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등어 떼 - (5)
‘벌써 끝인가.’
후루타 감독은 그라운드 분위기를 살폈다.
2대 0일 땐 용기를 불태웠던 손님들이 지금은 추격의 동력을 잃어버린 느낌, 조금 더 발악해주길 바랐지만 이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깡 ~
그 사이, 마이타케는 기습번트를 댔다.
이시다는 좌완이라 무게 중심이 3루로 쏠릴 수밖에 없고, 마이타케는 그 점을 노려 1루로 타구를 굴렸다.
‘이 자식이 하찮은 수작을!!’
이시다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급커브에서 운전대를 돌린 탓에 발을 헛디뎠고 포수 시노자키가 타구를 잡았다.
‘젠장, 방심했다.’
결과는 세이프,
기습번트 대비 훈련은 여름동안 충분히 했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자리로 돌아온 시노자키는 코치의 눈치를 살폈다.
승부란 한 순간의 방심과 실수에서 갈리는 것, 다나카 코치는 실수를 그냥 넘기는 성격이 아니다. 훈련 시간을 늘려서라도 바로잡으려 할 텐데,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간다.’
한편, 마이타케는 팀 창단 첫 안타에 이어 첫 도루까지 노렸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니 같은 수작에 또 걸려들진 않겠지. 동료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득점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었다.
‘누굴 바보로 아냐, 그렇게 쉽진 않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녹록하지 않았다.
이시다는 견제에 유리한 좌완, 포수 마스크를 쓴 시노자키도 어깨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잔재주는 잔재주일 뿐, 기습번트 도발은 배터리의 성질만 자극했다.
‘너 잘 걸렸다. 어디 한번 굴러 봐라.’
이시다는 연속 견제로 마이타케를 1루에 돌려보냈다.
스코어가 8대 0까지 벌어졌는데 왜 저 자식의 눈은 안 죽는 건가. 그래도 마이타케는 땅바닥을 뒹굴었고, 이시다가 발을 풀면 다시 1루에서 멀어졌다.
‘여기서 안 던지면 한소리 하시겠지.’
실전에서 견제구를 너무 많이 던지는 것도 경고사항, 이시다와 사인을 교환한 시노자키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내가 들어간다.’
그 사이, 2루수 사토는 유격수 다카기에게 사인을 보냈다.
누가 봐도 주자는 뛸 기세, 병살을 노린다면 유격수가 2루 커버를 들어가는 게 맞지만 지금은 내가 처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잡았!! ··· 아오 ~ !!’
진짜 뛰어버린 애송이,
시노자키는 송구를 내질렀고 예고대로 사토가 커버를 들어갔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게 들어온 송구, 아웃 타이밍이었지만 주자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다카기는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흙먼지를 털어내는 주자를 살폈다. 적이지만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는 선수, 이길 가치가 있는 상대로 받아들였다.
‘잔재주는 여기까지, 이제는 정면승부다.’
선수 겸 감독 노릇을 하고 있는 마이타케는 벤치에 사인을 보냈다.
한 점 줘도 승패엔 영향이 없지만, 콧대 높은 상대 팀이 실점을 받아들일 리 없다. 그 증거로 외야수들은 전부 전진배치, 지역예선 8강까지 갔던 팀을 긴장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얕잡아 보인 치욕은 풀렸다.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
언제까지 캡틴의 활약에 의지할 순 없는 일, 도우묘 고교 선수단도 다시 용기를 얻었다.
‘여기서 맞는 건 치욕이다.’
이시다는 잠시 봉인했던 변화구까지 앞세웠다.
기자들이 보고 있는데 동네야구 팀에게 실점을 하는 건 치욕, 상대가 진루타에 집중할 거라는 걸 간파하고 몸 쪽 승부를 택했다.
‘안 치면 돼.’
하지만 도우묘 타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주심은 좌우 폭이 좁은 편, 끈기 있게 바깥쪽 공을 기다렸다.
까앙 ~ !
가볍게 때린 타구는 투수 옆을 지나 2루로 굴러갔다.
2루 주자는 3루로 출발, 공에 대한 집착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은 사토는 몸을 날려 타구를 막아냈다.
글러브에 맞은 공은 유격수에 전달, 3루 송구를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라 다카기는 타자 주자만 1루에서 잡아냈다.
“어깨가 얼마나 강한 거야?”
“지금 뭔가 대단하지 않았어?”
기자들이 앉은 자리는 다시 술렁거렸다.
느린 타구가 2루수 글러브에 맞고 튀었기 때문에 아웃을 잡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급하게 송구했다면 실책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 다급한 순간에 타자주자를 잡아낸 건 눈여겨 볼만한 장면이었다.
‘히라타니와는 잘 안 맞았을 수도 ··· ’
히라카시에서 온 첩자도 못 먹는 포도를 나름대로 평가했다.
히라타니는 150km가 넘는 빠른 볼과 커브를 앞세워 많은 삼진과 플라이 볼을 유도해 낸다.
피안타율이 낮으니 내야수의 능력에 영향을 덜 받는 편, 다카기가 뛰어난 선수라는 건 인정했지만 우리 팀에선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 거라며 아쉬움을 삼켰다.
‘거짓말 하지 마라. 지금 와도 주전급이잖아.’
하지만 본심을 숨길 수 없는 법,
히라카시는 올해 신입부원만 67명을 받았다. 개교 역사상 최대 인원, 이중 지역예선 선발 라인에 이름을 올린 녀석은 없다.
전성기 땐 어지간한 대학팀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선수층이 탄탄했고, 이런 팀에서 1학년이 선발이 되는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보다는 선수층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꿀리지 않는 전력, 그런 팀에 와도 저 녀석은 주전을 차지할만한 재능이 있었다.
‘투수로는 안 내보내는 건가.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야수로서의 재능은 분명하지만 투수 쪽은 어떨까,
하지만 다이이치엔 확실한 에이스가 있고 요시다라는 믿을만한 선수가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 이런 시시한 연습경기에서 다카기의 투구를 볼 일은 없겠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봤자 더 얻어낼 정보는 없다고 판단한 스파이는 현장에서 철수했다.
까앙 ~ !
“들어 와!! 들어 와!!”
그 사이 터진 외야 플라이, 홈으로 들어오기엔 약간 짧았지만 마이타케는 부원들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공식경기 첫 득점, 목표를 이룬 마이타케는 뛰쳐나온 부원들과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봐!! 우리도 할 수 있다니까!!”
“그래!! 한 점 더 내보자!!”
그렇게도 좋을까, 치욕을 당했지만 녀석들을 바라보는 이시다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이야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가 됐지만 이시다도 한땐 안타 하나, 득점 하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시엔 진출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앞세우면서, 작은 것에도 의미를 두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이토가 원했던 즐거운 야구가 이런 게 아니었을지, 하지만 녀석은 이미 야구부를 떠나버렸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되돌릴 수 없지만, 애송이들이 가르쳐 준 교훈은 가슴에 담아뒀다.
“정렬!”
“고생하셨습니다!!”
이날 연습경기는 14대 1, 다이이치의 완승으로 끝났다.
패자에겐 지역예선 출전이라는 목표를, 고시엔 진출을 노리는 승자에겐 스포츠의 본질을 깨닫게 해 준 의미 있는 경기였다.
“식사 준비 다 됐으니까 씻고 부원실로 오세요.”
경기는 끝났지만 뒤풀이는 계속 됐다.
교통비를 지원 받은 것도 감사한 일인데 식사까지 하고 가도 되는 걸까, 마이타케는 사양했지만 사나에는 신경 쓸 거 없다며 손님들을 붙잡았다.
“부원들이 평소 먹던 거에 밥만 조금 더 한 거예요. 특별한 것도 없으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도 너무 죄송한데 ··· ”
“뒤에 있는 부원들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요.”
그렇잖아도 배가 고팠는데 캡틴은 왜 쓸데없는 사양을 하는 건지, 결국 도우묘 고교 야구부는 조금 더 신세를 졌다.
“죄송한데 여러분들 드릴 밥은 없어요 ~ ♡”
부원들이 몸을 씻는 동안 사나에는 기자들을 학교 밖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다카기에 흥미를 느낀 몇 몇 기자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사나에를 통해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등번호 10번 선수에 대해 몇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글쎄요. 저는 매니저라 아무것도 몰라요. 저에 대한 질문 아니면 사양하겠습니다 ~ ♡”
결국 별 다른 소득 없이 철수한 기자들, 평화를 되찾은 야구부는 부원실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정말 네가 선수 겸 감독이냐?”
“네, 고문 선생님은 있는데 잘 안 나오세요.”
그세 많이 친해진 학생들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야구부도 없는 곳에 학생들이 모여 클럽을 만들었다니, 이시다는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나름대로 애를 쓰는 뒷배경이 궁금했다.
“사실 야구부가 생길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집 근처에 있는 도우묘 고교에 지원을 했고요.”
“그런데?”
“잘은 모르겠는데 어른들이 서로 의견이 틀어진 것 같아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야구부는 어른들의 사정에 휘둘리기 쉽다. 이사회나 학부모 협회가 간섭을 하는 건 흔한 경우,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야구부가 해체되는 일도 간혹 있다.
도우묘 고교도 한때 야구부 설립을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운영방식과 자금 조달 문제로 어른들은 대립, 결국 설립한다는 말만 떠돌다 없던 일이 됐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라고?’
‘약속이 다르잖아.’
입학식을 16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 학생들은 충격에 빠졌다.
어른들이 못 한다면 우리가 하는 수밖에, 마이타케의 뜻에 동조한 아이들은 야구부를 창설했지만 훈련 장비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지역예선과 야구부를 후원하는 프로구단에 도움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원래 프로구단이 돈 안 되는 일은 안 하려고 하잖아.”
“그래, 얼마 전엔 키타마치에 후원금도 냈다고 들었어.”
그에 비해 유명 선수가 있는 학교는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움직인다.
구단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출하는 유망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미리 미끼를 던져두는 건데, 정말 지원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지 않을까.
말없이 듣고만 있던 후루타 감독도 학생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포기해선 안 되네. 오늘 자네들이 홈을 밟을 수 있었던 건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덕분이야. 우리 학생들도 자네들을 보고 깨달은 게 있을 거야.”
감독도 없이 팀을 이끌어 가는 학생들,
그래도 씩씩하게 야구를 하는 모습에 후루타 감독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학생들이라면 앞으로도 교류를 이어 갈 가치가 있겠지, 다나카 코치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교류했으면 좋겠는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저희야 감사한 일이죠. 불러주시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우리 부원으로 품어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대신 여유가 있는 한도 내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