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선택할 권리 - (2)
“다카기(高木), 선생님이 부르셔”
“응”
이곳은 시즈오카 현 하마마츠 시에 있는 시시카와 공립 중학교
될 대로 되라는 녀석들과 달리, 목표가 있는 학생은 몇 번이나 모의고사를 치르며 선생님과 고교 진로상담을 나눴다.
“선생님”
“그래. 앉아라.”
자리에 앉은 다카기는 주위를 살폈다.
환한 미소를 짓는 학생도 있지만 세상의 종말이라도 맞이한 표정을 짓는 학생도 있기 마련, 하지만 행복이란 돈과 같은 것이다.
한쪽이 돈을 벌면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건 불가능, 지금은 자신의 행복에 집중했다.
“이 정도면 미마세 공립학교는 안정권이구나.”
“정말이요?”
“그래, 다만 다이이치는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예상했던 일, 다카기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다이이치 고교의 표준 편차는 70, 평균기준인 50을 훌쩍 넘는 수치다.
거기다 내신을 중시하는 학교라 입학시험을 잘 치러도 떨어지는 경우가 다수, 다카기도 나름 노력은 했지만 내신은 최상위권에 비해 조금 미약했다.
“공부에만 전념했다면 도전해 볼만 했을 텐데 ··· 아쉽구나.”
“남은 시간동안 발악은 해보겠습니다.”
제자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뭘 하든 열심히 하는 녀석, 그것만으로도 격려의 말을 건네기엔 충분했다.
“가나가와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 온 건 어떻게 할 거냐?”
“그건 일단 제쳐두려고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
“제가 결정한 일인데 후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카기는 가나가와 고교의 러브 콜은 잊어버렸다.
야구명문으로 이름난 곳이니 매년 들어오는 인재는 차고 넘친다.
그런 곳에서 선수를 제대로 관리하겠는가? 쓰다 망가져도 장난감은 얼마든지 있으니 쓰고 버리면 그만, 특별입학이라는 그럴 듯한 꼬임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세탁할 거 있니?”
“아니요. 괜찮아요.”
“저녁은?”
“아직 이르잖아요.”
다카기의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저 나이면 부모가 이것저것 챙겨줄 것도 많은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
요즘은 공부에 열중하느라 땀에 젖은 운동복을 빨아줄 일도 없다.
목표도 확실하고 어른스러운 아들을 뒀는데 이런 불만을 늘어놓는 건 배부른 푸념일까? 하지만 어머니 입장에선 귀염성 없는 아들이 내심 불만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마침 도착한 지원군, 미사키는 소파에 앉아 음침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엄마를 외면하지 않았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말이지 ··· ”
좀 활발해지라고 시킨 운동인데 날이 갈수록 더 무뚝뚝해지는 느낌, 중요한 시험을 앞둔 탓인지 요즘은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날 조금 더 의지해줬으면 좋겠는데 ··· ’
진로도 자기가 정하고 요즘은 청소도 알아서 한다며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는 아들, 엄마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던 미사키는 나름대로 진단을 내렸다.
“엄마는 지금 애정결핍이네요.”
“내가 애정결핍이라고?”
“그렇잖아요. 애정이 필요한 건 하루가 아니라 엄마 같은데요?”
애정이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나였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몸에 닭살이 돋았다.
“아쉬우면 엄마가 애정표현 좀 해봐요.”
“걔도 다 컸는데 잘못하면 역효과만 일어나지 않겠니?”
“요즘은 여자도 적극적으로 표현을 해야 하는 시대에요. 상대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면 좋은 남자 다 놓치죠.”
말을 하면 할수록 가관, 딸을 향한 시선은 의심으로 바뀌었다.
“너 지금 사귀는 사람 있니?”
“히히 ~ 글쎄요?”
미사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크나 했는데 어느덧 훌쩍 자라버린 아이들, 조금 서운했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맛은 괜찮니?”
“네”
일 때문에 늦는 아버지를 제외한 저녁식사. 어머니는 나름대로 아들에게 애정을 표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미사키의 마음은 복잡했다.
‘실은 나도 애정결핍인데 ··· ’
생긴 것도 매끈하고 뭐든 잘하는 동생, 거기다 남자라 어른들의 관심도 많이 받고 있다.
미사키는 동생을 의식했지만 속마음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
착한 누나로 살아가는 편이 부모님께 사랑받을 승산이 크다는 걸 일찍 깨달았고, 오늘도 그 방식으로 엄마에게 점수를 따냈다.
하지만 오늘 따라 동생을 향한 질투심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너 미마세 공립학교 갈 실력은 돼?”
“ ······ ”
“하긴, 거기가 안전하게 지원할 곳은 안 되지.”
자기가 다니는 학교라고 잘난 척을 떨다니,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다카기는 반격에 나섰다.
“거긴 안정권이야.”
“에이 ~ 또 강한 척 한다.”
“못 믿겠으면 두고 봐. 잘 먹었습니다.”
동생이 방으로 들어가자 미사키는 엄마를 붙잡고 심문에 나섰다.
“엄마, 정말 안정권이에요?”
“그래, 담임선생님이 거긴 2지망으로 쓰라고 했다더라.”
미사키는 충격을 받았다.
편차치가 65정도 되는 학교에 지원하려면 반에서 2 ~ 3등은 해야 안전하다. 미마세 공립고교 수준이 대략 그 정도, 다이이치는 편차치가 70이나 되는 날고 기는 아이들의 집합소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던 동생이 나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니, 공부만큼은 동생보다 잘 한다고 자신했는데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져버렸다.
‘나도 질 수 없지.’
자기 방으로 돌아간 미사키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맸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최상위 공립대학도 노려볼 수 있는 실력, 잘난 동생은 승부욕이 강한 소녀에게 자극을 제공했다.
* * *
“단장님께서 축하말씀을 하시겠습니다.”
이곳은 일본 야구협회 교토본부,
창립 60주년을 맞아 각지에서 몰려온 협회관계자들은 단상에 오르는 고영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 동포가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때는 1962년, 고명출은 야구협회 교토본부 부단장 자격으로 스포츠 사업에 발을 들였다.
차남이 교토상고 야구부원이 된 이유도 있지만, 그해 고시엔에 이름을 올린 학생 중 자이니치가 11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본격적인 후원사업에 나섰다.
덕분에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받으며 운동에 힘 쓸 수 있었고, 자이니치의 프로 진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고영길도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야구협회 지원을 계속했고, 그 손길을 거쳐 성장한 거물도 적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야구계의 큰 손, 그 존재감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었다.
“흐음 ~ 협회가 올해 60년을 맞이했지만 이 역사가 80년, 100년을 이어가려면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아껴선 안 됩니다.
세상에는 투자할 곳이 많지만 사람에 투자하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지요. 젊음은 참 좋은 겁니다.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피어나는 꽃은 각양각색이지요. 그리고 그 빛은 이 세상을 빛내줍니다.
이것만큼 멋진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고영길은 아직 안 끝났다며 손사래를 쳤다.
“세상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만 집중해도 성공하기 힘든데 이것저것 건드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이죠.
하지만 나무가 더 많은 빛을 받으려면 그만큼 가지를 쳐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만 집중하라며 숨겨진 가능성을 쳐낸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지요. 우리가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협회는 앞으로도 번영할 거라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다시 한 번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고영길은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이쿠 ~ 이게 누구신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이 고영길 앞에 머리를 숙였다.
프로야구에 2063안타 493홈런 족적을 남긴 킨타 마사시게. 은퇴한 지 14년이나 지났지만, 거침없는 해설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바보!! 지금 어딜 보는 거야?!!”
WBC 해설 중 욕설을 퍼부은 사건은 지금도 팬들에게 회자될 정도, 하지만 이런 거물도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대는 있었다.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나?”
어깨를 몇 번 쳐주자 나고야의 곰이라 불렸던 남자는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의 앞길을 열어준 은인,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처럼 그 뒤를 놓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자네들 얼굴도 나름 봐줄만 하군.”
“저희들 얼굴이 그렇게 못 봐줄 정도였습니까?”
“하하 ~ 그만큼 반갑다는 소리지 이 사람아.”
행사 후 마련된 뒤풀이 자리,
고영길은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친화력을 발휘해 각지에 많은 인맥을 구축했다.
여기에 할아버지 때부터 축적한 자산을 이용해 유통, 지역방송, 부동산,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투자영역을 넓혔다.
몇 가지 사업은 정리했고 나이가 있는 만큼 자식들에게 많은 권한을 물려줬지만, 협심증으로 쓰러지기 전까진 왕성한 활동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버거운 나이, 야구협회 단장을 책임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떠들썩한 삶을 살았으니 취미생활을 즐기고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지, 복잡한 일은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회장님, 나중에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돌아오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거네. 사람이란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인데 내가 욕심이 너무 지나쳤어.”
하지만 협회 관계자들은 고영길이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성격상 절대 조용히 살 수 없는 사람, 은둔 생활도 1 ~ 2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