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3)
“사카이 라이노스 홍보팀에 있는 키타노 요스케라고 합니다.”
“아, 어제 전화주신 분이군요.”
한편, 다이이치의 후루타 감독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프로구단에서 사람이 왔다는 건 재능 있는 학생의 프로진출을 도울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대학진학을 더 선호한다.
적지 않은 계약금도 받을 수 있고, 안정된 환경에서 학업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굳이 내가 홍보활동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구단은 인재가 부족합니다. 추천해 주실만한 학생이 있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저 같은 아마추어보다는 스카우터의 눈이 더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후루타 감독은 키타노를 압박했다.
정말 프로 구단이 눈 여겨 보는 선수가 있다면 홍보팀 직원이 아니라 전문 스카우터가 왔을 거다.
애송이를 보내 놓고 정보를 요구하다니, 저쪽에서 예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고급 정보를 흘릴 이유도 없었다.
“아마추어라니요. 감독님의 고견이라면 틀림없을 겁니다.”
키타노도 순순히 물러서진 않았다. 상대는 한때 프로 선수로 활약한 인물, 아마추어라는 겸손은 너무 지나쳤다.
“이시다라면 프로에서도 통할만한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제가 원하는 건 이시다 선수의 그림자에 가려진 선수들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습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살펴보시죠.”
역시 스카우터가 아니라 홍보직원이 왔다고 언짢아하는 것 같은데, 키타노는 보물을 캐내기 위해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다.
이래봬도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했던 몸, 프로구단에 취직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기사나 데이터를 습득하며 나름대로 지식을 넓혀왔다.
발로 뛰면 뭔가 소득이 있겠지, 눈을 부릅뜨고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을 살폈다.
“야, 저 사람 누구냐?”
“다른 학교에서 온 첩자 아냐?”
학생들은 놀란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드높였다.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 모양새가 수상했지만, 그 옆에서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님을 보아하니 첩자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신경 쓰지 말고 훈련이나 해라.”
“예”
다시 시작된 훈련, 수비 훈련을 진두지휘하던 다나카 코치는 2루로 강한 타구를 날렸다.
‘이게 어딜 끼어들어.’
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토는 몸을 날리려 했지만, 다카기가 끼어들면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야, 여긴 내 구역이야.”
“어디요? 아무리 봐도 금은 안 쳐져 있는데요?”
유격수 자리를 뺏긴 게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데 능글맞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녀석, 사토는 어린애도 안 할 짓으로 맞불을 놨다.
“여기, 여기 넘어오지 말라고”
“선배님이 커버하기엔 너무 넓지 않을까요?”
이 자식이 지금 내 능력을 얕잡아 보는 건가, 사토는 다시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놨다.
‘의욕에 불이 붙었군.’
다나카 코치는 사토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봤다.
포지션 변경에 마음이 틀어질 줄 알았는데 묵묵히 자기역할을 해주는 녀석, 다시 한 번 2루 땅볼을 굴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격수 쪽으로 치우쳤고, 다카기는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야! 공 굴러 가잖아!”
“선 바깥쪽이잖아요. 거긴 선배님 구역 아니었나요?”
자세히 보니 사실, 무안해진 사토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선 한대 때려주고 싶지만 상대는 나보다 10cm 이상은 더 큰 덩치, 조용히 학교 뒤편으로 불러봤자 이길 자신은 없었다.
‘내가 잡는다. 못 잡으면 유니폼 벗을 거야.’
의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 괜히 장난이 치고 싶었던 다나카 코치는 유격수 쪽으로 타구를 굴렸다.
2루수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방향, 여유롭게 1루 송구를 마친 다카기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다.
“다시 간다!!”
다나카 코치는 아무 것도 모른 척 다시 배트를 잡았고, 먹잇감을 움켜쥔 사토는 후배를 의식한 눈빛을 내비쳤다.
유격수와 2루수는 협동이 중요한데 이대로 놔둬도 되는 걸까?
지난 연습경기에서도 그렇고 은근 기싸움을 이어가는 두 녀석, 다카기는 약간 느슨한 성격이지만 사토는 뭐든 진지한 스타일이다. 상성으로는 최악, 그래도 후루타 감독은 두 녀석이 서로를 자극하며 기대이상의 성과를 내줄 거라 믿었다.
‘왜 사토가 2루로 옮겨간 거지?’
키타노는 유격수를 보는 다카기를 유심히 살폈다.
사토는 지금까지 다이이치의 유격수 자리를 책임진 선수, 고학년을 2루로 밀어낼 만큼 저 녀석이 대단하다는 건가? 하지만 이렇다 할 정보가 없어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좋아, 잠깐 휴식!!”
뙤약볕 아래서 고생하던 선수들에겐 단비 같은 휴식 시간, 벤치에 앉은 다카기도 벗은 모자를 부채 삼아 더위를 식혔다.
“너 정말 이대로 지역예선에 나갈 거야? 안 불편해?”
이때 사나에가 머리스타일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제는 목덜미와 귀를 덮을 정도로 자라난 머리카락, 보는 사람 입장은 둘째 치고 저런 꼴로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저 오늘 실수한 거 없잖아요.”
하지만 하루는 격한 거부감을 표했다.
두발자유는 감독님이 허락한 일, 뭣보다 가위가 머리카락 사이를 들락거리는 느낌을 좋아하질 않았다.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어머니가 잔소리를 해서 지금까지 짧은 스타일을 고수했지만,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리미터가 풀려버렸다.
“그러지 말고 좀 잘라, 얼굴이 머리카락에 묻히잖아.”
“선배 지금 우리 엄마 같은 거 알아요?”
느닷없는 엄마 발언에 분위기는 폭소로 뒤흔들렸다.
요즘 매니저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 둘의 관계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다카기를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한번 묶어 볼래?”
방어에 막힌 사나에는 대안을 제시했다.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말총머리도 어울리면 활동성과 야성미를 살려줄 수 있는 패션, 사나에가 뒷머리를 묶던 줄을 건넸지만 다카기는 밀어냈다.
“아 ~ 그냥 저 좀 내버려두시면 안 돼요?”
“그냥 한번 해 봐. 싫으면 다시 풀면 되잖아.”
잠시 망설이던 다카기는 줄을 잡아들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거라 손놀림은 서툴렀고, 보다 못한 사나에가 도우미로 나섰다.
“어머, 이거 어떻게 해. 깔깔깔 ~ ”
작업을 마친 사나에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직 덜 길러서 말총보다는 강아지꼬리와 비슷한 느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움직임은 나름 귀여웠다.
“야, 너 그렇게 하고 나가면 무조건 기사 타겠다.”
다른 부원들도 폭소만발, 자기 모습이 어떤지 아직 파악이 안 된 다카기도 꼬랑지를 툭툭 치며 장난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이렇게 하고 나갈까요?”
“너 진심이냐?”
“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엔 딱 좋겠죠.”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심인 모양, 사나에도 지금 머리 스타일에 지지를 표했다.
“아직 어색하긴 한데 조금 더 기르면 괜찮아 질 거야. 나중에 수염도 기르면 나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다카기는 바로 머리끈을 풀어냈다.
팀 분위기를 위해 바보짓을 했지만 서비스타임은 여기까지, 남은 훈련 시간은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흘려보냈다.
“야, 봤냐? 히라카시가 4대 0으로 이긴다는 그 기사”
“웃기는 소리지. 그 사람 말 한 번도 맞았던 적 없잖아.”
식사 자리에서도 학생들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본인 모교를 응원하는 건 상관없는데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했다는 건, 상대 입장에서 듣기 거북한 일이다. 다이이치 선수단은 한때 히라카시가 상대라는 현실에 위축됐지만, 지금은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히라타니 지망하실 겁니까?”
가만히 있던 이시다는 키타노에게 질문을 던졌다.
히라타니는 대학보다 프로직행이 유력한 유망주, 이시다는 그동안 히라타니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번 대회에서 그 평가를 뒤집어 주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저는 홍보팀 직원이라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럼 가서 구단직원들한테 전해주세요. 누가 도내 최고의 투수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라고요.”
“오 ~ 선배, 프로직행 하실 거예요?”
부원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공부라면 제법 하는 캡틴, 대학 진출을 노릴 거라 생각했는데 프로구단 관계자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현실로 이뤄진다면 야구부 역사상 최초의 일, 후루타 감독도 그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래, 이시다라면 충분히 해 볼만 하지.”
“감독님 저는 어떨까요?”
“너는 아직 부족하다. 더 열심 해야 돼.”
요시다는 이 분위기에 얹혀가려 했지만 바로 퇴짜를 맞았다. 구위는 좋지만 빠른 볼을 받쳐줄 변화구가 부족, 프로에서 통하고 싶다면 더 노력하라는 쓴 소리를 들었다.
“그럼, 캡틴 말고 프로에 도전할 만한 선수는 누가 있나요?”
이어지는 질문에 후루타 감독은 선수들의 눈을 살폈다.
제발 날 지목해 달라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들,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음식을 입에 우겨넣었다.
그러고 보니 프로 진출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녀석, 재능만 따지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자신을 더 채찍질하라는 의미로 그 이름을 입에 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