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선택할 권리 - (4)
일선에서 물러난 고영길은 변호사를 두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아는가. 사후에 벌어질 혼란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재산도 정리에 나섰다.
‘여긴 하루한테 물려줘야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도쿄 중심가의 빌딩, 그 상속자는 다카기 하루요시로 결정됐다.
손자들 중 가장 명석하고 목표도 뚜렷한 녀석, 그 어렵다는 다이이치 고교에 합격을 했으니 입학선물로 이 정도는 챙겨주고 싶었다.
도쿄 올림픽이 확정되면서 그 주위의 부동산 가치는 폭등 중, 일본 정부가 양적완화 정책을 이어가는 한 값어치가 떨어질 일은 없었다.
“회장님, 증여는 조금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어째서?”
“손주 분은 아직 15살이라 증여세를 면제받을 수가 없습니다.”
20살이 돼야 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손자는 아직 15살, 얼마 전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렸던 고영길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겠나?”
“불안하시면 일단 아드님께 증여를 하시죠. 그게 확실합니다.”
“으음 ··· 자네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손자를 위한 서비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학교 근처의 집을 알아보게 했고, 용돈으로 쓰게 할 잔돈도 두둑이 챙겨뒀다.
‘왕족이 굳이 정체를 드러낼 이유는 없지.’
마음 같아선 입학식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고영길은 자이니치라는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알려진 내가 입학식에 나가면 손자가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왕족노릇은 성인이 된 후에도 늦지 않은 일, 손자를 위해 쓸데없는 간섭은 자제했다.
‘그 녀석, 안주면 섭섭하다고 하겠지.’
손녀 미사키에게도 땅을 증여하기로 했다.
하마마츠는 일본에서 인지도가 높은 곳은 아니지만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쟁쟁한 대도시에 둘러싸인 교통의 요충지다.
예전부터 하마마츠 일대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고영길은 그 일대의 땅을 매입, 8년 전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설립하면서 투자는 대박이 났다.
지금 임대료를 받고 있는 회사만 9개, 그것만 잘 굴려도 평생 풍요롭게 살 수 있겠지, 고영길은 이 정도면 할아버지 노릇은 충분히 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어느 날, 다카기는 야구부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한동안 공부에 열중하느라 부원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지만, 시험도 모두 끝났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파티를 즐겼다.
떠나는 주제에 무슨 말을 남기겠는가, 잔소리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후배들은 3년 동안 숱한 전설을 남긴 선배를 가만 두지 않았다.
“선배, 진짜 오사카로 가시는 거예요?”
“왜,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아?”
다카기는 얼마 전 다이이치 고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담임선생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학교 전체를 진동, 다들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하루는 코웃음을 쳤다.
공부라면 예전부터 반에서 2 ~ 3등 정도는 유지했다. 전국대회가 끝나자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결과가 나왔을 뿐, 하위권을 맴돌던 녀석이 겨우 몇 달 공부했다고 기적을 낳을 수 있을까?
하루는 기적은 없었다고 못을 박았다.
“공부든 운동이든 매일 꾸준히 하는 녀석 못 이겨. 그동안 내가 해 온 게 있으니까 결과가 있었던 거야.”
“역시 그런 건가요?”
“그래, 너희들도 뭔가 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꾸준히 해 봐. 재능이 없다느니 머리가 안 좋다느니 어설픈 변명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즐기는 자리에서 이 이상의 진지한 얘기는 분위기를 망칠 뿐, 하지만 후배들의 질문은 계속됐다.
“선배님”
“왜?”
“제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고백해도 계속 퇴짜 맞고 있거든요. 그것도 꾸준히 하면 성과가 있을까요?”
좀 진지한 질문을 기대했던 다카기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야, 나도 연애를 못 해봤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
“위로가 될 말이라도 해주세요. 전 지금 심각하다니까요.”
그냥 넘어갈 것이지 눈치 없이 매달리는 후배, 잠시 고민하던 다카기는 자신만의 연애 철학을 공개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 알고 있지?”
“네, 역시 노력하면 되겠죠?”
“아니,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어.”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봤자 남자에게 연애란 투쟁이다.
동물의 세계만 봐도 수컷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거나 자신을 포장하고, 경쟁자들과 싸우는 존재 아닌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다르겠는가. 남자가 힘이 있다면 사랑도 자기 뜻대로 주도할 수 있지만 내세울 게 없으면 여자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 마련이다.
‘미인은 용기가 아니라 힘이 있는 자가 얻는 거다.’
학생이 무슨 힘이 있다고 사랑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겠는가.
완벽한 히로인이 덜 떨어지는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만화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무기가 있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게 연애, 다카기는 후배에게 사랑을 하고 싶으면 힘을 키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렇게 고개 숙이면서 걔하고 사귄다고 치자. 그 다음은 행복해 질 것 같냐? 손이라도 한번 잡자고 하면 정색할 걸. 그래도 좋아?”
“ ···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어요.”
“사랑은 결국 주는 쪽이 손해다.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 2년 동안 따라다녀서 결혼했는데, 지금도 어머니 기분에 맞춰주려고 애쓰셔.”
뜻하지 않은 폭로에 후배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역시 사랑은 주는 쪽이 손해라는 건가. 다카기는 이 즐거운 분위기를 계속 끌고 갔다.
“이기고 싶으면 그만한 무기를 갖춰, 다들 알아들었지?”
“그런데 선배는 지금 싸워도 되는 입장 아닌가요?”
후배들은 다카기 캡틴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비해 코가 좀 큰 편이지만 옆에서 보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력 포인트, 옆모습만 보면 동양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에 두드러진 속눈썹과 갸름한 턱 선, 181cm의 키, 공부와 스포츠까지 만능,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헛소리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난 지금 학생이야. 한창 힘을 키우고 있는데 무슨 연애냐?”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도대체 어떤 여자를 만나려고 그러세요?”
“알아서 뭐 하게? 어쨌든 다시 만날 때는 인생의 승자가 돼서 만나자.”
선배가 음료수가 담긴 잔을 높이 들자 후배들도 동참했다.
가라오케에서 올린 인생 출정식, 하지만 더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각오를 다지기엔 충분했다.
* * *
[저 오늘 조금 늦을 거예요.]
“지금이 몇 신데 그러고 있니? 얼른 들어오렴.”
[후배들하고 마지막 인사 나누는 거예요. 이해 좀 해주세요]
“그래 ··· 알았다.”
어머니는 오늘도 아들과의 애정싸움에서 완패했다.
얼마 후면 타지로 떠날 녀석이 엄마보다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솔직히 서운했다.
“당신이 들어오라고 전화해 봐요.”
“시험도 끝났는데 내버려 둬요.”
다카기의 아버지는 아내의 구원요청을 외면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아들, 그렇게 활발한 녀석이 입시 준비에 몇 달 동안 묶여 있었는데, 순순히 집에 들어오겠는가.
아내의 허전한 마음은 내가 채워주겠다며 슬쩍 거리를 좁혔다.
“당신 갑자기 왜 이래요?”
“누가 들으면 내가 애정표현에 인색한 줄 알겠네요.”
대학생 시절 아내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충격이란, 다카기의 아버지는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여전히 도도해서 공략하는 맛이 있는 아내, 하지만 오늘 따라 반응은 차가웠다.
“왜 이래요. 2층에 미사키도 있는데”
“아들한테 차이고 나한테 강한 척 하는 거예요?”
“누 ··· 누가 차였다는 거예요?”
“밀어내도 소용없어요. 오늘 나는 조금 위험한 편이니까.”
점 점 못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손, 아내가 약간 거부감을 보이자 다카기의 아버지는 측면공격으로 방향을 틀었다.
“애들은 크면 부모 곁을 떠나는 법이에요. 서운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마음을 간질이는 위로에 잔뜩 성이 오른 눈은 풀어졌다.
언제까지 내 곁에 머무를 줄 알았던 아들이 오사카로 가버리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경악할 소리지만 그까짓 공부 조금 못해도 괜찮다.
미마세 공립학교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인데, 굳이 그 먼 길을 가야 했을까?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눈 하지 말아요. 애들이 다 떠나도 난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당신 오늘 정말 왜 이래요? 나한테 무슨 죄 지었어요?”
“죄는 지금부터 저지를 생각인데요.”
오늘은 정말 심상치 않은 분위기, 다카기의 어머니는 곧 화마가 닥칠 전장에서 도망쳤다.
“자려고요?”
“따라오지 마세요.”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요?”
“알아서 하세요.”
오랜만에 분위기 좀 잡아보려는데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 아내, 하지만 불이 붙은 욕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안 내려오겠지?’
2층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이 신경 쓰이지만 뭐 어떤가, 다카기의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그렇지.’
스스르 열리는 문, 새침하게 돌아선 아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아들과 2층에 있는 딸 때문에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 그렇다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힘으로 제압할 생각은 없었다.
여자란 생각보다 세심한 존재, 마음을 열 때까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갔다.
“당신은 이런 내가 지겹지도 않아요?”
“뭐가요?”
“가끔은 내가 고분고분해지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인가.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도 주위 사람들은 너는 복 받은 여자라며 남편만 칭찬하기 바빴다.
하지만 다카기의 어머니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집안 재력은 몰라도 나머지는 뭐 하나 뒤질 게 없는데, 내가 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마음을 열었던 남편에게 다시 마음을 닫았던 것도 그때부터, 이런 내가 남들에겐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겹다니요. 상대를 배려하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도도한 척 하는 것도 사랑을 갈망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나름 귀여워요.”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 ”
오늘은 져주는 사랑을 해도 좋지 않을까, 아들을 상대로 매일 지는 싸움만 거듭했던 상처는 남편의 위로를 받고 치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