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선택할 권리 - (5)
“엄마, 저 갈게요.”
“얘, 잠깐만 거기 있어 봐.”
드디어 찾아온 졸업식, 다카기의 어머니는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을 붙들어 세웠다.
“왜요?”
“넥타이가 그게 뭐니”
다 컸다고 잘난 척해도 여전히 빈틈투성이인 녀석, 하지만 아들은 엄마의 손길을 거부했다.
“일부러 이렇게 맨 거예요.”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졸업식인데 단정하게 입어야지.”
“멋진 남자는 약간 빈구석이 있어야 더 매력적이라고요.”
너무 완벽하면 여자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그리고 남자가 약간 빈틈을 보여줘야 여자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 아들의 농담에 어머니는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 무뚝뚝하던 녀석이 오늘 따라 말이 많은 편, 덤덤한 척 해도 졸업식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조금 있다 봬요.”
“그래”
먼저 집을 나선 다카기는 3년 동안 오갔던 길을 밟았다.
오늘은 마지막 등교일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정식일 뿐, 목표를 모두 이뤘으니 후회나 아쉬움 따윈 없었다.
“여 ~ 하루 ~ ”
“왜 이렇게 늦게 왔냐?”
먼저 등교한 친구들의 질타가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무심한 표정으로 흘려 넘겼다.
“야, 넌 복장이 그게 뭐냐?”
“뭐가?”
“졸업식인데 좀 단정하게 입어야지 인마.”
“됐다. 너희들이 내 뜻을 어찌 알겠냐.”
멋진 남자는 대충 걸쳐도 빛이 나지만 그 반대라면 복장이라도 깨끗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망언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 친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야 그런데 오늘 진짜 졸업식이냐?”
“나도 믿기지가 않아. 혹시 이거 꿈 아닐까?”
이때 한 녀석이 입을 열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정말 우리의 중학생 시절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3년 동안 정든 학교와 친구들을 뒤로 하다니, 후련하다는 느낌보다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와 ~ 나 벌써 눈물 나오려고 그래.”
“울지 마!!”
눈물샘을 닫아줄 친구의 친절한 미들 킥, 제대로 당한 녀석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하는 거야?!!”
“울지 말라고!! 나까지 이상해지잖아!!”
지금도 분위기가 이런데 본방이 시작되면 눈물바다가 되는 건 아닌지, 하지만 다카기는 친구들의 값싼 연극에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효과 좋은데? 졸업식 때 우는 녀석은 내가 한 대씩 때려줄게.”
“이런 잔인한 자식 ··· 넌 아무렇지도 않냐?”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한데 무슨 눈물이냐. 그리고 난 지금 엄마 위로해 줄 말 생각해야 돼.”
며칠 후 오사카로 떠날 몸, 조금 있으면 엄마 가슴에선 대지진에 버금가는 격한 감정이 일어날 거다.
그걸 위로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카기는 그동안 엄마 앞에서 무뚝뚝했지만 나름대로 그 입장을 배려했다.
“너희들도 부모님 위로해드릴 말 생각해 둬.”
“에이 ~ 우리 엄마는 안 우실 것 같은데”
“그럼 내기하자, 난 우는 쪽에 한 표”
다카기와 친구들은 그동안 이런 사소한 일로 간식 내기를 걸었다.
설마 엄마의 눈물에 용돈을 걸 날이 올 줄이야. 다카기의 제안에 친구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길었던 승부의 나날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난 천 엔 걸게.”
“야!! 너 미쳤냐?”
“고등학교도 사립으로 가는 자식이, 돈 아껴 인마”
친구들의 타박에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 녀석들이 우리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게 내 돈도 아닌데 할아버지의 재력을 자랑하는 건 꼴불견, 그렇다고 부모님이 용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라 100엔 하나에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 놓을까.’
다카기는 잠시 내적갈등을 겪었다.
한국 핏줄이 섞인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서 밝힌다고 득이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친구 사이에 비밀이 있어선 안 된다는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녀석들과의 관계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500엔, 이 정도면 불만 없지?”
“좋아. 난 인생의 모든 운을 여기에 걸겠어.”
“야, 넌 인생의 가치가 500엔 밖에 안 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남들이 보면 시시하다고 하겠지만, 졸업식을 앞두고 무거워진 마음을 500엔으로 털어낼 수 있다면 싼 거 아닌가.
하루와 친구들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학생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학부모와 1 ~ 2학년 학생들은 체육관에 입성하는 졸업생들에게 환대의 박수를 보냈다.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는 부모님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나름 의젓한 얼굴을 유지했다.
꿈은 눈앞에 있는데 ~♪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왜 빛나 보이는 걸까 ~♩
그래도 청춘의 두근거림은 영원히 가슴에 담아두고 싶어 ~♬
망설일 시간은 없어 시간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갈 뿐 ~♩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열정은 멈추지 않아 ~♪
다시 이 교가를 부를 날이 올까,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열의를 보였다.
재학생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가 오가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고, 애써 눈물을 참던 아이들도 하나 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제 정말 내 품을 떠나는구나.’
다카기의 어머니는 억눌렀던 감정을 쏟아냈다.
눈물을 보였다면 위로라도 해주겠는데 너무도 의젓한 아들,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마요.’
다카기의 아버지는 아내의 어깨를 말없이 어루만졌다. 이런 상황을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만큼 남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이 있겠는가. 아내의 슬픔이 큰 만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울고 계시네.’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한 다카기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시답잖은 내기까지 하면서 마음을 정리했건만, 울적해진 마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릴 수 없었다.
“기립! 경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표학생이 수료증을 받으면서 졸업식은 막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시간을 추억할 뿐, 다카기와 친구들도 한자리에 모여 마지막을 장식했다.
“엄마, 저희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래”
우느라 눈이 퉁퉁 부었는데 사진촬영을 떠넘기는 못된 아들, 그래도 다카기의 어머니는 순순히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하루 아버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설마? 에이 ~ 아니겠지.’
포즈를 취하는 동안 다카기의 친구들은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몇몇은 설마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엄마, 이번엔 저랑 투 샷 찍어요.”
“눈이 이렇게 부었는데 무슨 사진을 찍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얼른 옆에 서요.”
이런 몰골로 사진을 찍을 순 없다며 버티던 다카기의 어머니는 부자(父子)의 협공에 밀려 카메라 앞에 섰다.
겨우 거둔 눈물이 다시 터질 것 같았지만, 주변 분위기를 생각해 복잡한 감정을 수습했다.
‘어머나’
이때 볼에 내려앉은 아들의 입술, 뜻하지 않은 애정표현은 퉁퉁 부은 눈에 봉인 돼 있던 미모를 단숨에 해방시켰다.
물론 지켜보는 입장에선 경악할 노릇,
어젯밤에도 저런 표정을 안 짓던 사람이 아들의 볼 키스 한 번에 무너져 내릴 줄이야, 다카기 아버지는 끓어오르는 질투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 잘 안 나왔죠? 이렇게 다시 한 번 갈게요.”
“아니, 한번이면 충분해.”
마음 같아선 아들이고 뭐고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 그래도 아내의 기분이 풀렸으니 이번만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지. 나름 괜찮은 작전이었어.’
다카기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엄마에게 볼 키스를 하는 건 좀 민망했지만 어중간한 말을 해봤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남자가 목적을 이루려면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 엄마 기분이 풀렸으니 나름대로 만족했다.
* * *
“넌 어디서 왔어?”
“난 원래 여기 출신이야.”
이곳은 오사카 부의 다이이치 고교, 이제 막 입학식을 치른 신입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고교생활을 시작했다.
친분을 쌓느라 분주한 녀석들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마련, 한 여학생은 남자들의 저급한 말에 코웃음을 쳤다.
“너 봤냐? 그 선생님 꽤 미인이던데”
“어, 몸매도 끝내주더라. 우리 반에 오셨으면 좋겠는데”
“그 옆에 있던 선생님도 괜찮지 않냐?”
수준 있는 학교라 남자들도 뭔가 다를 줄 알았건만, 수컷이란 어차피 다 똑같은 생물이라는 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했던 소녀의 꿈은 입학식 첫날부터 박살이 났다.
“할 말 더 있으면 조금 있다 들어올까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교실 문이 열리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담임선생님이 정체를 드러냈다.
남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 미녀, 이상이 현실이 되자 남학생들은 마음속으로 만세 삼창을 불렀다.
“제 이름은 후지모토 타카코라고 해요, 여러분들처럼 뛰어난 수재들을 가르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저희들이 영광입니다!!”
한 남학생이 목소리를 높이자 선생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든 교직생활, 그래도 짓궂은 장난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학생들 앞에서 저렇게 페로몬을 뿜어내도 되는 거야?’
남자들의 저급한 대화에 코웃음을 치던 여학생은 담임선생님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간사이 지방은 대체로 교복을 크게 입는 편, 남학생은 샐러리맨처럼 펑퍼짐한 옷차림에 촌스러운 아저씨 복장을 하고 있다.
여학생 복장도 비교적 건전한 편, 그런데 교사라는 사람이 굴곡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으니 괜히 눈에 거슬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세요.”
이때 젊은 남자가 교실에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제법 훤칠한 남자, 볼에 심술이 가득 들어있던 여학생은 가슴이 뛰는 청춘을 느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의 부담임을 맞게 된 다나카 시게하루입니다. 담당과목은 영어, 부활동으로 야구부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학생은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여기서 부활동 홍보하는 건 교칙 위반이에요.”
“아 ··· 그랬었죠.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돼요. 선생님은 야구부 코치이기 전에 이 반의 부담임이잖아요.”
하지만 가슴 뛰는 청춘도 오래가지 못했다.
여자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다나카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타카코 선생님과 눈을 마주했다. 그건 반대편도 마찬가지, 단순한 동료 사이로 보긴 어려웠다.
뭣보다 저런 미남미녀라면 직장에서 서로 눈이 맞는 건 자연스러운 일, 상상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효 ~ ”
“거기 학생, 왜 그래요? 혹시 어디 아프나요?”
갑자기 한숨을 들이쉬는 학생, 타카코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자의 건강을 살폈다.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왜 마음이 아픈지 말해줄 수 있나요?”
“이상은 높고 현실은 잔인하니까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몇 몇 학생들이 큰 소리로 웃었지만 다카코 선생님은 다른 반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다독였다.
“자, 다들 조용, 일단 학급위원부터 정해야하는데 지원할 사람 있나요?”
학생들은 선생님의 시선을 외면했다.
말이 좋아 학급을 통솔하는 대표지 때가 되면 불려가 이런저런 임무를 부여받는 귀찮은 자리 아닌가.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그럼 거기 마음이 아픈 학생이 하도록 할까요?”
“네?!! 왜요?!!”
“그 아픈 마음 내가 치료해 줄게요. 그러려면 앞으로 자주 봐야겠죠?”
첫날부터 헛소리를 늘어놓다 선생님 눈에 띈 게 화근, 여학생의 절규 덕분에 첫날부터 분위기는 떠들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