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처음이자 마지막 - (4)
“좋아!! 다카기!!”
“이대로 밀어붙여!!”
타석에선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다카기는 마운드에서 흔들리지 않는 위용을 과시했다.
상대는 지역예선 출전이 확실한 주역들, 하지만 타순이 한 바퀴 돌 동안 누구도 정타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두 번은 안 당한다.’
3회 초 A팀의 반격,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사토가 타석에 들어섰다.
첫 타석에선 초구부터 변화구가 날아왔지만 설마 똑같은 패턴으로 오겠는가. 구위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구종이 단조로운 게 문제, 후루타 감독도 이번에는 다카기의 고전을 예상했다.
‘그래도 내 갈 길 간다.’
다카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른 볼을 우겨 넣었다.
구속을 끌어올리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 활을 많이 당길수록 화살이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 유연성이 받쳐주는 선수는 그만큼 공에 추진력을 더 실어줄 수 있다.
문제는 시위를 당기는 거리가 긴 만큼 풀어주는 시간도 만만찮다는 것, 거기다 사이드 암으로 던지니 주자가 나가면 2루는 헌납하는 수준이다.
볼넷을 주느니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게 낫겠지, 아무 생각 없이 스트라이크를 우겨넣진 않았다.
까앙 ~ !
“좋아!!”
드디어 터진 A팀의 첫 안타, 한 건 한 사토는 미소를 지었지만 다카기는 모자를 고쳐 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감독님, 시험은 이 정도로 하는 게 어떨까요?”
“조금 더 지켜보세.”
다나카 코치는 감독에게 교체를 권했다.
다카기의 장단점은 파악했으니 더는 마운드에 세워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시험할 선수는 많은데 저 녀석만 계속 기회를 줄 순 없는 일,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가 1회에 보여줬던 위기관리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주길 바랐다.
‘위기에 몰리면 더 강하게 던진다.’
다카기의 투구는 변하지 않았다.
핀 포인트 제구라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역대 투수들을 살펴봐도 제구가 좋다는 선수는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피칭을 했다.
하지만 이런 투구는 심판의 재량에 따라 경기 결과가 달라지기 마련, 결국 구위가 좋아야 정상급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스트라이크는 던질 줄만 알면 돼. 존을 세분화 할 필요는 없어.’
벌써부터 제구에 의지하는 건 어리석은 일, 자신의 공을 믿었다.
‘뛰어 볼까.’
사인은 나지 않았지만 사토는 2루 도루를 시도, 하지만 2아웃이라 다카기는 주자를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이 자식이 날 무시해?’
자존심이 상한 사토는 내친 김에 3루까지 진출, 포수가 던지는 시늉은 해봤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결국 날 잡아내겠다는 거냐?’
타석에 선 후쿠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얼마나 날 만만히 봤으면 3루 도루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이 상황에서 변화구를 던지겠다고?’
다가키의 사인을 받은 포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거기다 주자는 3루에 있다. 사이드 암 투수가 폭투 위험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저 자식의 체인지업은 떨어지는 폭이 제법 크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하지만 감독이 볼 배합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받아줬다.
‘떨어져?’
빠른 볼을 노리고 있던 후쿠로는 헛스윙을 돌렸다.
설마 이 타이밍에 변화구가 들어올 줄이야. 무모한 건지 볼 배합이 좋은 건지, 머리를 굴려도 다음 공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변화구는 아닐 거야. 아니지, 내가 못 치는 거 보고 또 던지 ··· ’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잡생각을 하는 사이 날아든 결정구, 역을 찌르는 빠른 볼에 후쿠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이가 없고 분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 주먹을 불끈 쥐며 벤치로 향하는 후배를 멍 하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네. 남자야.’
설마 저 녀석의 배짱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후루타 감독이 만족한 미소를 짓는 동안, 다카기는 목덜미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너 교체다.”
“네?!!”
코치의 말에 다카기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부터 첫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난 빚을 갚아주려고 했는데 교체라니, 이럴 거면 공을 차분히 보라는 조언은 왜 한 건가.
하지만 시험 할 선수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과를 냈으니 지역예선 선발라인업에 들 발판은 세웠겠지, 처음엔 욱했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저 자식은 벌써 감독님 눈에 들었네.’
‘나도 질 수 없지.’
유망주의 퇴장은 후보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특히 다카기에게 공기 취급을 당한 다무라 히로시의 마음은 질투의 용광로, 3년 안에 따라잡겠다고 다짐했는데 벌써 격차가 벌어졌으니 조급함은 더욱 심해졌다.
“다카기 군, 물 좀 마실래?”
“어, 고마워.”
그 사이 다카기는 매니저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얼굴이야 잘 생긴 건 알았는데 어깨선이 어쩜 저렇게 매력적인지, 특히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이기적인 라인은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아 ~ 왜 가리는 건데’
눈치 없게 목덜미에 수건을 걸치는 녀석, 후배 매니저들을 위해 사나에가 제거 작업에 나섰다.
“왜 그러세요?”
“감상 좀 하게 그냥 있어.”
“ ··· 뭘 그렇게 보시게요?”
“그냥 그런 줄 알아.”
다카기는 땀이 채 마르지 않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도대체 뭘 감상하겠다는 건지, 내 뒷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찝찝함만 더해졌다.
‘도대체 뭐야?’
혹시나 해서 돌아봤더니 급히 고개를 돌리는 매니저들, 혹시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뭐라도 붙인 건가? 장난기 가득한 사나에 선배의 얼굴은 확신을 심어줬다.
“수건 치우면서 뭐 붙였죠?”
“아닌데”
“장난치지 말고 얼른 떼 주세요.”
“아무 것도 안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할래?”
왠지 내 무덤을 판 느낌, 이런 게임은 감이 좋은 편이라 슬쩍 발을 뺐다.
“빨리 말해. 안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됐어요. 그만 관둘래요.”
“이래도 말 안 할 거야? 빨리 말 안 해?”
사나에는 다카기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바라보는 후배 매니저들 입장에선 속이 뒤집어질 지경, 저 선배는 연하 남까지 수집 범위 안에 넣어두는 건가. 아니면 벌써 남들 몰래 사귀는 건 아닌지, 훈련이 끝나고 뒷정리를 할 때 그 본심을 들춰냈다.
“저기요 선배”
“왜?”
“다카기 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시 생각에 잠긴 사나에는 감을 잡았는지 후배들을 놀려줄 말을 꾸며냈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애라고 생각해.”
“투자요?”
“그래, 사람의 가치는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 걔는 지금 투자 안 해두면 나중엔 접근도 못할 존재가 될 것 같아.”
사회적으로 가치가 증명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훗날 싹을 피울만한 사람에 미리 투자를 하는 게 싸게 먹히지 않을까? 후배들은 선배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걔 함락시키는 거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왜요?”
“애가 좀 비싸게 굴잖아, 전에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을 것 같다고 물어봤는데, 지금은 자기 가치를 키울 때라 연애는 관심 없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지금도 경쟁이 만만찮은데 더 가치를 키우면 어쩌라는 건가. 하지만 사나에는 입찰이 어려워도 도전은 해 봐야 한다며 후배들을 격려했다.
“그래도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야. 나는 걔한테 투자할 시간이 얼마 없지만, 너희들은 시간이 있잖아.”
“그 ··· 그럴까요?”
“그래, 앞으로 서로 원망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보자.”
다들 왜 이렇게 진지한 건지, 사나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그 녀석은 앞으로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될 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장난을 쳐봤는데 너무 일이 커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 와서 물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경쟁심에 불을 지펴놓고 방관자 모드로 전환, 마침 문제의 인물이 나타나자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했다.
“선배, 주말 잘 보내세요.”
후배들의 저 안타까운 눈빛이란, 사실 야구부에 들어왔다고 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쉽지 않다.
훈련 중 말을 건다는 건 상상 할 수도 없는 일, 사나에는 지난 3년 동안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코치와 감독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장난이라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야구부에 막 발을 들인 아이들이 선수들과 잡담을 나눈다? 거기다 훈련이 끝나면 휙 가버리는 녀석들도 많아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건 어려웠다.
“어딜 가. 얼른 이리 와.”
“왜요?”
“왜라니, 선배가 뒷정리를 하는데 1학년이 그냥 가겠다고?”
평소엔 아무 말 없이 보내주던 선배가 오늘은 왜 이리 저기압인지, 다카기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건 내가 들게”
야구는 좋아하지만 뒷정리는 별개, 얼른 해치우고 집에 가기 위해 매니저들이 들고 있는 것들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너 주말에 뭐 할 거야?”
“공부해야죠. 이제 곧 중간고사잖아요.”
선배의 물음에 다카기는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고시엔 진출을 위해 먼저 넘어야 하는 산, 성적이 낮다고 지역예선을 치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보충수업을 받아야 한다.
다른 학교에 비해 훈련시간이 적은 편이라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페이스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보충수업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시합뿐만 아니라 훗날 대학입시를 위해서도 정신무장을 단단히 했다.
“그럼 우리랑 같이 공부하자.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좋잖아.”
“싫어요.”
다카기는 바로 퇴짜를 놨다.
부활동으로 스터디 그룹을 하는 녀석들도 있는데 그게 정말 큰 효과가 있을까, 뭣보다 혼자 있을 때 집중이 잘 되는 편이라 사양했다.
‘얘 진짜 눈치 없네.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냐?’
매니저들이 이렇게 눈빛을 보내는데 어쩜 이렇게 둔감할까, 괜히 짜증이 나서 가볍게 쥐어박았다.
“너 얼른 집에 가.”
“붙잡을 땐 언제고 가라는 건 뭐예요? 저 진짜 갈 거예요.”
“그래, 가라 가 ~ 안 잡을 거야.”
이런 둔탱이를 좋아하는 후배들이 불쌍할 지경, 그래도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