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6화 (6/361)

6화. 선택할 권리 - (6)

“저희 부로 오세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난 입학식, 교문을 빠져나가는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구애를 받았다.

‘저기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에 있어?’

하지만 신입생들은 학업에 부담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괴물들만 모인 곳인데, 딴 짓 하다 성적 떨어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가. 많은 학생들은

“저희 야구부는 센바츠(3월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8강까지 진출했습니다!! 재능 있는 분이 조금만 힘을 보태주신다면 고시엔 진출도 꿈이 아닙니다!!”

야구부 캡틴 이시다 타카모토는 체면도 버리고 신입생 모집에 나섰다.

180개 고교가 경쟁을 펼치는 오사카 지역예선에서 8강까지 진출한 건 엄청난 업적, 일찍 떨어졌다면 아쉽진 않았을 텐데 고시엔 진출을 앞두고 고배를 마신 탓에 승리를 향한 갈증은 더해졌다.

이번 여름 대회가 마지막 기회, 하지만 신입생들은 남의 꿈에 어울려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몇 몇 야구부원은 불만을 중얼거렸다.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알아서 찾아올 텐데 왜 우리가 체면도 버리고 굽실거려야 하는 건지, 뭣보다 캡틴이 목표를 높이 잡아버리자 부담을 느끼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난 그저 야구를 즐기고 싶을 뿐이라고’

3학년 이토 류지는 이렇게까지 하는 캡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시다는 현 내에서도 제법 이름 높은 유망주, 상위 지명은 못 받겠지만 적어도 프로구단이 손을 내밀 수준은 된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은 그저 야구를 즐기고 있을 뿐, 신입생보다는 지금까지 야구부를 지탱해 온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길 바랐다.

“지금 야구부원 모집하는 건가요?”

“예!!”

때맞춰 등장한 오늘의 첫 번째 손님,

이시다는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라 당장 쓸 수 있는 전력을 원했다. 야구 경험은 필수요건, 다카기는 그 조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인재였다.

“야구 경험은 있으신가요?”

“예, 소학생 때부터 했습니다.”

한 눈에 봐도 180이 넘는 키에 날렵한 몸매,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인재라는 걸 직감했다.

“나 잠깐 부원실 좀 다녀올게. 이쪽으로 오시죠.”

이시다는 뒷일을 부원들에게 맡겨두고 퇴장, 호랑이가 떠나자 뒤에 남은 늑대들은 참아왔던 불만을 터뜨렸다.

“무슨 신입생한테 존댓말까지 하는 거야.”

“우리한텐 저렇게 상냥하게 대해 준적도 없으면서 ··· ”

어째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 눈치를 살피던 이토는 주워 담지 못할 말을 흘렸다.

“야구부 탈퇴해 버릴까?”

“뭐?”

“우리가 계속 곁에 있어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건 아니지. 이쯤에서 우리도 강하게 나가보자.”

아무리 잘난 선수라도 혼자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는 법, 하지만 쿠로다(3학년)은 탈퇴까지 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행동이라며 막아섰다.

“불만이 있으면 대화를 해야지, 탈퇴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해도 결국 본인 뜻대로 하잖아. 혼자서 야구 하는 것도 아니고, 캡틴이면 동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 아니냐?”

이토의 공세에 쿠로다는 할 말을 잃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이시다는 능력 있는 선수들을 우대하는 면이 있다.

캡틴이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동료들을 품을 줄 알아야 하는데 이시다에겐 그게 부족, 그 치명적인 약점은 다나카 코치님이 잘 메워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 * *

“사나에, 신입생 왔다.”

“오 ~ 그래도 꽝은 면했네?”

이시다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신입생 환영에 열중했다.

한명도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수확을 거두다니, 야구부 매니저 사나에(3학년)는 세심한 눈길로 신입생을 살폈다.

키가 191cm나 되는 이시다 캡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1학년이 이 정도 체격이면 대단한 거 아닌가.

여기에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훤칠한 외모까지, 사나에는 그동안 연하의 남자는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취향이 바뀔지도 모르겠다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여기 지원서 작성해주세요.”

“네.”

“그런데 키가 굉장히 크네요. 몇이에요?”

“교복 맞출 때 184cm 나왔습니다.”

“와 ~ 나중에 이시다 캡틴만큼 커지는 거 아니에요?”

쉴 새 없는 관심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학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솔직히 선배가 다가가기 쉬운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중학교 시절, 다카기는 선배들과 친해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대들지도 않았다. 개혁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것, 내가 선배들과 대립하면 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힘을 얻을 때까지 참았고 결국 내가 원하는 팀 분위기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도 그렇게 보낼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 선배들이 너무 호의적이라 긴장이 풀어져버렸다.

“선배님들은 원래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네?”

“이러다 돌변하면 서운하니까, 평소 하던 대로 대해주세요.”

“저는 원래 이래요. 뭐 ··· 이시다 캡틴은 조금 무섭긴 하지만요.”

사나에는 캡틴에게 눈총을 보냈다.

평소엔 얌전하지만 훈련이나 경기가 시작되면 돌변하는 성격, 아픈 곳을 찔린 이시다는 무안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뭐가 무섭다고 그래?”

“솔직히 그렇잖아. 2학년 애들도 선배 너무 무섭다고 저한테 얼마나 하소연을 하는데,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줘.”

야구부 매니저는 여자들에게 매력 없는 부활동,

편의라고 해봤자 교통비를 지급하는 정도고 매일 부원들 뒤치다꺼리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걸 묵묵히 해주는 게 바로 사나에, 까다로운 캡틴도 매니저 앞에선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

“자, 그럼 쓸데없는 말은 이 정도로 해두고 ··· 이제 입부한 거니까 편하게 불러도 괜찮지? 다카기? 아니면 친근하게 하루라고 부를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친근감을 드러내는 매니저, 다카기는 그런 선배가 싫지 않았다.

“선배님 편한 대로 하세요.”

“확실히 신입생이 들어오니까 분위기가 다르다. 너 같은 애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미안하다. 칙칙한 3학년이 여기에 있어서”

좀 어리고 잘생긴 녀석이 왔다고 헤헤 거리다니, 이시다는 불만을 중얼거렸지만 관심이 신입생 쪽으로 기운 사나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선배님은 부활동 하는 거 부담되지 않으세요?”

“내가 놀면서 여기 앉아 있는 것 보이니? 무시하지 마. 나 지난 전국모의고사에서 6등 했어.”

매니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다카기는 경악했다.

천재들의 집합소 아니랄까봐 역시 야구부 매니저도 범상치 않다는 건가, 하지만 사나에는 부활동과 성적은 관계없다고 못을 박았다.

“우리 학교가 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아니잖아. 그러다 보니 시간 지나면 풀어지는 녀석들도 많아.”

“그런가요?”

“그래, 뭐든 게으름 피우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답이야. 하루 종일 부활동 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성적이랑 무슨 상관이니? 다 본인이 게으름 피운 결과지.”

선배의 조언에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얼마 전 후배들에게 해 줬던 조언 아닌가, 고등학교 생활도 지금까지 지켜온 루틴을 따르면 문제없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고 보니 ··· 너 어딘가 낯이 익다?”

이시다 캡틴은 본격적인 심문에 나섰다.

신입생 기량은 감독님이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녀석, 거기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하지만 심문도 오래가지 못했다.

“자 ~ 캡틴은 이제 부원 모집하러 가야지.”

“왜?”

“부원들 밖에 있는데 선배가 여기서 농땡이 부려도 돼? 신입생은 나한테 맡기고 얼른 가 봐.”

둘이서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겠다는 건가,

이시다는 씁쓸한 미소를 뒤로하고 퇴장, 방해꾼이 사라지자 사나에는 본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너 중학교 때 인기 많았지?”

“아니요.”

“에이 ~ 거짓말, 여자애들이 널 그냥 놔뒀다고?”

“접근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100억 엔짜리 물건이 탐난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죠.”

잠시 말이 없던 사나에는 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이 정도 남자라면 접근하기 어렵기도 하겠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라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그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함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농담이고요. 솔직히 제가 여자한테 집적거릴 입장은 못 되죠. 생활비도 부모님한테 의지하고 있는데 무슨 자격으로 연애를 해요. 그래서 지금은 제 가치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연애는 그 다음이죠.”

“굉장히 현실적이구나? 겉보기엔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은데”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여자는 안 울릴 겁니다.”

사나에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겉모습은 진지한데 의외로 유쾌한 면이 있는 녀석, 한번 야구부에 걸려든 이상 순순히 보낼 생각은 없었다.

“너 내일 안 나오면 안 된다. 그때는 내가 찾아가서 끌고 올 거야.”

“네, 걱정하지 마세요.”

다카기는 야구부의 권력구도를 어느 정도 꿰뚫었다.

캡틴이 있지만 사실 바지사장, 진짜 권력은 매니저가 쥐고 있다. 이 사람에게 잘 보이면 당분간 조용히 지낼 수 있겠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낚싯바늘에 꿰인 다른 물고기가 부원실로 끌려왔다.

“사나에, 신입생 받아라.”

“어서 오세요 ~ 환영합니다.”

매니저가 신입생에게 인사를 건네자 다카기는 급히 자리를 비켜줬다.

키는 크지 않지만 제법 단단한 체격을 갖춘 녀석, 지원서를 작성하던 신입생은 곁눈질로 다카기를 살폈다.

‘저 ··· 저 자식 ··· 설마?!’

신입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2년 전, 중학교 전국대회에서 날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날린 그 증오스러운 놈 아닌가.

더 굴욕적인 건 저 자식은 날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 지나가면서 털어버린 상대라 기억해 줄 가치도 없다는 건가?

그 날의 치욕과 공포가 맞물리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러세요?”

“아 ··· 아닙니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겨우 작성한 지원서, 그 후 몇 분의 정적이 흘렀지만 신입생은 찾아오지 않았다.

“선배님, 집에 가서 정리할 게 있는데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벌써? 조금 더 있다 가.”

“죄송해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할 게 많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네 ··· 내일 꼭 나와야 된다?”

허락을 받은 다카기는 부원실에서 퇴장, 긴장 때문에 숨도 크게 못 쉬던 또 다른 신입생은 격한 한숨을 뿜어냈다.

“너 왜 그러니?”

“저 자식, 진짜 야구부에 들어온 건가요?”

당연한 걸 왜 묻는 건지, 사나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입생은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을 주절주절 풀어냈다.

“선배님은 저 자식 모르세요?”

“왜? 너 뭐 알고 있니?”

“하긴, 중학교 대회가 고시엔만큼 유명한 건 아니죠.”

신입생은 다카기가 중학교 시절에 남긴 일화를 풀어냈다.

당시 신입생이 소속한 팀은 6회까지 6대 2로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다카기가 연타석 홈런을 날리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동점, 그것만으로도 만족이 안 됐는지 기어이 만화를 한편을 찍었다.

팀이 우승했다면 중학교 MVP는 확실했을 텐데, 역시 원맨쇼로 팀을 이끄는 건 한계가 뚜렷했다.

“쟤가 그렇게 대단했니?”

“네, 그 다음날 경기에서 전 타석 볼넷 출루했어요.”

신입생의 이름은 다무라 히로시,

공부도 잘했지만 야구 재능도 수준급이라 다이이치 고교라면 이번 지역예선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저런 괴물이 앞을 가로막을 줄이야, 시작부터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저 부활동 포기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뭐?! 왜?!!”

“솔직히 저는 당장 주전으로 쓰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저 자식이 있으면 ··· ”

“무슨 남자가 한번 당했다고 꼬리를 내리니? 쟤도 너랑 같은 1학년이야, 노력을 해서 쫓아갈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마음대로 안 되는 세계, 내일 안 나오면 교실까지 쫓아가겠다는 매니저의 협박에 다무라는 꼬리를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