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화 (3/361)

3화. 선택할 권리 - (3)

한편, 일본야구협회는 WBSC가 주관하는 U-15개최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지난 1989년, 일본은 자국에서 개최한 U-15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 멕시코 대회까지 제패했지만 이후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1996년,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에게 금메달을 내 준 건 씻을 수 없는 굴욕, 20년 만에 자국에서 개최하는 대회에서 3번째 우승을 노렸지만 선수차출도 쉽지 않았다.

[WBSC U-15, 논란 끝에 후쿠시마 이와키 시에서 개최]

다른 곳도 있는데 굳이 방사능 사고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후쿠시마에서 대회를 개최해야 했을까.

하지만 논란에도 불구하고, 집행위원회는 후쿠시마의 부활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사고지역에서 2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니 문제없습니다.”

설상가상, 2020년에 열리는 도쿄 올림픽에서도 일부 야구경기를 후쿠시마에서 추진할 계획, 현지여론은 너무 무모하다는 보도를 내고 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청소년들이 정치적 도구가 되고 말았다.”

킨타 마사시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일본의 모든 국가대표팀은 사무라이 재팬에 통합됐고, U-15대표 팀 역시 그 관할 아래에 들어갔다.

문제는 청소년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야구협회가 정부의 뜻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 선수시절부터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킨타 마사시게는 선수협이 이번 일을 좌시해선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좀 가만히 있을 수 없나?”

야구협회 관계자들은 튀어나온 말뚝을 마구 내리쳤다.

U-15대회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한 정부의 야심이 실려 있다. 일단 안전하다는 걸 보여줘야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IOC가 승인을 내려줄 것 아닌가.

뭣보다 U-15는 작년 대회에서 12개국에 전파를 탔고 무려 6천만 명이 시청을 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의 안전을 알릴 절호의 기회로 여겼지만, 나고야의 곰이라 불렸던 남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하 ~ !! 쉽게 말하면 당신들도 영합했다는 거군요? 정부의 끄나풀들과 말입니다!!”

“자네 말조심하게!!”

“제가 틀린 말했습니까?!! 이건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문제입니다!!”

킨타 마사시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대표 팀 차출에 절대 응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야구대회가 정치적 논란으로 확산되면서 선수차출은 백지화, 목적을 이룬 킨타 마사시게는 해설위원도 그만두고 야인이 됐다.

정부와 협회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여론이 날 그만두겠는가.

떠나는 자는 말이 없는 법, 하지만 마지막으로 끝까지 침묵을 지킨 선수협을 나무랐다.

“난 지난 WBC에서 대표 팀 차출을 조건으로 연봉인상을 요구하는 선수들을 봤다. 선수협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인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건 스스로 비겁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뿐이다. 난 일본의 어두운 면을 봤고 오늘 이렇게 물러나지만, 내 목소리가 많은 소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겼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영길은 혀를 끌끌 찼다.

나야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 친구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지 않은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나서고 싶지만 이제는 야구협회에서 은퇴한 몸, 안타까운 마음에 일자리라도 알아봐 줬다.

“자네, 먹고 살 여유는 되나?”

[하하 ~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굶어죽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킨타 마사시게는 프로 통산 493홈런을 기록한 거물, 그만한 연봉은 당연히 따라왔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워낙 어려웠던 탓인지, 부와 명성을 얻은 뒤에도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얼마나 지독했는지 마사시게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는 일화는 제로, 선수협이 마사시게에게 협력하지 않은 건 이런 배경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남자는 돈을 쓸 때 쓸 줄 알아야 된다고 그렇게 일러 뒀는데 ··· 쯧 ~ ”

[하하 ~ 천성이 이런 걸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일자리가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마사시게는 이 이상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도 큰데 더 빚을 지라니, 고맙고도 죄송한 마음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하루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정도 실력이면 협회가 그냥 놔 둘 리가 없을 텐데요]

은근 신경 쓰고 있던 일을 끄집어내다니, 고영길은 자기도 모르게 역정을 냈다.

“이 사람이 ··· 왜 갑자기 말을 돌리고 그러나?”

[회장님, 하루는 분명 엄청난 선수가 될 겁니다. 성장할 때까지 반드시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녀석은 지금 운동보다 공부가 우선이야.”

[예? 그럼 운동 그만 두는 겁니까?]

“아니, 선택할 길을 더 넓혀두는 것뿐이네. 지금 다이이치 고교 입시 준비하고 있어.”

마시시게는 경악했다.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 정도였을 줄이야, 자기 핏줄도 아닌데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였다.

[역시 운동선수보다는 회장님의 후계자로 육성할 생각이십니까?]

“그것도 그 아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네. 지금 자네가 남한테 신경 쓸 입장인가?”

[남이라니요. 하루는 제 조카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마사시게는 그동안 다카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땐 직접 지도를 해줬을 정도, 그 정도 재능이면 대학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 내 손주라고 너무 좋게 봐주는 거 아닌가?”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선수 평가는 냉정합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가나가와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겠습니까?]

“그래도 대학생에 비할 정도는 아니겠지. 자네 오늘 따라 아부가 너무 지나치군.”

[하하 ~ 두고 보십시오. 언젠간 제 말이 맞았다는 걸 실감하게 되실 겁니다]

“이 사람이 ···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이만 끊겠네.”

[예, 다시 전화드릴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렇게 통화는 끝났고, 고영길은 생각에 잠겼다.

대학생이라면 프로구단이 바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일 텐데, 이제 중학교 3학년 밖에 안 된 손자가 그 레벨에 올라섰단 말인가?

아무리 손자가 귀여워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 * *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U-15 일본 대표 팀을 이끌게 된 이와이 히로카츠는 협회의 정책에 난색을 표했다.

여론을 달래고 차출에 소극적인 선수들을 설득할 대안을 제시해야지, 기껏 한다는 게 부상치료비 지급인가?

여기에 정부는 ‘청소년들이 애국심을 발휘해줄 거라 믿는다.’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중, 그렇잖아도 여론은 정부와 협회의 결탁을 의심하고 있는데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전국대회를 토대로 차출 명단을 꾸렸건만 여론이 악화되면서 백지화 된 명단, 게다가 대회는 8월 10일에 개막하는데 남은 시간은 한 달이 조금 넘는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하는 건지, 이러다 우승 못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 아닌가?

이와이 감독은 핵심 선수만이라도 건져내기 위해 발악했다.

[다카기 하루요시 - 14세]

= 하마마츠 시 시시카와 중학교 3학년 재학 중

= 포지션 : 유격수(2루, 3루 수비 가능)

= 전국대회 성적(2016) : 타율 0.750, 홈런 5개, 11타점

= 중학교 통산성적(공식경기) : 타율 0.425, 21홈런, 32타점

애송이 리그에서 거둔 성적이라도 경악할 수준, 특히 다카기는 올해 전국대회에서 경악할 만한 장타력을 선보였다.

나무 배트를 써야 하는 세계선수권 대회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알 수 없지만, 일본 전체를 뒤져도 이만한 내야자원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연락은 해 봤나?”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카기는 대표 팀 차출을 거부했다.

전국대회가 끝나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8월을 통째로 지우라는 건가, 방사능 공포는 둘째 치고 대표 팀 차출은 명문고 진학만큼 매력을 끌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연락해 보게.”

“저기 ··· 감독님, 이 녀석은 그냥 빼시죠.”

“그게 무슨 소린가?”

“마사시게와 관련이 있습니다.”

1년 전, 킨타 마사시게는 다카기를 U-15 대표로 추천한 적이 있다.

거기다 그 자는 교토협회 단장을 맡고 있던 고영길의 수족, 도쿄에 본부를 둔 야구협회는 간사이의 교토협회와 미묘한 대립관계를 이어왔다.

다들 쉬쉬 하고 있지만 프로야구 계에 자이니치가 적지 않은 건 사실, 그들을 지원하고 발굴해 온 게 바로 교토 협회다.

고영길이 은퇴하면서 그쪽 기세가 조금 잠잠해 졌는데, 대표 팀 명단에 다카기를 넣으면 야구협회 관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협회가 마사시게와 필요 이상의 신경전을 벌인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지만, 이와이 감독은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네는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것 같군.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야 우승!! 그리고 선수 차출은 내 권한인데 여기서 왜 협회를 끄집어내는 건가?”

이와이 감독은 다카기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하마마츠로 달려왔다.

국가대표 차출을 위해 감독이 움직이는 일은 흔히 있지만, U-15에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건 드문 일, 다카기는 그 성의를 봐서 일단 면담은 받아들였다.

“관심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전 지금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없겠나? 국가대표가 되면 여러모로 득이 되는 게 많아. 대학진학도 그렇고, 지도자 생활이야 말할 것도 ··· ”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국가대표가 되는 건 제게 큰 이득이 없습니다.”

나라가 내 미래를 책임져 주는가.

잘 되든 못 되든 인생의 결과는 내가 져야한다. 여론을 돌리기 위해 생각한 대안이 겨우 부상치료비 지급이라니, 거기다 야구가 아무리 좋아도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곳에서 경기를 치르는 건 무모했다.

“몇 번을 설득하셔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카기 군!!”

애절한 구애를 외면하고 2층으로 향하는 녀석,

눈치를 살피던 다카기의 어머니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입시 준비 때문에 많이 예민해 져 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어머님이 좀 설득해 주십시오. 대표 팀엔 다카기 군이 필요합니다.”

“글쎄요 ··· 컸다고 이젠 제 말도 안 듣는데, 통할지 모르겠네요.”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다니, 하지만 이와이 감독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다이이치 고교 입시 시험을 치른다는데, 내가 그 앞길을 가로 막을 자격이 있는가.

협회의 정책도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마음 같아선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도망치면 논란에 기름을 들이부을 뿐, 어떻게든 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U-15 일본 대표팀, 쿠바에 패해 은메달에 그쳐]

시간은 흘러 8월, U-15 일본 대표 팀은 안타깝게 우승을 놓쳤다.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대표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와이 감독은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흥행도 기대에 못 미치면서 협회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나가지도 않은 대회에 관심 줄 필요 없지.’

물론 다카기는 공부에 전념하느라 대회 결과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대표 팀 감독이 직접 찾아왔다는 건 내 재능을 야구관계자들이 인정했다는 거겠지, 다이이치 고교에 A급 야구부가 있는 건 아니지만 프로선수 중 고시엔을 밟아 본 선수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프로에 갈 재능만 있다면 야구부 수준은 관계없는 일, 선택지를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한 노력은 입시시험 날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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