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9화 (19/361)

19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2)

“넌 내가 아무 노력 없이 이 자리에 오른 줄 알아?!! 착각하지 마!!”

하지만 히라타니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1학년에 주전자리를 꿰차며 오사카의 신성으로 떠오를 땐 모든 게 쉽게 풀릴 줄 알았지만, 관심으로 포장한 선배들의 견제에 가슴앓이를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넌 우리 팀의 에이스다. 그러니까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

“ ··· 알겠습니다.”

팀을 혼자 이끄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이기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 있지만 지면 그 책임을 내가져야 한다는 건데, 이게 괴롭힘이 아니면 뭔가? 실제로 지역예선 4강에서 탈락한 이후, 선배들은 히라타니를 두고 뒷담화를 늘어놨다.

“차기 캡틴은 이마이가 좋지 않겠냐?”

“그래, 히라타니 그 자식은 모질지가 못해.”

“뭣보다 야구를 너무 쉽게 아는 것 같아. 그런 녀석이 캡틴이 되면 팀 기강이 어떻게 되겠어?”

이게 그동안 책임을 떠넘긴 후배에게 할 말인가?

차라리 안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 험담은 입을 타고 히라타니의 귀까지 흘러들어갔다.

‘두고 보자. 지금은 내가 힘이 없지만, 언젠가는 다 바꿔보겠어.’

절치부심하며 맞이한 3학년 시즌,

캡틴이라는 지위와 PTA의 지원이라는 힘을 동시에 거머쥔 히라타니는 야구부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누가 보면 개인적인 욕심으로 야구부를 바꿔놨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게 모르게 선배들의 견제에 시달려온 히라타니는 악순환의 고리를 자기 손으로 끊어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넌 야구를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아.”

이마이가 했던 이 말은 선배들에게 몇 번이나 들었던 조롱,

히라타니가 정말 재능에 의지하는 선수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절대지지 않겠다는 오기를 불태우며 남들 몰래 흘린 땀과 눈물이 얼마나 많은데, 동급생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서글펐다.

“내가 그동안 짊어진 부담을 네가 알기나 해? 하긴, 선배들하고 친하게 지냈던 네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겠지. 그렇게 내가 캡틴이 된 게 불만이냐?”

차기 캡틴은 보통 선배들의 추천으로 정해진다.

관습을 따랐다면 이마이가 차기 캡틴이 됐겠지, 하지만 아라이 감독과 지도부는 그동안 팀을 떠받친 히라타니의 입장을 배려했다.

그리고 야구부가 이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부원들이 지지를 표하면서 이마이는 캡틴이 되지 못했다.

결국 언젠간 터질 수밖에 없었던 폭탄, 감정이 격해진 이마이는 주워 담지 못할 말을 퍼부었다.

[그래, 이젠 네가 캡틴이니까 내가 뭐라 할 입장은 못 되지. 알아서 잘 해 봐라. 그리고 난 더 이상 너와 함께 못하겠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네가 무책임한 놈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대화도 안 했을 거다.”

이마이는 정말 팀 훈련에 무단 결석해버렸다.

지역예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게 무슨 난리인지, 아라이 감독은 부원들을 심문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다.

‘이거 큰일이군.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나서는 거였는데’

아라이 감독도 예전부터 두 녀석의 대립을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녀석들이 스스로 타협점을 찾길 바랐건만 내가 너무 물렀던 걸까, 늦었지만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이마이와 연락되는 사람 있나?”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3학년 쿠사나기가 통화에 나섰다.

하지만 묵묵부답, 방학 중이라 학교로 오는 걸 기다릴 수도 없고 감독의 근심은 깊어졌다.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때 히라타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뭘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설마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진 않을 테고 아라이 감독은 그 속마음을 꿰뚫었다.

“이마이 몫까지 책임지겠다는 건가? 야구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건방진 생각이네.”

아라이 감독은 히라타니가 그동안 짊어진 부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팀원들을 믿어주길 바랐는데 어느새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으니,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마이 선배의 빈자리는 저희들이 채우겠습니다.”

“그래요. 저희도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눈치 없는 부원들은 히라타니를 두둔하고 나섰다.

걸핏하면 분위기를 흐리던 눈엣가시가 빠져나겠는데, 우리가 왜 고개를 숙이고 모셔 와야 하는 건가.

너 따위는 없어도 우승할 수 있다는 걸 이마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상황에 편 가르기가 웬 말인가. 자네들이 이러는 건 팀에 아무 도움도 되질 않아.”

아라이 감독은 이번 사건을 야구부장과 PTA에 알렸다.

주전급 전력이 빠졌는데 숨긴다고 넘어갈 일도 아니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학생들 관리를 어떻게 한 겁니까?!”

소식을 접한 야구부장은 펄펄 뛰었다.

조만간 히라카시의 역사를 빛낼 OB들이 고시엔 우승에 도전할 후배들을 위로할 예정인데, 핵심 선수들이 서로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렇다고 대회를 앞두고 감독을 해임할 순 없는 일, 조용히 불러들여 구두경고로 끝냈다.

“그리고 지역예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훈련은 왜 쉬게 한 겁니까? 따지고 보면 그것 때문에 아라이가 불만을 품은 것 아닙니까?”

“선수들이 너무 지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지시한 것뿐입니다.”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지금은 경고로 끝나지만 성적을 못 내면 책임은 확실히 지울 겁니다.”

이사회 실을 빠져나온 아라이 감독은 격한 한숨을 뿜어냈다.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오른 후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안 다치게 관리 좀 잘 해주세요.”

감독인데 감독 노릇을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 히라카시는 야구 명문으로 이름 난 곳이라 프로지망을 꿈꾸는 학생도 적지 않다.

최근 고교야구 혹사 논란이 일어나자 NPB는 집행위원회에 투구수 제한을 권유했고, 한 경기 투구 수를 100개, 연투를 하면 최대 30개를 넘기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국야구협회는 18세 미만 학생의 적정 투구 수를 80 ~ 100개 사이로 규정했고, 사흘 이상을 쉰 뒤에 마운드에 오를 것을 권장했다.

학부모들은 아라이 감독에게 이 규정을 강요, 그렇게 야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왜 감독을 두는 건가.

지휘봉을 맡겼으면 믿고 지켜볼 것이지 사사건건 간섭을 하니,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환멸을 느꼈다.

‘그렇다고 도망치면 내가 어린애와 다를 게 뭐가 있겠어.’

지금은 이마이를 설득해 야구부로 돌려놓는 게 우선, 이사회와 PTA의 회유와 압박에 이마이는 무단이탈 이틀 만에 얼굴을 드러냈다.

‘잘도 나타났네.’

‘그렇게도 야구부 주인노릇을 하고 싶었냐?’

하지만 부원들의 표정은 달갑지 않았다.

팀 분위기를 망친 것도 모자라 감독님까지 이사회에 불려가게 하다니,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에 이마이의 어깨는 위축됐다.

홧김에 무단이탈을 감행했지만 후회됐던 게 사실, 야구부장과 PTA 협회의 중재를 받아들여 부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야구부를 위하는 마음은 다 같은데,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팀에 불화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팀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자, 이마이도 사과했으니까 자네도 화해하게.”

야구부장의 권유에 밀린 히라타니는 마지못해 악수에 응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화해, 사방에서 격려와 응원의 박수가 쏟아졌지만 이후에도 둘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 * *

“테라카도 씨,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셨는데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허허 ~ 오랜만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제가 후배들에게 무심한 줄 알겠습니다.”

지역예선을 열흘 앞둔 어느 날, 히라카시의 역사를 빛낸 인물이 모교를 방문했다.

테라카도 아츠시는 고교 3년 동안 공식대회에서 타율 0.365, 홈런 75개, 172타점을 기록한 괴물. 프로에 진출하면서 장타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1800안타와 250홈런 200도루를 동시에 달성하며 위명을 떨쳤다.

지금은 NPB 협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프로야구 흥행에 이바지하는 중, 9월에 열릴 청소년야구 대회와 도쿄 올림픽 준비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후배들을 위로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히라카시 고교가 올해는 우승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당연하지요. 마지막 우승이 2003년인데 ··· 올해는 그 바람이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15년 째 소식이 없는 모교의 우승,

2번이나 우승 깃발을 들어 올린 테라카도는 자신의 기운을 후배들에게 전달해 준다며 모교를 자주 방문하고 있다.

후배들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 오늘도 많은 기자들이 테라카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다이이치는 센바츠 지역예선에서 8강까지 오른 팀입니다. 아무리 히라카시라도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 같은데요.”

“분명 다이이치는 좋은 팀입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히라카시를 꺾을 팀은 못됩니다.”

“스코어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나요?”

“4대 0으로 히라카시가 이길 겁니다. 이시다라면 6회까지 2점으로 버텨주겠지만, 다른 투수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히라타니가 다이이치 타선을 0점으로 막아낸다는 전제를 깔고 간다는 건데, 너무도 확신에 찬 답에 기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일본이 전승 우승한다.”

“일본이 WBC 3연패를 한다.”

“이번에야 말로 우승이다.”

안타깝게도 테라카도의 예상은 빗나간 경우가 적지 않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일본의 전승 우승을 장담했지만 결과는 한국에게 2번이나 발목을 잡히면서 목메달, 2013 WBC 역시 4강에 머물렀고 2017년도 다르지 않았다.

본인의 형편없는 점괘 능력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다이이치를 띄워주는 게 나을 텐데, 어쨌든 기자들은 테라카도의 호언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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