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처음이자 마지막 - (1)
“얜 도대체 뭐하는 거야.”
평화로운 가정의 아침 식탁, 바쁜 남편을 먼저 보낸 주부는 꾸물거리는 막내딸과 신경전을 벌였다.
“스즈에! 지각하겠다!”
“알았어요!!”
이목구비가 뚜렷한 소녀는 속눈썹이나 아이라인엔 공을 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역시 볼 터치, 꼭 불에 익은 것 같다는 담임선생님의 혹평에 상처를 입었지만 부활동에서 얻은 지식으로 무장한 지금은 두려울 게 없었다.
“스즈에 너 정말!!”
“알았다니까요!!”
드디어 끝난 모녀의 1차 전쟁, 엄마는 느긋한 식사와 귀여움을 맞바꾼 딸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넌 화장에 무슨 공을 그렇게 들이니”
“화장은 여자의 목숨이라고요. 엄마도 여자면서 ··· ”
일본은 교복의 재킷은 물론 양말까지 통일 된 곳이 많다.
여학생들은 개성을 살리기 위해 화장이나 액세서리 등에 치중하기 마련, 한때 학생이었던 엄마도 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너 혹시 잘 보이고 싶은 남학생이라도 있니?”
“없어요!!”
“얘가 왜 소리를 질러? 누굴 닮아서 이렇게 까칠한 건지 ··· ”
“다녀오겠습니다!!”
치장은 학교에서도 계속됐다.
아무리 예쁘고 스타일이 좋아도 사소한 흠은 미녀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마련, 아침밥을 급하게 먹느라 뭐가 교복에 뭍은 건 아닌지 손거울을 보며 꼼꼼하게 살폈다.
“여 ~ 언제 왔냐?”
“얼마 안 됐어”
그에 비해 느긋하고 평화로운 수컷들의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등교한 다카기는 자리에 앉은 채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야, 넌 옷이 그게 뭐냐?”
친구들은 다카기의 복장을 걸고 넘어졌다.
바지 밖으로 나온 셔츠와 느슨한 넥타이, 몸에 달라붙는 블레이저 재킷, 한눈에 봐도 불량스러웠다.
“너희들 꼴이나 보고 말해라. 그거 샐러리맨 패션이냐?”
역공은 신속 정확하게 이뤄졌다.
간사이 지방은 교복을 조금 크게 입는 게 일반적, 여기에 단정해 보인다는 이유로 셔츠를 바지 안에 넣는 학생들이 많다.
흘러내리는 옷 때문에 멀리서 보면 사람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 아무리 교복 디자인이 예뻐도 이래선 멋이 살지 않았다.
“뭐 어때, 단정하고 좋은데”
“그래 그만두자. 너희들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친구들은 다카기의 캐릭터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진지해 보이는데 의외로 가벼운 구석도 있는 녀석, 첫날 단정했던 복장은 어디가고 지금은 학원만화에서 나올 법한 불량소년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특이한 녀석이라는 건 분명했다.
“야, 너 어디 가냐?”
“너희들한테 보고할 의무는 없어.”
웃고 떠드는 사이 갑자기 찾아온 신호, 조금 급했지만 다카기는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런 애가 있었나?’
마침 화장실에서 꽃단장을 마친 스즈에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한 눈에 봐도 상당한 기럭지에 기품 있는 외모, 복장은 약간 불량했지만 얼굴이 받쳐주니 그것도 여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요소가 됐다.
‘몇 반인지 확인해 봐야지.’
그렇다고 남자 화장실 앞에서 얼쩡거릴 순 없는 노릇, 일단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회를 살폈다.
‘왜 지금 울리는 건데?!’
타이밍 안 좋게 울리는 타종소리, 스즈에는 운명의 상대가 나와 주길 기다렸지만 교실로 향하는 선생님들의 눈빛에 밀려 철수해야 했다.
“기립! 경례!”
“안녕하십니까 ~ ”
오늘도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 타카코 선생님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거기 자리 하나 빈 것 같은데, 결석인가요?”
“아, 그게 ··· 야, 다카기 어디 갔냐?”
“몰라, 조금 전에 나갔는데”
학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선생님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명문고라고 학생의 일탈 행위가 없겠는가. 성적에 대한 부담이 클수록 해방구도 필요한데, 여기 학생들은 노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지는 아이들도 많은 편, 타카코 선생님이 부활동을 시작한 것도 학생들에게 해방구를 제공하겠다는 뜻과 무관하지 않았다.
“친구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 여러분들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그 자식이 묻지 말라고 ··· ”
“그래도 물어봤어야죠. 얼른 가서 찾아오세요.”
눈빛을 교환하던 학생들이 하나 둘 엉덩이를 떼던 그때, 문제아가 교실에 입성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생, 잠깐 이리 와 봐요.”
분위기를 살피던 다카기는 천천히 교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늦은 건 잘못한 거지만 그래도 사람을 위 아래로 훑어볼 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잘못한 건 이쪽이라 이렇다 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복장이 이래?’
생긴 건 멀쩡한 애가 옷차림이 이게 뭔지, 타카코는 복장뿐만 아니라 이 학생의 모든 것을 바로잡아주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늦은 건 둘째 치고 옷은 좀 단정히 입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관심, 다카기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빈틈을 보여야 여자들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잠잠했던 교실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발칵 뒤집혔다. 무슨 이런 애가 다 있는지, 선생님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 ··· 학생 이 문제 풀어 봐요.”
“알겠습니다.”
어렵진 않지만 공식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 못 풀면 한소리 해주려고 했는데 분필을 잡은 손은 거침이 없었다.
“다 풀었습니다.”
“ ··· 정답이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먹은 게 있으면 내보낼 것도 있는 거죠.”
너무 솔직한 답에 교실은 다시 웃음으로 들썩였지만, 학생들은 선생님의 심각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화장실에서 담배 피운 건 아니죠?”
“의심되면 확인해 보셔도 괜찮습니다.”
운동을 하는 놈이 담배라니, 마음에 걸릴 것이 없는 다카기는 간섭을 허락했고, 약간 약이 오른 선생님은 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남학생을 앞에 두고 코를 킁킁 거리는 것도 못할 짓, 타카코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 * *
“선생님, 혹시 야구부 매니저 모집하나요?”
“매니저?”
곤란에 빠진 건 타카코 선생님의 애인, 다나카도 마찬가지였다.
만화를 보면 야구부를 지원하는 매니저는 언제나 등장하기 마련,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많이 다르다.
혜택이라곤 교통비를 지원하는 것 뿐, 매일 선수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되는데 누가 매니저를 지원하겠는가?
지금 매니저를 맡고 있는 사나에는 중학교 시절까지 야구를 했던 선수출신, 야구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다나카는 어중간한 각오로 야구부 문을 두들기는 여학생들을 밀어냈다.
“매니저는 모집 예정이 없는데 ··· ”
“관심 있으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여학생의 공세는 매섭고 날카로웠다.
본인이 한 말이라 물릴 수도 없는 노릇, 일단 감독님께 얘기는 해보겠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군.”
사나에가 입부한 이후, 그 어느 여학생도 야구부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매니저에 지원한 학생만 3명, 다나카는 원인분석에 나섰다.
“자!! 오늘도 힘차게!!”
“파이팅!!”
수업이 끝나고 어김없이 찾아온 부활동 시간, 야구부원들은 이시다 캡틴의 구호에 맞춰 운동장을 돌았다.
평소보다 구경꾼이 늘어난 건 기분 탓일까, 운동장 주위를 살피던 다나카는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매니저 하겠다고 3명이나 왔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정말요?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사나에는 격한 환대를 표했다.
그렇잖아도 이제 3학년이라 야구부를 떠받칠 후계자가 필요했던 참, 지원자가 3명이나 왔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난 걱정이다. 너야 야구에 애정이 있지만, 그 아이들은 ··· ”
“우리가 지금 찾아오는 사람 쫓아낼 입장인가요? 배부른 소리하실 거면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사나에가 후계자는 자기가 결정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다나카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이만한 매니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번 나츠가 마지막,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고 아름답게 이별했으면 좋겠는데, 그 열쇠는 역시 구슬땀을 흘리는 학생들이 쥐고 있었다.
“자!! 마지막 한 바퀴!!”
그 사이 막바지에 접어든 체력훈련, 앞장서서 달리던 캡틴이 속도를 높이자 뒤따르던 부원들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체력이 떨어지는 신입생들은 거의 뒤로 밀려나는 현실, 하지만 다카기는 조금도 처지지 않고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자식한테는 절대 안 져.’
요시다는 후배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틀 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릴 지경, 경쟁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다카기도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게 진짜 끝까지 날 이기려고 하네.’
불이 붙은 이시다는 어느덧 캡틴까지 추월해 버렸다. 예전부터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몸, 앞지르기를 당한 캡틴까지 덩달아 속도를 높이면서 레이스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오오 ~ !!”
“으랴아아 ~ !!”
“으아악 ~ !!”
정식 훈련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몸 풀기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 바보 3인방, 다나카 코치는 저게 뭐하는 짓이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후루타 감독은 허허 ~ 웃으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뒤로 밀리다니!!’
이시다 캡틴은 시야에서 멀어지는 후배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요시다는 몰라도 이 내가 신입생에게 밀릴 줄이야. 거기다 갑자기 페이스를 끌어올린 탓에 체력은 거의 바닥, 스텝이 꼬이면서 넘어질 뻔 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았다.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고!! 헉 ~ 헉 ~ 우웩 ~ ”
결승선을 통과한 요시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승리를 주장했지만, 다카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저쪽으로 멀어졌다.
아직도 트랙을 돌고 있는 동료들이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승부욕에 휩싸여 선배와 레이스를 벌였으니,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
“헉 ~ 헉 ~ 야!! 너희 둘 이리 와 봐!!”
3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시다는 문제아 2명을 불러들였다.
야구는 협동이 중요한데 저것들이 멋대로 튀어나가는 바람에 완전 꼬여버린 훈련, 거기다 후배들에게 앞을 내줬다는 치욕 때문에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먼저 앞으로 가랬어?!! 어?!!”
“헉 ~ 헉 ~ 선배, 그게 아니라 이 자식이 ··· ”
“됐어!! 그렇게 뛰는 게 좋으면 다섯 바퀴 더 뛰고 와!!”
“네?!!”
이미 체력은 바닥이 났는데 또 뛰고 오라니, 요시다는 한번 봐달라고 애원했지만 다카기는 순순히 트랙 위로 돌아갔다.
그렇게 달리고 아직도 뛸 힘이 남아 있었다니, 부원들은 물론 구경꾼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