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고등어 떼 - (4)
“이시다 선수, 현재 몸 상태는 어떤가요?”
“아주 좋습니다.”
연습경기를 앞두고 다이이치 고교는 또 다른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시엔 시즌이 됐으니 기자들은 특집기사를 싣기 위해 동분서주,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다이이치 고교도 제법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1라운드 첫 상대가 히라카시 고교라는 게 문제, 한 기자는 이시다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지난 대회와 비교해 팀 전력이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고시엔 진출 자신하십니까?”
“뭐, 그건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숨기는 게 있다면 솔직하게 얘기해주시죠.”
하지만 입이 무거운 이시다는 지금 말하면 재미없지 않겠느냐며 기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말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는 걸까, 기자들은 다시 후루타 감독을 심문하고 나섰다.
“히라카시를 꺾을 비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후루타 감독도 입에 건 자물쇠를 풀지 않았다.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비싼 척을 구는 건지, 기자들이 철수하는 동안 외야에 자리 잡은 수상한 무리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걸 연습경기라고 하는 거야?’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하는 법, 요즘은 고교 야구도 데이터를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사카에 존재하는 야구부만 180여개, 그 많은 학교의 전력을 다 분석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도쿄는 무려 300여개, 학교가 너무 많아서 절반으로 나눠 예선을 치를 정도다.
사정이 이러니 제대로 된 전력 분석은 불가능, 유명한 팀의 경기영상은 구하기 쉽지만 다이이치처럼 애매한 팀은 그것도 어렵다.
그래도 녹화 내용을 찾는 고객은 있기 마련, 하지만 상대가 야구부 동아리라면 제대로 된 경기가 될 리 없다.
‘이런 걸 찍어봤자 아무 이득도 없다고’
멀리서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그래도 외부손님 탈을 쓴 스파이는 외야를 맴돌며 건질만한 영상이 있는지 살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외부손님이 물러나자 그라운드에 모인 학생들은 상대에 대한 예를 표했다. 조용히 경기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저 많은 구경꾼은 뭔지, 생각보다 일이 커지자 도우묘 고교 선수단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야,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시원하게 음료수나 들이킬 땐 좋았는데, 그게 최후의 만찬이었을 줄이야. 교통비까지 지원받았으니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저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콜드 게임이 몇 점차였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한 점이라도 더 낼 생각을 해야지!”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불쾌함을 표했다. 이 상황에서 콜드게임을 운운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잘 들어, 우리가 기자들 앞에 설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이 경기는 우리부의 미래가 걸린 일이야. 다들 정신 차리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집중해. 알아들었어?”
“어 ··· ”
오늘 따라 기합이 바짝 들어간 캡틴, 덕분에 도우묘 선수단은 흔들리는 정신을 바로 세웠다.
“플레이 볼!!”
일일 심판으로 된 다나카 코치의 콜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편파판정은 학생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질 않겠지, 최대한 공정하게 보겠다는 다짐을 세웠다.
‘이겨야 할 경기를 잡는 것도 실력이다.’
마운드에 오른 이시다는 흐트러진 정신을 재정비했다. 이겨도 득이 없고 지면 망신이 되는 경기, 반드시 이긴다고 다짐한 이상 적당히 봐줄 생각은 없었다.
“볼 ~ ”
바깥쪽에 걸쳤지만 판정은 볼, 실전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안 잡아 주네.’
초구를 지켜본 타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팀이라 판정도 후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짜디짠 심판,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구속은 확실히 올라왔군.’
2구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아냈다.
이시다의 단점은 필요할 때 구속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는 것. 후루타 감독은 고심 끝에 불안정한 하체가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힘이 실릴수록 앞발이 받쳐줘야 하는데, 구속을 올리면 앞발이 타자 쪽으로 밀리면서 제구가 흔들렸다.
문제점을 알았다고 해결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시다는 이번 여름 동안 기술보다 하체 강화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1학년에 밀릴 순 없지’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자극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1학년이지만 다카기는 연습경기에서 범상치 않은 강속구를 던져댔다.
여기에 타고난 유연성을 갖춘 녀석, 이번 여름동안 다나카 코치는 키킹을 낮추고 하체를 조금 더 강하게 트는 방식으로 다카기의 투구 폼을 조정했다.
하체 회전이 강해지면서 팔 스윙 속도도 상승, 이런 투구 폼이라면 타자 입장에선 공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조금만 다듬으면 이 녀석은 완전체다.’
후루타 감독은 가르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다카기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르침과 애정을 줘도 학생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도자 입장에서 그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다. 그런데 다카기는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있으니, 밥 잘 먹는 자식을 보는 것 같아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었다.
그동안 감독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이시다 입장에선 조금 서운한 일, 하지만 자극을 받은 덕분에 본인도 성장할 수 있었다.
‘조금 살살 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초대 손님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일. 앗 하는 사이 엇 하고 공이 지나가버리니, 잠시 피어났던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어땠냐?”
“뭐가 보여야 치지.”
먼저 매를 맞은 손님은 친구들에게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의 경험담을 늘어놨다. 승패를 떠나 오늘 한명이라도 1루를 밟을 수 있을지, 캡틴 마이타케는 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전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던지는 공이라고, 못 칠 리가 없어.’
선구안이란 볼이 가는 길을 읽는 것, 뛰어난 투수의 공이라도 그 궤적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눈이 그걸 잡아낼 수 있다면 맞추는 건 가능하겠지, 차분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좋아, 일단 하나 봤어.’
초구는 스트라이크, 마이타케는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현실이 잔인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 두 개 봤어.’
2구는 꼴사납게 헛스윙, 체인지업에 완전히 낚여버렸다.
‘그래도 손님인데 서비스 하나 할까.’
결정구를 손에 쥔 이시다는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시험 삼아 던져본 변화구에 시원하게 낚여주다니, 그만큼 수준차이는 확연하다. 너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면 저쪽도 전의를 상실하겠지, 안타를 맞을 때까지 변화구는 봉인하기로 했다.
‘그래, 세 번 봤어. 네 번째 공은 친다.’
결과는 삼구 삼진, 그래도 마이타케는 씩씩하게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야,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
“차라리 홍백전을 하는 게 낫겠다.”
한편, 공수교대를 앞두고 다이이치 선수단은 불만을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심한 격차, 여름동안 누구보다 바쁜 여름을 보낸 학생들은 ‘우리는 더 강해졌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수준 낮은 팀을 상대한다고 기자들 앞에서 무력시위가 되겠는가. 1라운드부터 히라카시와 붙는다는 건 여론이 우릴 C급 레벨로 보고 있다는 것, 저런 토끼를 사냥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무조건 홈런 쳐라.”
“그 이하는 안타로 쳐주지도 않을 거야.”
1회 말 다이이치의 공격, 다카기는 선배들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으며 그라운드로 향했다.
1학년이 주전자리를 확보했으니 벤치에 앉은 2 ~ 3학년 입장에선 속이 쓰리겠지, 오늘 내 뒤통수에서 수상한 행동을 했던 선배들이 그 증거다.
하지만 주전은 연공서열이 아니라 실력으로 정해지는 일, 내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의욕을 앞세우진 않았다.
“저 학생은 ··· ”
이때 몇몇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속을 끌어올린 이시다의 투구도 놀랍지만, 저 학생이 여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름만 같은 거 아닌가? 그 친구 분명 시즈오카 출신이었는데’
시즈오카는 일본에서 인지도가 높은 도시가 아니다. 드넓은 공업지대가 펼쳐져 있지만 타지사람들에겐 장어의 도시 정도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국가대표 출전 경험도 없으니, 다카기가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아는 실력파, 몇몇 기자들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결과를 지켜봤다.
‘다카기?!! 설마?!!’
반면, 히라카시에서 보낸 스파이는 한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히라카시는 개교 이후 91년 동안 28번이나 고시엔에 진출했고 우승 9회, 준우승 3회라는 업적을 남겼다.
말 그대로 오사카를 대표하는 야구부, 하지만 최근 도내 라이벌 키타마치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옛 위용은 조금 누그러졌다.
여기에 300여 고교가 있는 도쿄와 라이벌 구도를 세우다 보니 선수영입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다카기 역시 히라카시의 영입 리스트에 올랐다.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하지만 확정까지 갔던 영입계획은 막판에 뒤집어졌다.
야구 때문에 유학을 하는 시대는 저물었고, 학생들은 집과 가까운 학교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야구 하나만 보고 시즈오카에서 오사카로 유학을 오겠는가. 야구부장은 외부 인재 영입에 신경을 쓰느니, 도내 유망주를 포섭하는 게 낫다며 계획을 철회해버렸다.
“왔잖아!!”
그런데 떡 하니 오사카에 나타난 녀석, 거기다 공부라면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고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안 잡혔다.
까아앙 ~ !!
이때 터진 일발 장타, 히라카시의 스파이는 아쉬운 입맛을 다졌다.
짧고 간결한 스윙에서 터져 나오는 힘이 정말 매력적이었는데, 고교에서 전문적인 수련을 거친 덕분에 힘과 기술 모두 1년 전보다 월등히 올라있었다.
‘감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지.’
스파이는 잠시 접어뒀던 카메라 렌즈를 열어젖혔다.
구속을 끌어올린 이시다의 변신도 놀라운데 저런 슈퍼 루키가 이런 곳에 숨어있었을 줄이야, 예선전이 생각보다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