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3화 (13/361)

13화. 고등어 떼 - (1)

“이나바 키리코”

“예”

“기쿠치 마사후미”

“예”

시간은 흘러 1학년들은 고교 첫 시험 결과를 받아들었다.

다이이치 고교는 다이이치 대학에 포함된 부속고교, 일단 고교에 합격하면 입시시험 없이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학생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다.

매년 3번 시험을 보는데 학기 성적이 일정기준을 넘지 못하면 선생님의 추천장을 받을 수가 없고, 이러다 보니 학교엔 알아서 공부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시험 없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 선생님의 호명을 받은 학생들은 반응은 다양했다.

자리로 돌아와 성적표를 노려보는 학생도 있지만, 누가 볼까 얼른 가방에 집어넣는 학생도 있기 마련, 학창시절 중 이만큼 긴장하는 날이 또 있을까? 겁이 없는 다카기도 이번만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다카기 하루요시”

“예”

“넌 조금 더 노력해라.”

드디어 돌아온 차례, 성적표를 받아든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선 녀석들에겐 아무 말도 안하셨는데 나만 이런 충고를 받다니, 그 정도로 성적이 안 좋다는 건가?

가채점은 해봤지만 그게 절대적이라는 보장은 없는 법, 자리로 돌아온 다카기는 불발탄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성적표를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89점 ··· 다른 애들은 얼마나 잘 봤기에?’

다이이치 고교는 학년 석차를 공개하지 않으니,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89점이면 낮은 성적은 아니지만 여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재들이 모인 학교, 담임선생님의 반응도 그렇고 잘 봤다는 착각은 위험했다.

‘물어본다고 알려줄 분위기도 아니고, 부활동 때 물어보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성적표를 대놓고 보여주는 건 어렵겠지, 공부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나에 선배를 의지했다.

“으음 ··· 이건 ··· ”

“어떤가요?”

“나쁘진 않은데 조금 애매하다고 해야 할까.”

담임선생님이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사나에 선배는 전국 모의고사에서 6등까지 했던 수재, 이 사람을 최고 기준으로 세웠다.

“선배는 이번 시험에서 몇 점이나 받으셨어요?”

“반올림해서 99점”

100점은 아니지만 역시나 초 괴수,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사나에는 전국 모의고사를 꾸준히 치렀다.

다이이치 대학은 사립대학 중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공립학교까지 포함하면 전국 5위에 머물고 있다.

일본 최고의 대학은 역시 도쿄대, 수재라면 누구나 입학을 꿈꾸지만 합격생 비율은 남자가 압도적이다.

작년 합격생 비율은 87(남자)대 13(여자)정도, 그리고 오사카가 있는 관서 지방 학생이 도교대에 합격하는 비율도 10%를 겨우 넘긴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 사나에는 쉬운 길을 버리고 도전을 택했다.

“선배님이 진짜 도쿄대 가면 야구부의 기적이네요.”

“기적?”

“그렇잖아요. 누가 거길 꿈꾸겠어요.”

도교대는 다른 학교와 달리 체육특기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나에 선배도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운데, 여기 야구부원 중 그 기적을 일으킬 학생이 있을까? 다카기는 선배님만이라도 기적을 일으켜달라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너도 가면 되잖아.”

“제가 거길 어떻게 가요. 솔직히 여기에 온 것도 기적이에요.”

뜬금없이 무슨 도쿄대 타령인지, 다카기는 립 서비스로 받아들였지만 사나에는 제법 진지했다.

도쿄대는 체육특기생이 없다보니 스포츠 쪽은 거의 멸망, 특히 야구부는 66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66연패라니, 이건 뭔가 아니야.’

사정이 이러니 최근 특기생을 받자는 말도 나오는 상황, 지금부터 노력하면 특기생으로 입학할 기회가 올지 누가 알겠는가, 사나에는 정신 바짝 차리라며 후배를 몰아세웠다.

* * *

“아니, 이건 뭐야?”

그 시각, 다나카 코치는 지역예선 토너먼트 대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첫 상대는 히라카시 고교, 오사카 3강 중 하나로 평가받는 강팀 아닌가. 하지만 이건 대진 운이 없었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집행위원회는 A ~ B급 팀이 1라운드부터 탈락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첫 상대는 C ~ D급 팀으로 배정해준다.

다이이치 야구부는 지난 센바츠 지역예선에서 8강까지 오른 다크호스, 다나카 코치는 우리 야구부가 A급은 못 되도 B급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A급 고교와 1라운드부터 맞붙게 되다니, 뭔가 한참 잘못됐다며 분개했다.

“마음에 둘 것 없네.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차분했다.

센바츠 지역예선에서 8강까지 진출했지만, 우리가 그만한 성적을 꾸준히 거둔 건 아니지 않은가. 여론이 우릴 어떻게 보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야, 이거 대진표 문제 있는 거 아니냐?”

“그러게, 말이 안 되잖아.”

물론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대진표를 작성한 건지, 다른 건 몰라도 D급으로 평가 받는 이쥬인 - 아사오카 고교의 1라운드 대결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약체들을 1라운드에 붙여놓고 우리는 A급 고교와 붙으라니, 집행원회가 우리의 탈락을 바라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음모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일찍 만나서 잘 됐네요.”

이때 한 녀석이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범인은 신입생 다카기, 상급생들은 영문을 모르겠다고 반발했다.

“잘 됐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가 고시엔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잖아요. 그럼 힘이 온전할 때 밟아둬야죠.”

객관적인 전력은 히라카시가 다이이치보다 훨씬 위다.

예선전을 치를수록 힘이 빠지는 쪽도 다이이치, 고시엔 진출이 목적이라면 강적은 힘이 있을 때 미리 밟아두는 게 최선 아닐까?

이시다 캡틴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건 다카기 말이 맞다. 그리고 대진운은 약팀이나 운운하는 거다. 분하면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실전에서 보여주면 돼.”

“예!!”

기운을 차린 선수단은 예전처럼 맹훈련에 돌입, 후루타 감독과 다나카 코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히라타니가 선발로 나올까요?”

“그건 상대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

히라타니 요시오(3학년)는 오사카 부를 대표하는 에이스 중 한 명, 공식 최고 구속은 154km에 이른다.

구속이 전부는 아니지만 고교레벨에서 이 정도면 어지간한 타자는 건드리지도 못하는 수준, 우리 타자들이 히라타니를 공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운이 좋으면 히라타니를 피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내놨다.

“상대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니요?”

“우리도 지역예선 8강까지 오른 팀이네. 상대가 우릴 높게 본다면 히라타니를 내보내겠지만, 그 반대라면 2라운드를 대비해 아껴두겠지.”

지역예선을 통과해 고시엔에 진출하려면 최대 9연승, 대진 운이 좋아도 최소 7연승은 해야 한다.

아무리 철완이라도 이 많은 경기를 혼자서 책임지는 건 불가능, 거기다 2라운드 진출 팀은 다시 추첨을 거쳐 조를 편성한다.

히라카시 고교가 우릴 얕잡아 본다면 히라타니를 좀 더 중요한 경기에 내보내겠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난 다카기를 1번에 배치할 생각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괜찮겠지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후루타 감독은 몇 번의 홍백전을 치르며 선수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다카기는 카운트에 상관없이 공격적인 배팅을 하는 타입, 몇 번이나 타일러 봤지만 녀석의 성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볼넷보다 안타를 쳐 낼 수 있는 선수를 높이 평가하는 시대, 다카기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뭔가 해 낼 것 같아. 그럴 기분이 들어.’

히라카시라는 거대한 산과 마주한 다이이치 입장에선 적진을 휘몰아칠 돌격대장이 필요, 그 역할을 저 녀석이 아니면 누가 해내겠는가?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가 1라운드 통과의 열쇠를 쥔 선수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도쿄대를 간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감독의 기대와 달리 다카기는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왜 그 많은 고교 중 이곳을 선택했는가, 일정 성적만 내면 명문대진학이 가능했기 때문 아닌가. 남들 입장에선 어린놈이 벌써부터 안정을 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오늘 길도 그렇게 녹록하진 않았다.

‘넌 조금 더 노력해라.’

‘너라고 도쿄대 못 갈 이유가 없잖아.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려.’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건가.

그것보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담임선생님과 선배의 충고가 뒤섞이면서 혼돈의 파도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 * *

“그럼, 여기 출장은 키타노 씨가 가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이곳은 사카이 라이노스 구단 사무실, 홍보팀 직원들은 고시엔 예선전을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프로야구 구단이 지역 예선을 지원하고 홍보하는 건 당연한 일, 오사카 일대에 존재하는 야구부는 약 180개에 이른다.

그들을 지원하는 건 곧 팬들의 민심을 얻는 길, 홍보팀장은 직원들에게 작은 학교라도 빼놓지 않고 살필 것을 지시했다.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키타노는 일단 지난 3월, 지역예선에 출전한 선수명단부터 확보했다.

프로 팀 로스터만 살펴봐도 고시엔을 못 밟아 본 선수가 더 많다.

지역예선 통과가 유력한 학교만 체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열흘 동안 54개 학교를 둘러보고 보고서까지 작성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키타노 씨, 출장은 처음이죠?”

“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그럼 내가 조언 하나 해줄까요?”

평소 이렇게 살가웠던 적이 없는데 오늘은 어쩐 일일까. 그래도 키타노는 본심을 숨기고 조언을 구했다.

“예, 부탁드립니다.”

“그 많은 학교를 다 둘러볼 필요는 없어요. 유명한 학교는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이 있으니까 참고하면 일은 줄어들 거예요.”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내용을 그럴 듯하게 짜깁기하라는 것 아닌가. 일단 참고만 하겠다며 얼버무렸다.

‘어쩐지, 조언을 해준다고 할 때부터 수상했어.’

이렇게 말해 놓고 보고서 검토할 때, 자기가 부정행위를 적발한 것처럼 으스댈 속셈이겠지.

동료들까지 우롱하며 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을까? 그 시커먼 속셈에 놀아나느니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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