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고등어 떼 - (3)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돌아간 후, 도우묘 야구부원실은 흥분에 휩싸였다.
정말 연습경기가 잡히는 건가, 하지만 몇 몇 녀석이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야, 연습경기 하는 거 너무 이르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상대는 지역예선 8강까지 갔던 팀이잖아. 우리가 상대가 되겠어?”
좋아서 시작한 야구 동아리,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공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녀석들을 상대한다? 우물 밖으로 나간 개구리는 깔려 죽을 뿐, 좁은 세상이라도 여기에 머무는 게 행복했다.
“난 깔려죽더라도 우물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
하지만 마이타케 카즈노리의 입장은 확고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니, 그럼 그 기회는 언제 오는 건가. 깔릴 땐 깔리더라도 세상의 넓음을 경험해 보는 게 청춘 아닐까?
상대가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일어나, 나가서 연습하자.”
마이타케 카즈노리는 부원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언제 전화가 올지 모를 일, 한가롭게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코치님,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요. 그런 녀석들을 상대해봤자 몸 풀기도 안 된다고요.”
한편, 다이이치 선수단은 연습경기 상대를 듣고 인상을 찌프렸다.
우리가 A급 고교에 비해 떨어지는 전력이라고 해도 야구 동아리와 어울릴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다나카 코치는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일침을 놨다.
“이 시기에 연습상대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상대를 확실히 잡는 것도 실력이다.”
승부에 100%라는 건 없다.
잡아야 할 상대를 못 잡아 눈물을 흘리는 강팀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야구는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빈도가 높은 스포츠다.
방심은 곧 패배로 이어지기 마련, 송사리도 확실히 못 잡는다면 히라카시라는 대어를 낚을 기회가 오겠는가. 코치의 충고에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경기는 언제 하는 겁니까?”
“이틀 뒤다. 후보 없이 선발라인업으로 갈 거니까 다들 긴장해라.”
“네 ··· ”
대답은 했지만 선수들의 의욕은 꺾여버렸다.
상대는 야구동아리, 선발라인업을 앞세운다면 적어도 5회 안에 15대 0으로 이겨줘야 하지 않을까, 그 이하의 점수 차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야, 그날은 네가 선발로 나가라.”
“아 ~ 선배, 자존심 상하게 왜 그러세요.”
사토(3학년)의 제안에 요시다(2학년)는 인상을 구겼다.
이래봬도 이시다 캡틴 다음가는 선발 전력인데 그런 애송이들 상대로 힘을 빼라는 건가. 1학년 중 아무나 앞세워도 이길 수 있다며 발을 뺐다.
‘우리가 누구 무시할 수준인가?’
말은 안 했지만 다카기는 선배들의 대화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동아리라고 해도 중학교까지 야구를 한 학생이 5명이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 지역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다들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조금 염려됐다.
“야, 그날은 네가 나가라.”
이때, 요시다가 바통을 다카기에게 넘겼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니니 1학년인 네가 처리하라는 건가. 뭣보다 날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느낌, 다카기는 그게 불쾌했다.
딱히 나보다 야구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선배라고 잘난 척을 떨다니, 지지 않고 한방을 날렸다.
“그럼 지역예선 선발도 제가 나가는 건가요?”
“뭐?”
“코치님이 연습경기는 선발라인업으로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제가 지역예선도 책임지는 게 당연하죠.”
제 무덤을 판 요시다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자식이 연습경기에 나가면 난 후보라는 건데,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너무 늦었다.
‘어휴 ~ 이걸 그냥’
뭔 말을 해도 한 마디도 안 지는 자식, 감독님의 총애만 없었다면 한 소리 했을 텐데, 후환이 두려웠던 요시다는 슬쩍 꼬리를 내렸다.
* * *
‘왔다. 오고 말았어.’
이틀 후, 도우묘 야구부는 다이이치 고교에 입성했다.
고작 연습경기를 치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건지, 부원들에 비해 경험이 풍부한 캡틴 마이타케 카즈노리도 초심자가 된 기분으로 정문을 넘었다.
“도우묘 고교에서 오셨죠?”
“네.”
“이쪽으로 오세요.”
마침 마중을 나온 매니저, 그런데 얼마 전 봤던 그 사람이 아니다.
이 야구부엔 매니저가 최소 2명 이상이라는 건가, 수컷들만 우글거리는 공간에 갇혀 있던 학생들은 앞서가는 매니저에 정신을 빼앗겼다.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마이타케 카즈노리도 바쁘게 고개를 움직였다.
다이이치 고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사립 명문, 학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최고 수준이라 건물도 한 두 개가 아니다.
이런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면 평생기억에 남겠지, 그냥저냥 흘려보낸 중학생 시절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야구부원실에 도착, 간단한 티 타임을 즐기고 있던 다이이치의 매니저 군단은 손님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시원한 것 좀 드릴까요?”
“네 ··· 감사합니다.”
에어컨에 냉장고도 딸린 안락한 휴식 공간 그리고 화사한 여학생들까지,
이게 정말 야구부원실인가. 땀 냄새 나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던 도우묘 야구부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손님들 오셨나?”
“네 감독님”
마침 등장한 이곳의 보스, 소파에 앉아 있던 마이타케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자 다른 부원들도 그 뒤를 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교통비 지원해 주셔서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마이타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다이이치의 감독 후루타는 한때 프로선수로 활약했고, 1991년엔 타율 0.282, 홈런 21개, 76타점을 올리며 신인왕 후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부상으로 폼이 떨어져 선수 생활은 오래하지 못했지만 8년 동안 115홈런을 칠 정도로 장타력은 인정받았던 선수,
이런 사람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니, 좋은 시설보다 검증된 감독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 * *
“야, 그 자식들 진짜 왔을까?”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그 시각, 다이이치 선수단은 하나 둘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됐지만 매일 반복되는 훈련에 야구부원들은 늦잠도 마음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연습경기로 훈련을 대체하는 날, 평소보다 훈련이 늦게 소집된 덕분에 호사를 누렸다.
“그건 그렇고, 너 오늘 2루수로 출전하는 거 아니겠지?”
“몰라”
사토는 동료의 도움에 무덤덤한 반응을 내놨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여름방학동안 사토에게 2루 훈련을 지시했다.
2루는 유격수에 비해 빛을 발하기 어려운 자리, 아무리 다카기가 귀엽다고 해도 상급생 체면까지 깎아가면서 유격수에 기용해야 했을까? 사토는 불만을 품었지만 다나카 코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넌 밀려난 게 아니라 책임이 더해졌을 뿐이다.”
2루수는 1루 송구거리가 짧기 때문에 유격수만큼 강한 어깨를 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가장 많은 타구가 굴러오는 자리라 볼에 대한 집념이 강해야 하고, 역동작으로 1루 송구를 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송구 능력도 받쳐줘야 한다.
여기에 넓은 수비범위는 덤,
1루수는 수비범위가 좁은 경우가 많다. 그 뒤를 받쳐주는 건 2루수 몫, 여기에 중견수가 처리하기 힘든 애매한 타구까지 처리, 말 그대로 굳은 일은 다하면서 주목은 받기 어렵다.
유격수가 내야수비의 빛이라면 2루수는 그 아래 가려진 어둠, 하지만 단단한 내야를 구축하기 위해선 유능한 2루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토는 그동안 유격수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어깨가 약한 게 단점, 하지만 강한 어깨와 안정적인 수비를 갖춘 다카기가 입부하면서 후루타 감독은 사토를 2루로 돌릴 수 있게 됐다.
현재 전력에서 이보다 더 안정적인 내야를 구축하는 건 불가능, 후루타 감독은 이 결정을 사토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이게 정말 최선일까?’
하지만 사토는 2루가 내 자리라는 확신을 세우지 못했다.
아직 내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신입생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 준 게 자존심이 상한 건지,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봤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경기에 나갈 수 있다면 상관없어.’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다카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 녀석이 내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야구를 잘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원한도 없는 상대에게 감정을 품는 건 웃긴 일, 어느 자리라도 주어진 책임을 다하겠다는 각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야, 저거 다카기 아니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사토는 친구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넓은 어깨와 쭉 뻗은 팔다리 여기에 사나에가 강아지 꼬리라는 별명을 붙여준 뒷머리까지, 비록 뒷모습뿐이지만 어떤 녀석인지 감이 왔다.
‘마음에 안 들어, 안 든다고’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데 야구는 정말 잘 하는 자식, 거기다 생긴 것도 미끈한 자식이라 매니저들에게 인기도 많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건지, 미워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오늘 따라 흔들리는 강아지꼬리가 눈에 거슬렸다.
“야 저거 잘라 버릴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가서 네가 주의 좀 끌어 봐. 그 사이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이때 한 녀석이 허용범위를 벗어난 장난을 주장했다.
두 사람이 주의를 끄는 동안 가위로 뒷머리를 잘라버리자는 건데, 다른 건 둘째 치고 가위는 왜 들고 다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너 그런 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냐?”
“저 자식 머리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든.”
“야, 그만 둬. 잘못하면 난리난다.”
사토는 친구들을 말리고 나섰다.
강아지꼬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동감이지만, 뒷머리가 잘려나가는데 저 자식이 눈치를 못 챌까?
거기다 다카기의 덩치는 이시다 캡틴 못지않다. 장난이라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상식을 벗어난 도발행위, 상대가 선배라고 용서할 리가 없다.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지역예선 출장은 불발, 서둘러 가위를 압수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위를 들고 다니는 놈이 어디 있냐?”
“아니 난 그냥 장난으로 ··· ”
“그게 비정상이라고 인마. 얼른 이리 내놔.”
이때 다카기가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사토는 가위를 등 뒤로 숨겼다.
다른 녀석들도 어색한 미소를 짓는 건 마찬가지, 잠시 머뭇거리던 다카기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