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누굴 위한 무대인가 - (1)
이곳은 다이이치 고교의 1라운드 상대로 결정된 히라카시 고교, 지역예선을 앞두고 야구부관계자들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야구 명문으로 이름이 높은 만큼 이사회도 야구부 지원에 적극적이지만 성적이 따라오지 않으면 간섭도 심해지는 게 문제, 최근 16년 동안 히라카시 고교는 고시엔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최고 성적은 센바츠 준우승, 그 사이 한수 아래로 평가받던 키타마치는 2번이나 우승 깃발을 들어 올리며 오사카의 새로운 강호로 떠올랐다.
‘책임은 감독이 지면 돼.’
이사회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을 몇 번이나 교체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임 감독은 이사회 눈치나 보는 신세, 여기에 최근 PTA까지 야구부에 간섭하면서 학생들만 곤란한 처지가 됐다.
“알아봤나?”
“예 부장님”
다이이치 고교를 살펴본 스파이는 야구부장에게 자료를 건넸다.
원래는 감독이 보고를 받아야 할 일이지만, 감독의 권위가 무너진 이곳에선 이런 일이 당연했다.
“다카기가 다이이치로 갔어?”
“예”
다카기 영입은 아라이 감독이 간절히 원하던 일이다.
실제로 통과 직전까지 갔다가 야구부 부장의 반대로 뒤집어 진 일, 일이 묘하게 꼬이자 부장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우리 학교로 올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말자고”
“네 ··· 그렇지요.”
방금 전까지 그렇게 놀래놓고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니, 스파이는 부장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웃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네 탓, 이사회와 연줄이 있다고 까불거리는데 먹고 사는 일이라 별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다카기 하나 들어왔다고 달라진 건 없겠지. 전력 분석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럼 이 자료는 감독님께 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스파이는 부장을 거친 자료를 감독에게 보고했다.
다카기가 다이이치로 갔을 줄이야, 아라이 감독은 대폭 향상된 이시다의 구속보다 유망주의 행적이 더 신경 쓰였다.
“투구 영상 찍은 건 없나?”
“이시다와 요시다가 있는데 그 녀석이 나오겠습니까?”
“아니, 내가 감독이라면 그 녀석은 반드시 기용할 거야.”
아라이 감독은 다카기를 경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이이치의 에이스 이시다는 높낮이를 잘 활용하는 투수다. 이런 선수를 상대하다가 역회전이 걸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오면 타자들은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제구를 중시하는 고교야구에서 역회전이 걸린 공은 이단아, 하지만 다카기는 그 공을 스트라이크에 꽂아 넣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게 어느덧 2년 전, 타격 자세도 그렇고 투구 폼도 정석과 먼 녀석이라 감독들이 제일 싫어 할 유형이지만, 아라이 감독은 예전부터 다카기를 눈 여겨 봤다.
그 사이 녀석도 많은 성장을 이루었겠지, 가능하면 투구영상도 구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수고해 줄 수 없겠나?”
“하지만 부장님이 전력 분석은 더 할 필요 없다고 ··· ”
스파이는 감독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부장이 알게 되면 날 어떻게 보겠는가. 거기다 지난번엔 기자들 사이에 섞여 있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려웠다.
“다카기는 연습경기 때 등판 안 했나?”
“예, 마운드는 이시다와 요시다가 책임졌습니다.”
나는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라이 감독은 혼자 남은 방에서 영상을 돌려봤다.
‘집행위원회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대진표를 짠 거야?’
이런 팀이 어딜 봐서 C급이라는 건가.
상대가 야구 동아리 팀이라 유달리 돋보이는 것뿐일까? 하지만 아라이 감독의 눈에 비친 다이이치 선수단의 기량은 지난 3월보다 한 단계 올라와 있었다.
거기다 사토를 2루로 옮기고 다카기가 유격수로 가면서 더 단단해진 내야진, 땅볼 유도 비율이 높은 이시다의 장점을 살려주는 전략 아닌가.
아라이 감독은 고심 끝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 *
“너희들, 이래가지고 고시엔 우승 하겠어?!!”
아라이 감독이 고심에 빠진 그때, 히라카시의 주전 3루수 이마이 히데오카는 부원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오사카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키타마치에게 내줬으니 고참 학생들의 마음이 급해진 건 당연, 하지만 신입생들은 그 기대에 따라주질 못했다.
‘저 자식 또 시작이네.’
캡틴 히라타니는 후배들을 몰아세우는 이마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상대는 신입생, 고시엔 우승보다는 선발멤버 발탁이라는 목표가 더 현실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닦달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마이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후배들을 다독였다.
“너희들이 이해해라. 예선이 얼마 안 남아서 초조해서 저러는 거야.”
같은 3학년이지만 이마이와 히라타니는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전혀 달랐다.
재능 없는 학생이 다른 녀석과 똑같이 훈련하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이마이는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며 실력을 키웠고, 감독과 선배의 지도가 가르침으로 위장한 가혹행위라도 받아들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마이는 재능이 없어도 노력만 있으면 실력을 키울 수 있다고 믿었고, 부원들에게 근성을 발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모든 부원을 선수 급으로 키울 순 없어.’
그에 비해 히라타니는 1학년부터 고시엔에 진출, 2학년 때는 선배들을 밀어내고 에이스 자리를 꿰찬 야구 신동이다.
어린 나이에 신동 소리를 들으며 팀의 핵심 선수에 오른 학생과 밑바닥부터 올라온 학생의 가치관이 같을 순 없는 일, 두 사람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힘 좀 써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이마이는 히라타니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히라타니는 야구부 캡틴, 거기다 어머니는 야구부를 지원하는 PTA의 부회장이다. 3학년이 되면서 야구부 주도권을 쥔 히라타니는 어머니의 힘을 빌려 일반 전형과 선수 전형으로 나눴던 지원서를 하나로 통합했다.
무슨 계급제도 아니고, 중학교 시절 야구를 한 게 그렇게 존경 받을 일인가?
선수 전형으로 입부한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일반 전형으로 입부한 학생들에게 뒷정리나 잡일을 떠넘겼고, 악순환이 반복되자 야구부에 입부하는 학생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야구부의 옛 영광을 재현하려면 잘못된 것부터 바로 잡아야겠지, 하지만 이마이는 히라타니가 주도하는 개혁을 곱게 보지 않았다.
‘어쩌다 야구부가 정치판이 된 거지.’
지원서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야구부원은 늘었지만 엄격한 분위기는 그만큼 희석됐고, 지금은 농담이나 나누는 친목회와 다를 게 없어졌다.
그리고 캡틴도 어디까지나 야구부의 일원일 뿐, 어머니를 움직여 감독님의 권한까지 간섭하는 게 옳은 일인가?
이마이는 히라타니가 야구부를 망치고 있다며 격분했지만 일단 화를 억눌렀고, 히라타니도 그런 이마이를 의식하면서 야구부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우리 입장만 난처하게 됐네.’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들의 처치도 위태롭긴 마찬가지,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무서울 게 없는데 왜 저러는 걸까,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던 고토부키 세이치(2학년)는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젠 나도 스타팅 멤버야,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겠어.’
선배들의 다툼이 내 힘으로 해결 될 일인가. 여름이 지나면 팀을 이끌어가는 건 우리 2학년들,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기량향상에 집중했다.
“감독님 오셨습니까.”
“나 신경 쓰지 마고 하던 일 하게.”
마침 등장한 그라운드의 보스, 아라이 감독은 벤치에 앉아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을 살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상대는 이전보다 강해졌는데 우리는 어떨까.
연습이라면 어느 학교보다 많이 했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은 휴일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왜 저것 밖에 못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학생들은 30도 중반을 오가는 무더위 속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거기다 우승에 대한 압박과 자신과의 싸움에 쫓기는 중, 아라이 감독은 지금 팀에 필요한 건 훈련이 아니라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하고 다들 모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코치의 부름을 받은 학생들은 감독 앞에 집결, 아라이 감독은 너그러운 목소리로 제자들을 위로했다.
“자네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여름방학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내일은 다들 편히 쉬게.”
설마 했던 휴가라니, 신입생들은 환호성을 지를 뻔 했지만 이마이 선배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었다.
“감독님, 지금 팀에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가롭게 쉴 여유가 있겠습니까?”
“잘 쉬는 것도 이기기 위한 조건이네. 그렇게 알고 내일은 푹 쉬게.”
이마이는 반발했지만 아라이 감독의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 중요한 때에 하루를 날리다니, 하지만 신입생들은 간만의 휴일을 맞아 들뜬 기분에 휩싸였다.
[야, 너희들 내일 다 나와]
하지만 이마이가 보낸 문자는 모든 것을 뒤엎었다.
감독님이 쉬라고 했는데 일개 선수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지시를 내리는 건지, 신입생들은 소심한 저항에 나섰다.
[선배, 내일은 감독님이 쉬라고 하셨는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실력이 없으면 연습을 해야 할 거 아냐, 잔말 말고 다 나와]
1 ~ 2년 전만 해도 야구부원들은 선배의 명령에 복종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 시대를 버텨온 이마이는 바뀐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선배, 이마이 선배가 내일 훈련 나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죠?]
“나가지 마.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신입생들의 구원요청을 받은 히라타니는 얼굴을 붉혔다.
캡틴인 날 제쳐두는 건 이해하겠는데, 지도부의 뜻까지 제 멋대로 뒤집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애들한테 왜 그런 문자를 보낸 건데?”
[벌써 너한테 고자질 했냐? 1학년 주제에 도망칠 궁리부터 하니, 우리 은퇴하면 이제 지역예선 통과도 힘들겠네]
남의 일인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히라타니는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드러냈다.
“도대체 나한테 불만이 뭐냐?”
[그걸 몰라서 물어? 넌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전에 네 자신부터 돌아봐.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이마이는 야구부의 주인은 학생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개혁도 우리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건데, 히라타니는 PTA라는 배경을 움직여 일을 처리했다.
이게 정말 야구부를 위한다는 놈이 할 일인가.
거기다 감독이라는 사람이 학부모가 몇 마디 했다고 꼬리를 내리다니, 야구부의 책임자라는 의식이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너처럼 야구를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부족하면 노력을 해야 하는데 너는 지금 부원들을 다 천재처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마이가 히라타니를 좋게 보지 않는 건 개인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다.
나는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는데, 저 자식은 입학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더니 1년 만에 에이스 자리까지 차지해 버렸다.
모두가 천재처럼 야구를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쉬엄쉬엄 하면 된다며 야구부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있으니,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