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0화 (10/361)

10화. 처음이자 마지막 - (2)

[학교는 다닐 만 하냐?]

“네 할아버지”

고영길은 오랜만에 손자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타지 생활을 하는 녀석이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가 늘 마음에 걸렸다.

[생활비는 안 부족하냐?]

“걱정 마세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충분할 것 같아요.”

[에잉 ~ 사내 녀석이 씀씀이도 있어야지. 너무 아껴도 못 쓴다.]

고영길은 손자에게 생활비만 500만 엔을 지원해줬다.

어지간한 월급쟁이 연봉의 2배는 되는 거금, 하지만 다카기는 쓸데없는 낭비는 하지 않았다.

“제 돈도 아닌데 아껴 써야죠. 나중에 다 갚을게요.”

[갚기는 이 녀석아, 할아버지는 이제 너한테 물려줘야 하는 나이다]

“그래도 그건 아니죠. 제가 용돈 드리는 날까지 건강하셔야 돼요.”

말이라도 고마운 일, 코끝이 찡해졌지만 고영길은 떨리는 목소리를 바로잡았다.

[허허 ~ 우리 하루 용돈 받으려면 이 할아버지가 오래 살아야겠구나.]

“그럼요. 고비를 넘기셨으니까 앞으로 괜찮을 거예요.”

[그래 ~ 그래 ~ 우리 손주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통화가 길어질수록 수명이 더 늘어나는 기분, 이대로 통화를 끝내기 아쉬웠던 고영길은 세세한 것까지 파고들었다.

[공부하고 운동 병행하는 거 힘들지 않냐?]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목표가 낮을 땐 걷는 녀석들과 경쟁하게 되지만, 목표가 점 점 높아지면 뛰고 나는 녀석들과 자웅을 겨뤄야 한다.

내가 뛰면 남도 뛰는 게 이 세상의 법칙, 현상유지도 힘든데 남보다 앞서 나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명문고에 진학하면서 다카기는 세상의 벽이라는 걸 실감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남보다 뛰어나진 않아도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 제풀에 지쳐버리는 경쟁자도 있겠지, 오늘 벌어진 레이스만 봐도 그렇다.

요시다 선배가 앞으로 치고나갔다고 그 뒤를 죽기 살기로 쫓아갈 필요는 없었는데, 난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걸까. 뭐든 일정 속도로 꾸준히 하는 게 중요, 다시는 내 페이스를 잃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사람은 뛸 수 있을 때 뛰어야 한다. 기회가 왔을 때 치고나가지 않으면 평생 남을 앞지를 수가 없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 손자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하하 ~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내 말 명심해라. 왕이란 자신의 권력을 두고 타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너도 일단 자리를 잡으면 그걸 절대 양보해선 안 된다. 알겠냐?]

할아버지의 충고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너는 평범하지 않다는 사상을 주입시킨 할아버지, 어떤 분야든 최고가 되라는 그 가르침은 이해했지만, 왕이니 뭐니 하는 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하고 무릎을 치는 거물, 다카기는 아직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영길의 손자가 아니라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싶은 게 본심, 할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느긋해진 마음에 자비 없는 채찍질을 가했다.

* * *

‘오늘은 이렇게 던져볼까?’

다음 날 아침, 다카기는 이런 저런 그립을 잡아보며 등굣길에 올랐다.

약간 느슨하게 잡아야 공이 손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는 주장이 있지만, 다카기는 개인적으로 그 의견에 반대했다.

조금 깊숙하게 잡는 편이 안정적이고 공에 회전이 잘 전달되는 느낌, 빠른 볼은 이제 어느 정도 토대가 잡혔고 이제는 변화구 연마에 집중했다.

“체인지업? 커브가 낫지 않겠냐?”

고교레벨에서 체인지업을 구사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체인지업보다 배우기 쉬운 커브라는 구종이 있기 때문, 물론 커브는 타자 눈에 읽히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고교 야구에선 나름 큰 효과를 발휘한다.

당연히 지도자들은 체인지업보다는 커브 연마로 방향을 틀기 마련, 하지만 다카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체인지업은 빠른 볼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팔각도를 바꾸면서 던지는 다른 구종과 달리, 빠른 볼과 투구 폼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선 눈으로 구별하는 게 거의 불가능, 물론 완벽히 던질 줄 안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겠지만 손에 익으면 이만한 결정구도 없다.

‘커브도 던지기 어렵긴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어렵다면 더 흉악한 놈을 단련하는 게 좋겠지.’

2년 전부터 꾸준히 단련해 온 체인지업, 아직 손에 익었다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써먹을 수준까지 올라왔다. 오늘은 마침 홍백전이 열리는 날, 만약을 위해 그동안 습득한 그립을 재정비했다.

‘또 공만 보고 있네.’

물론 야구소년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같은 반이 아니라 말을 걸기 어려운데, 저렇게 공만 보고 있으면 눈을 마주칠 기회도 없지 않은가.

스즈에는 오늘은 반드시 말을 걸겠다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공이라도 좀 떨어뜨리라고!!’

저렇게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데 왜 떨어지질 않는 건지, 떨어져라 떨어져라 주문을 외웠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카기 군, 좋은 아침”

“어, 안녕”

제 3자의 개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나는 말 한번 걸기도 힘든데 저 아이는 무슨 권리로 저렇게 쉽게 다가가는 건지, 스즈에는 일단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등교하면서도 연습하는 거야?”

“연습은 아니고 그냥 장난치는 거지.”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열심인데?”

대화가 끊기면 분위기는 그만큼 어색해지기 마련, 한눈에 봐도 여자 쪽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구애를 받는 쪽은 씩 웃을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부활동하는 거야?”

“당연하지.”

“매일 운동하려면 힘들겠다.”

“다른 학교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야.”

다이이치 고교는 학업을 우선으로 치는 곳,

지역예선이 시작되는 여름방학 시즌을 제외하면 야간훈련과 주말훈련이 전면 금지된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프로선수처럼 맹훈련을 반복하는 여느 학교에 비하면 여유로운 환경, 다카기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수롭게 넘겼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

“그래도 너무 무리할 건 없어. 넌 아직 1학년이잖아.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격려의 뜻으로 한 말인데 뭔가 거슬렸던 걸까, 다카기의 표정이 굳어지자 소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글쎄, 그건 좀 위험한 생각 아닐까?”

“위험하다고?”

“시간과 기회가 비례하는 건 아니잖아. 솔직히 우리 야구부가 전력이 탄탄한 것도 아니고, 3학년 선배들 은퇴하면 전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내겐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라.”

고시엔은 모든 야구소년들의 꿈의 무대, 기왕 야구를 시작했다면 한 번 쯤은 밟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이이치는 이번 센바츠 지역예선 8강까지 오른 다크호스, 지금이 아니면 고시엔을 밟을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는가. 다카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품었다.

‘얘한테 이런 면이 있었네.’

결의에 찬 출사표는 두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겉보기엔 약간 느슨한 면도 있는데 역시 할 땐 하는 성격이라는 건가, 다카기와 같은 반이 된 덕분에 경쟁자들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간 ‘이나바 키리코’는 마음을 굳혔다.

‘나도 네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가 됐으면 좋겠어.’

중학생 때는 연애 따윈 관심 없었는데, 다카기를 만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질 수 있다니, 여자의 행복이 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대로는 위험해.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어.’

스타팅 라인에서 출발도 못한 스즈에의 가슴에도 불이 붙었다.

하긴, 저만한 남자를 얻으려면 어느 정도 경쟁은 감수해야겠지. 요즘은 여자도 용감해져야 사랑을 얻는 시대라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선생님, 저 오늘부터 부활동 그만두고 싶어요.”

“뭐? 왜?”

“싸워야 할 상대가 생겼거든요.”

제자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던 타카코 선생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호랑이 소굴로 뛰어들겠다니, 그 각오는 칭찬해줄만 했지만 조금 무모해보였다.

“너 선생님이 다나카 선생님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 알지?”

“네, 그런데요?”

“얼마 전 여자애 3명이 야구부 매니저 하겠다고 왔데, 뭔가 냄새가 나지 않니?”

지금 스즈에가 그 대열에 끼면 개싸움에 휘말릴 뿐이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멀리서 상황을 관망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타카코 선생님은 신중론을 제시했다.

“선생님이 봤을 때, 걔는 여자가 다가온다고 마음을 열 아이가 아닌 것 같아. 여자한테 면역이 있는 유형이라고 해야 할까 ··· ”

“정말요?”

“그래, 지금은 일단 널 가꾸는 일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니? 네가 빛을 내는 사람이 되면 그 아이도 널 바라봐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해.”

“ ··· 아 ~ 어떻게 하지 ··· ”

스즈에는 혼란에 빠졌다.

우물쭈물하다가 뺏기는 건 아닌지, 하지만 야구부 코치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선생님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리도 없다.

정말 여자에 면역이 있는 타입라면 수줍은 관심에 흔들리지 않겠지, 스즈에는 선생님의 말을 믿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 * *

“A팀 주장은 이시다, B팀 주장은 쿠로다가 맡아라.”

“알겠습니다.”

방과 후 어김없이 찾아온 훈련 시간, 예고대로 오늘 훈련은 홍백전으로 대체됐다.

다카기는 쿠로다(3학년)가 이끄는 B팀에 소속, 감독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 경기에 지역예선 토너먼트 선발 출장권이 걸렸다는 건 대략 눈치 챘다.

“선배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게임 아닌가요?”

B팀 선수들은 쿠로다에게 소심한 불만을 표했다.

캡틴이자 에이스인 이시다가 A팀으로 갔다면 균형을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차기 에이스로 평가 받는 요시다(2학년)와 주전 유격수 사토(3학년)는 모두 A팀 소속, 그 외에도 팀 전력의 핵심 다수가 A 팀에 쏠렸다.

그에 비해 B틈은 거의 다 신입생, 처음부터 선발라인업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연습상대에 불과하다는 건가? 하지만 이 경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쿠로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만을 잠재웠다.

“이건 감독님이 너희들한테 기회를 주신 거야. 여기서 주전들 상대로 좋은 모습 보이면 너희들도 희망이 있다.”

“그럼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그런데 투수는 누가 하죠?”

“그래요. 저기는 이시다 캡틴도 있고 요시다 선배도 있는데, 우리가 너무 밀리잖아요.”

문제는 B팀에 투수 자원이 너무 없다는 것, 분위기를 살피던 다카기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투수는 제가 보겠습니다.”

“ ··· 그래, 다들 이견 없는 거지?”

쿠로다의 물음에 B팀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기의 어깨는 훈련에서 이미 검증됐고 문제는 실전, 이 녀석을 믿어보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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