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처음이자 마지막 - (3)
‘어디 솜씨 좀 볼까.’
다카기를 향한 후루타 감독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본인이 원하는 건 유격수지만 감독 입장에선 투수로 키우고 싶은 게 본심, B팀에 쓸 만한 투수진을 거의 다 빼 버린 것도 다카기의 등판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까짓 거 감독 권한으로도 지시할 수 있지만, 억지로 시킨다고 될 일인가? 본인이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될 일도 안 되는 법, 유도 작전은 성공했으니 이제는 결과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유격수라 역시 사이드 암이군.’
다나카 코치도 연습 투구를 하는 다카기를 예의주시했다.
사이드 암은 고교 야구에선 단점으로 지적될 폼이 아니다.
바운드 볼이 나올 위험이 낮아 포수의 수비 부담도 줄일 수 있고, 특정 선수가 많은 이닝을 책임지는 고교야구 특성 상, 맞춰 잡는데 특화 된 사이드 암은 큰 이점이 될 수도 있다.
‘투구 폼이 상당히 역동적인데’
키킹이 상당히 높은 편, 거기다 몸을 약간 비틀어주는 동작도 추가했다.
구위를 살려주겠다는 의도는 알겠는데 저래서야 제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밸런스가 유지 된다면 문제없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불안했다.
“시작!!”
매니저 사나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선두타자는 사토, 포지션이 유격수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다카기를 곱게 보진 않았다.
‘응?’
분명 빠른 볼로 보고 휘둘렀는데 허공을 가르는 배트, 체인지업 사인을 받은 포수도 허둥대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던지는 건가?’
헛스윙을 이끌어냈지만 공을 받아든 다카기는 확신을 얻지 못했다.
의도한 건 체인지업인데 백스핀이 걸리면서 스플리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공, 요즘 프로야구는 포크 볼이 지고 스플리터가 뜨는 시대지만 딱히 그런 흐름을 의식하고 던진 건 아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그만큼 공이 그리는 궤적은 거칠었다.
‘우왓!’
다음 공은 빠른 볼,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토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렇잖아도 팔이 긴 자식인데 투구 폼은 사이드 암, 구속도 꽤 빠른 편이라 우타자 입장에선 지옥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세 번째 공은 반응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흘러나가던 공이 존 안으로 빨려들어 오는데, 이런 공을 고등학생이 던져도 되는 건가?
3학년이라 대회 경험도 나름 풍부한데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은 처음, 좌우 움직임도 더러운데 떨어지는 공까지 보여줬으니 어떻게 공략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칠 테면 쳐 봐라.’
다카기는 다음 공도 존 안에 우겨넣었다.
스플리터 탈을 쓴 체인지업은 미완성이지만 빠른 볼은 자신 있는 편, 중학교 시절도 이 공 하나로 전국대회를 누볐으니 두려움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가는 게 좋겠어.’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의 투구에 손을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팔각도를 조금 올리면 제구도 안정되고 공도 빨라지겠지만, 저 무시무시한 무브먼트가 희생될 게 아닌가.
일본의 지도자들은 저런 공을 이단아 취급하며 교정 해버리지만, 후루타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투수에겐 제구가 중요하지만 잘못 다듬다 볼 움직임이 죽어버리면 이도 저도 아니다.
특히 고교 야구는 제구를 중시하는 편, 타자들도 낮은 볼을 타격하는데 특화 돼 있다. 그렇다면 저런 거친 투구가 먹혀들 수도 있겠지, 여기에 떨어지는 볼만 보강하면 본선에서도 통할 녀석이라고 확신했다.
“야, 어땠냐?”
“장난 아니야.”
범타로 물러난 사토는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좌우로 움직이는 공이라 못 칠 정도는 아닌데, 떨어지는 초구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제 스윙을 하질 못했다.
이시다 캡틴도 떨어지는 공이라면 제법 던지지만, 그건 커브라 어느 정도 눈에 보인다. 하지만 저 자식은 빠른 볼과 거의 비슷한 투구 폼에서 마구를 던져대고 구속도 빠른 편, 카운트가 몰리면 답이 없었다.
‘엇?’
다음 타자 후쿠로(2학년 : 우익수)는 초구를 건드렸지만 빗맞은 타구는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우완 사이드 암은 좌타자에 투구 궤적이 오래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공은 빠르게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떨어지는 공이 아니라 찍어 쳤는데 극단적인 다운스윙이 되면서 파울, 흔히 볼 수 있는 공이 아니라 후쿠로도 감을 잡지 못했다.
‘밀어 치자. 또 몸 쪽으로 던지긴 어려울 거야.’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다음 공도 역시 몸 쪽, 겨우 피했지만 미트를 파고드는 굉음에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나한테도 저렇게 던지진 않겠지.’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시다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캡틴인데 여기서 부상을 당하면 팀에 엄청난 손해 아닌가, 하지만 선배라는 놈이 후배에게 아량을 바란다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승부란 깔끔하고 정정당당해야 하는 법, 몸 쪽 승부를 걸어와도 실력으로 물리쳐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깡 ~ !
3구 타격, 제대로 맞진 않았지만 2루수로 출전한 다무라 히로시는 불규칙 바운드에 대응하지 못했다.
허둥지둥하는 사이 타자는 1루에 입성, 히로시는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돈마이(Don't mind)!”
다카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료를 믿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삼진을 잡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겠지, 지금 투구는 내야수의 도움이 받쳐주질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똥도 먹을 게 있어야 나오지. 주자가 있어야 병살도 나오는 거 아니겠어?’
1루 주자의 존재도 생각의 전환으로 웃어넘겼다.
주자가 나간다고 반드시 실점하는 것도 아니고, 병살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다만 이 상황에서 사이드 암을 고집하는 건 무의미한 짓, 도루를 막기 위해 투구 폼을 조금 수정했다.
‘이렇게 빨랐나?’
초구(스트라이크)를 지켜 본 이시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기 타석에서 봤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구속이 오른 느낌, 초구부터 치고 나가려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구속에 몸이 반응을 해주지 못했다.
‘세컨드 피치로 쓸 공이 없다는 게 문제네.’
하지만 다카기는 이내 한계에 부딪쳤다.
또 빠른 볼을 던지면 타자도 반응을 할 텐데 여기서 바로 결정구를 보여줘도 되는 걸까, 선발투수로 활약하려면 최소 3가지 구종은 갖춰야 하는데 체인지업에 몰두 하느라 다른 구종은 아직 쓸 만한 수준까지 오르지 못했다.
‘그럼 다시 사이드 암으로’
일단 1루 주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저쪽은 이미 주전이 확보된 몸, 연습경기에서 무리하게 도루를 시도하진 않겠지. 빠른 볼 움직임이 다시 변하자 이시다는 혼란에 빠졌다.
‘저 자식, 설마 ··· ’
팔각도를 바꿔주면서 던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이시다도 1학년 때는 145km 이상을 던지는 강견이었지만, 제구에 문제가 생기면서 투구 폼을 재정비했다. 나는 일정 폼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데, 저 자식은 팔을 이리 저리 바꾸는데도 제구가 잡힌다는 건가?
에이스라는 입지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시다 뭐해?!! 벌써 투 스트라이크야!!”
“캡틴의 위엄을 보여주라고!!”
A팀 동료들이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동안 내가 선수단을 이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끌려가는 입장이 됐으니, 그것도 상대는 1학년 아닌가.
내가 그동안 노력한 세월은 도대체 뭐였는지, 천재 앞에서 지난 날의 노력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만 시원하게 싸지르시죠.’
그 사이 다카기는 결정구를 거머쥐었다.
체인지업은 노림수에 걸려들면 위험한 공, 캡틴도 설마 이 타이밍에 빠른 볼 승부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겠지.
포수 마스크를 노린다는 느낌으로 팔을 휘둘렀다.
‘빠른 볼?!’
낮은 코스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 근처로 날아드는 공, 이시다는 자기도 모르게 스윙을 해버렸다. 결과는 삼구 삼진,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던 A팀 벤치는 정적에 휩싸였다.
이시다는 센바츠 지역 예선에서 타율 0.385, 7타점을 올리며 팀 공격을 이끈 선봉장, 그만큼 캡틴을 향한 팀원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라 이런 결과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 환호성 지르면 찍히겠지?’
사나에의 뒤를 이을 신입 매니저들도 입을 다물었다.
다카기가 삼진을 잡은 건 내 일처럼 기뻐할 일이지만, 캡틴이 삼진을 당했는데 좋은 티를 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나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다카기! 지금처럼 계속 해!!”
사나에는 이시다가 이 정도로 욱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한 게 흠이지만, 그만큼 상대를 인정할 줄도 안다.
날 꺾은 상대를 깎아내린다면 그거야 말로 누워서 침 뱉기,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한 사람이 누구인가. 사나에는 다카기를 칭찬할수록 이시다도 그만큼 성장할 거라 생각했다.
“너희들 뭐해? 시합 때도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아 ··· 아니요.”
“다카기 군 파이팅!!”
“이 고비만 넘기면 돼!!”
후배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사나에는 다카기를 유심히 살폈다.
설마 캡틴을 삼진으로 돌려세울 줄이야, 가나가와 고교의 스카우트를 받은 게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는 건가.
거기다 아직 1학년, 저 녀석과 함께하는 게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게 너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 실점 하면 용서 안 할 거야!!”
아쉬운 대로 지금을 즐기는 게 최선, 성원에 힘입은 다카기는 다음 타자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며 이닝을 마무리 했다.
‘이 치욕은 오늘 반드시 갚는다.’
이어지는 B팀의 반격, 마운드에 오른 이시다는 진지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이렇게 불타오르는 느낌은 지난 3월 이후 처음, 제구를 중시하는 스타일답게 철저하게 낮은 투구에 집중했다.
‘조금 낮은 게 효율적이려나.’
초구(볼)를 지켜본 다카기는 배트 그립을 평소보다 낮게 조정했다.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한 자세, 주자도 없으니 싸지를 것도 없고 낮은 공을 걷어 올리는데 최적화 된 자세를 잡았다.
‘걸리면 위험하다.’
이시다도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직접 상대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저 녀석의 파워가 범상치 않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트라이드가 큰 편이라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겠지, 2구는 커브로 결정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앞발을 가볍게 내뻗은 다카기는 무릎까지 굽히며 볼이 될 공을 걷어 올렸다.
앞다리가 굽혀진 탓에 힘이 제대로 실리질 않았지만 생각보다 멀리 뻗어나간 타구, 아웃은 됐지만 후루타 감독은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힘만 더 붙으면 된다.’
저런 자세에서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앞다리는 무너졌지만 무게 중심이 뒤에 남아 있어 타구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근육이 덜 붙어서 그렇지 상급생에 진학하고 체중이 불면, 플라이가 될 공도 담장을 넘겨버릴 잠재파워를 갖춘 녀석으로 평가했다.
‘너무 공격적이야. 그 점은 지적해야겠군.’
다만 아쉬운 건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 후루타 감독은 타격을 마치고 돌아온 다카기에게 애정 어린 주의를 줬다.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공격적이야. 다음 타석은 공을 조금 차분하게 보는 게 어떻겠는가?”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카기는 타격 스타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선구안이 나빠서 내가 칠 수 없는 공에 배트를 냈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다. 하지만 지금 공은 충분히 때려낼 수 있었고, 다음 타석에선 내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