보여주긴 했지만, 야구를 대하는 기본자세가 안 된 놈이라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저런 놈이 주전이라니, 다크호스로 명성을 날린 다이이치의 진격도 오늘로 끝이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잘 풀려야 할 텐데’
그에 비해 지휘봉을 잡은 아라이 감독은 불안을 애써 다스렸다.
다이이치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경기, 선두 타자 다카기는 앞발을 많이 드는 편이라 변화구에 약점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에 오르는 히라타니는 빠른 볼을 앞세우는 파워피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카기가 빠른 볼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감독이 선수를 의심할 순 없지.’
그렇다고 히라타니에게 변화구를 던지라는 요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빠른 볼은 녀석의 장점이자 자존심, 1학년을 상대로 그런 투구를 하라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다.
“플레이 볼!!”
주심의 콜과 함께 시작된 경기, 연습타석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다카기는 쏟아지는 조롱을 뒤로 했다.
“애송이!! 힘껏 쳐보라고!! 여기는 꽤 넓으니까!!”
저런 애송이가 검증된 에이스의 공을 쳐낼 수 있을까. 히라카시 응원단은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차분했다.
‘역시 날 얕잡아 보는군.’
상대 내야진은 장타엔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보여준 게 없는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증명하는 것,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았다.
‘조금 여유 있게 가자.’
마운드 위의 히라타니는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파워피처가 제구를 낮게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거기다 상대는 이제 막 고교야구에 발을 들인 애송이,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고 싶진 않았다.
‘왔다.’
초구부터 날아온 먹잇감, 하지만 다카기는 흥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한 동작을 재현해 내면 그만, 몸은 여름동안 흘린 땀과 노력을 기억해 냈다.
까아앙 ~ !!
“엇?!!”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는 후루타 감독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 사이 다카기는 방망이를 허공에 투척, 좌익수가 추격을 포기하자 떠들썩했던 히라카시 응원석은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우와아아 ~ !!”
“말도 안 돼!!”
그에 비해 다이이치 벤치는 난리법석, 제대로 사고를 친 애송이는 동료들의 격한 환대에 시달렸다.
1학년이 도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뽑아내다니, 믿을 수가 없는지 자기 볼을 꼬집어보는 녀석도 있었다.
“넌 이제 못 쳐도 된다!! 잘 했다!! 잘 했어!!”
지도자로 있으면서 이렇게 흥분한 적이 있었던가, 후루타 감독은 너는 할 일 다 했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카기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한방으로 만족할 순 없죠. 적어도 3개는 더 쳐야겠어요.”
생각보다 칠만 했던 고교 최강 투수의 공,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았다.
홈런을 맞았으니 다음에는 전력으로 부딪쳐오겠지, 잘난 척은 그 공을 때린 다음도 늦지 않았다.
“ ········· ”
“ ········· ”
한편, 특별석에 앉은 히라카시 OB 3인방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는 히라타니를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4대 0, 히라카시의 승리를 예언했던 테라카도의 표정은 가관, 눈치를 살피던 OB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푸념을 늘어놨다.
“저 녀석, 1학년이라고 너무 방심했던 거 아냐?”
“그렇겠지, 진심으로 던졌다면 맞을 리가 없잖아.”
“한 방 맞았으니 정신 차리겠지”
하지만 히라타니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속 타자 사토는 땅볼로 물러났지만 3번 타자 이시다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고, 4번 쿠로다가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적시타를 날리며 스코어는 2대 0으로 벌어졌다.
“하라타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요 선배!! 선배답지 않아요!!”
내 어깨에 걸린 기대와 부담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건 처음, 벤치에서 쏟아지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히라타니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뭔가 잘못됐어.’
아라이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향했다.
1회에 피안타만 4개라니, 그것도 장타만 2개가 포함됐다.
고시엔 - 지역예선 - 추계대회 - 연습경기를 모두 따져도 히라타니가 한 이닝에 안타를 4개나 허용한 적은 없다. 믿음이 컸던 만큼 충격적인 결과, 마운드로 모여든 야수들도 혼란에 휩싸였다.
“자네 혹시 어디 불편한가?”
히라타니는 감독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의 주무기는 150km를 넘나드는 빠른 볼, 포심은 본래 가라앉는 공이지만 오늘 따라 그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 릴리스 포인트를 조정하고 있는데 그게 가운데로 몰리면서 안타를 맞는 중, 빠른 볼이 이러니 변화구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제구가 조금 불안한데, 던지다보면 괜찮아 질 겁니다.”
말이 없는 히라타니를 대신해 센가노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받아낸 공,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파트너의 문제도 정확히 짚어냈다.
“아직 2대 0이야, 그렇게 마음 쓸 것 없어.”
“그래요 선배,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저희들이 어떻게든 해 볼게요.”
동료들의 격려에 히라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타자에게 홈런을 내줬으니 심리적으로 조금 급해진 게 사실, 주변이 정리되자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하자. 내 문제가 뭔지 생각해 내는 거야.’
하지만 한번 흐트러진 폼을 바로잡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친구 말대로 던지면서 감을 찾는다면 다행인데, 연습경기도 아닌 실전에서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