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선택할 권리 - (8)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때맞춰 다이이치의 야구부 감독 후루타 오기야스도 학교에 발을 들였다.
아버지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건 개인적인 사정일 뿐, 거기다 오늘은 개학식 다음 날 아닌가.
상은 다 치렀고, 이제는 감독노릇에 집중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안녕하십니까!!”
구보를 마치고 코치의 말에 집중하던 학생들은 얼굴이 반쪽이 된 감독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주력 선수였던 이토의 탈퇴, 감독님의 부친 상, 센바츠 지역예선 8강 이후 야구부엔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일만 반복되고 있다.
행운이 있으면 불행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혹시 지역예선 8강이 우리의 한계였을까? 학생들의 얼굴엔 복잡 미묘한 심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감독님, 벌써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병원에 입원한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내가 없는 동안 별 일 없었나?”
“그게 ··· ”
다나카 코치는 감독에게 이토의 탈퇴를 알렸다.
눈에 띄는 녀석은 아니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팀에 큰 힘이 됐던 녀석인데 그렇게 떠나갈 줄이야, 후루타 감독은 착잡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네. 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신입생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나?”
“예, 그건 뭐 ··· ”
“하하 ~ 자네는 정말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군.”
후루타 감독은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훈련도 좋지만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법, 부원실에서 소소한 파티를 열었다.
“이토가 탈퇴한 건 내가 지도자로서 너희들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운한 게 있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여기서 털어놔도 좋다.”
감독의 물음에 상급생들은 답을 망설였다.
감독님이 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운동이 다도(茶道)도 아니고 얌전하게 할 수 있는 건가. 때로는 뒹굴다 다칠 수도 있고 실수가 일어나면 지도자가 큰소리를 내기도 한다.
물론 정도라는 걸 지켜야겠지만 그 기준도 사람마다 제 각각, 거기에 다 맞춰줄 수 있는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선수도 양보할 건 양보해야 조직이 안정되는 법, 캡틴 이시다는 이토의 탈퇴는 감독님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제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캡틴이면 부원들을 다독일 줄도 알아야 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내가 지금 바라는 건 그런 말이 아니다.”
후루타 감독은 위로의 말 따윈 바라지 않았다.
학생들이 원하는 야구가 뭔지 알고 싶을 뿐, 이토가 원하던 즐기는 야구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후루타 감독도 오랫동안 야구와 인연을 맺었지만 그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이때 한 녀석이 슬쩍 손을 들었다.
상급생들도 머뭇거리는 물음에 저 신입생이 답을 할 수 있을까?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말해 보거라.”
“머리는 길러도 되는 건가요?”
야구부 진입장벽을 높이는 게 가혹한 훈련과 성적에 대한 부담뿐일까.
다른 학생들은 머리를 기르고 일부는 염색도 하는데 까까중머리를 만들어 놓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성적과 머리카락 길이가 정말 상관이 있는 건지도 의문, 다카기는 정말 즐기는 야구를 하고 싶다면 사소한 것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관은 없는데 운동을 하려면 머리는 단정한 게 좋지 않겠니?”
“그럼, 야구만 잘하면 이대로 놔둬도 된다는 거죠?”
발칙한 주장에 후루타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두발 자유는 요즘 고교야구 계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주장, 하지만 보수적인 야구계 원로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몇 몇 야구부가 시도는 해 봤지만 결국 정착되지 못한 제도, 잘못하면 여론의 관심으로 포장한 뭇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구만 잘하면 머리는 길러도 된다고?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후루타 감독은 신입생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 녀석이 중학교 시절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식 야구가 중심이 되는 중학교 야구는 고교 야구와 레벨이 다르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게 무슨 자신감인지, 녀석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야구를 잘 한다면 올 곳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올 곳을 잘못 찾았다니요?”
“고시엔 우승을 노린다면 히라카시나 키타마치로 가는 게 낫지 않았나?”
히라카시는 오사카 전통의 강호로 지금까지 수많은 프로 선수들을 배출했다. 키타마치 역시 최근 3년 연속 고시엔에 진출한 야구 명문, 그런데 왜 변변찮은 야구부를 찾은 건가.
하지만 다카기의 입장은 확고했다.
“학생이면 공부가 우선이죠. 입학할 자격이 되니까 여기 온 건데 다른 이유가 필요한 가요?”
우문현답에 후루타 감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본 전국 고교생 10명 중 1명은 야구부에 속해있다. 고시엔을 노리든 아니든 야구는 학생들의 생활체육으로 자리 잡았고, 그 활동에 누구도 제약을 걸 수 없다.
뭣보다 야구부의 존재이유가 고시엔 진출인가? 어리석은 질문에 당찬 답을 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네 주 포지션은 어딘가?”
“유격수입니다. 가장 뛰어난 선수가 소화할 수 있는 자리죠.”
이 녀석의 자신감은 어디까지인가.
후루타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고, 다카기는 거침없는 설명을 늘어놨다.
“유격수는 내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절반 이상의 아웃을 잡아내야 합니다. 거기다 송구 거리도 긴만큼 어깨도 강해야 하고요. 여기에 타격까지 잘해준다면 야구에서 유격수만큼 중요한 존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격수가 갖춰야 할 조건은 많지만, 그만한 재능을 다 겸비한 선수가 몇이나 있겠는가.
포수만큼 어려운 자리라 많은 학생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사실, 고등학교 사정이 이런데 프로에 스타급 유격수가 나타나겠는가.
하지만 하루는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자네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가?”
“말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죠.”
“하하 ~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럼 지금 당장 테스트 해 봐도 되겠나?”
감독이 직접 방망이를 잡자 야구부 분위기는 술렁였다.
후루타 감독은 그동안 코치에게 훈련을 일임했고 본인은 뒤에서 지켜보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람이 방망이를 잡다니, 흔한 일이 아니었다.
‘으음 ··· 확실히 기본은 됐군.’
시작은 느린 타구 처리, 건방진 신입생은 타구를 몸 중심에 두고 처리하라는 기본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하지만 빠른 타구는 어떨까? 젊은 시절, 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후루타는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까앙 ~ !!
제대로 걸린 타구, 어지간한 녀석은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데 저 어린 녀석은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우연인가? 다시 한 번’
다음 타구는 글러브 아랫부분을 때렸지만, 다카기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후속 플레이를 마무리했다.
실수를 했는데도 저렇게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다니, 반신반의 했던 상급생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뭐야 저거?”
“저 자식 진짜 1학년이야?”
1학년이라곤 믿을 수 없는 글러브 움직임, 거기다 타구를 쫓는 반사 신경과 송구능력도 고교레벨에선 수준급이다.
요즘은 A급 전력을 갖춘 야구부도 인재난에 시달리는데, 저 정도 인재가 여기로 굴러들어올 줄이야. 상급생들은 잠시 넋을 잃고 신입생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저 이제 머리 길러도 되는 건가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녀석, 약이 오른 후루타 감독은 좀 더 대담한 테스트를 제시했다.
“수비는 분명 괜찮지만 타격은 어떨지 모르겠군.”
“그거라면 제일 자신 있습니다.”
상대 투수는 2학년 요시다,
적어도 150km 이상을 던져야 여론의 주목을 받지만 사실 140km 이상을 던지는 투수도 흔치 않다.
요시다는 제구가 약간 불안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최고 142km를 던지는 강견, 고교 1학년이 상대하기엔 벅찬 상대였다.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거야?’
마운드에 오른 요시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봤자 1학년 아닌가, 애송이를 상대에게 나 같은 고급전투력 측정기를 들이대다니, 자존심이 상해버렸다.
“제대로 해!! 요시다!!”
“한방 맞으면 너 1학년 취급할 거다!!”
때맞춰 속을 긁어주는 친절한 선배들, 요시다는 전력투구를 다짐했지만 잘못하면 신입생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혜를 베풀었다.
까앙 ~ !!
“엇?!!”
밀어 낸 타구는 힘차게 외야로 뻗어나갔다. 설마 그물망까지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설마 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저런 폼으로? 이건 말도 안 돼’
후루타 감독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체격이 작은 선수는 무게 중심이 낮기 때문에 다리를 높이 들어도 폼이 흔들릴 위험이 적다. 하지만 다카기는 180이 넘는 장신임에도 폼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밸런스가 좋다는 뜻, 놀라운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스윙이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앞발을 제때 풀어줘야 된다. 하지만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앞발을 닫아 놓고, 돌다 만 컴퍼스처럼 짧은 스윙으로 장타를 날려버렸다.
손목 힘과 타구에 힘을 싣는 기술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 후루타 감독은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경험했지만 이 정도 인재는 처음이었다.
‘아니야, 저런 폼으로는 150km 이상을 칠 수 없어.’
그래도 내가 가르칠 학생인데, 아무 조언도 못한다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후루타 감독은 타격 폼을 조금 가다듬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도리어 아픈 곳을 찔리고 말았다.
“저는 지금 폼이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런 큰 동작으로 150km가 넘는 공을 공략할 수 있겠나? 훗날 프로에 진출할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 ”
“그럼 시험해 보시죠. 그런데 여기 그런 공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당연히 있을 리가 있겠나.
캡틴 이시다의 최고 구속은 142km, 이것도 엄청 빠른 거지만 요시다와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제가 150이 넘는 공을 치는지 못 치는 지는 대회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폼 수정은 그 다음부터 해도 늦지 않겠죠. 그리고 그만한 공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으음 ··· ”
“그러니까 이제 그만 허락해주세요. 머리 길러도 되는 거죠?”
“ ··· 으하하 ~ 좋아!! 자네 마음대로 하게!!”
후루타 감독은 다카기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에게 두발의 자유를 허락했다. 학생들 입장에선 환영할 일, 하지만 한 녀석은 웃을 수가 없었다.
“야!! 잠깐!! 아직 안 끝났어!!”
고급전투력 측정기 신세가 된 요시다는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칠까봐 조금 살살 던져줬는데 이긴 것처럼 구는 건방진 녀석, 하지만 요시다는 절대권력을 쥔 매니저의 고함에 꼬리를 내렸다.
“진 건 진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선배! 저 정말 봐준 거라니까요!!”
“져줄 수도 있는 거지. 넌 후배를 밟아야 직성이 풀리니?”
“ ··· 너 두고 봐!! 다음부터는 전력으로 상대해 줄 테니까!!”
그래도 요시다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3학년이 은퇴하면 이 팀은 누가 이끌어 가겠는가. 이제부터는 내 시대가 올 거라 자만하고 있었는데, 다카기라는 애송이가 등장하면서 게으른 천재도 자극을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