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화 (1/361)

1화. 선택할 권리 - (1)

“판결하겠습니다.”

때는 2015년, 한국 여론은 한 노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흔히 있는 가족 간의 분쟁이건만, 방청객은 숨소리도 죽인 채 판사의 선언에 귀를 기울였다.

“문제가 된 토지는 원고가 1983년에 구입한 땅으로 조상 묘 관리를 위해 조카들에게 명의 신탁한 땅이 분명합니다. 또한 피고는 초기 등본을 분실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원고가 등본을 제출했으니 피고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피고가 지난 2014년에 제기한 토지 분할청구 소송은 ··· ”

승리를 확신한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결과, 판결이 확정되자 변호사는 발칵 뒤집힌 피고석을 뒤로 하고 법정을 빠져나왔다.

“고영길 씨 건강은 지금 어떤가요?”

“제주시청에서 묘를 관리해주겠다고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고영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법원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의 질문세례, 하지만 변호사는 쏟아지는 관심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회장님, 끝났습니다.]

“그래 어떻게 됐나?”

[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1년 간 이어진 투쟁 끝에 얻어낸 승리,

하지만 승전보를 받아든 환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조상 묘를 관리해주겠다니, 그 원경호이라는 제주지사가 쓸데없는 간섭만 하지 않았어도 이번 사건이 여론의 귀에 흘러들어갈 일은 없었다.

‘괜한 짓을 했어. 괜한 짓을 ··· ’

고영길은 잠시 옛 일에 빠져들었다.

때는 1983년, 고영길은 고향에 방치된 조상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제주도의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묘를 잘 관리하라는 뜻으로 조카들 앞으로 명의를 이전해 줬다.

하지만 덜 떨어진 조카들은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었다. 묘 관리는 뒷전이고 땅을 나눠먹는 데만 혈안, 믿음이 큰 만큼 배신도 컸다.

[왜놈 조상 묘지를 왜 우리 세금으로 관리해야 하는 건데?]

→ 네 똥 같은 생각은 여기 싸지르지 마라. 상식적으로 고영길이 제주 시청에 관리해달라고 했겠냐?

→ 그쪽이 알아서 관리했던 건데 원경호가 끼어들어서 일 커진 거다. 모르면 가만있어라.

→ 투자 유치하려고 머리 굴린 것 같은데, 고영길은 기업인이다. 한국인이라는 감정에 호소한다고 투자를 하겠냐?

[일본 놈은 일본에서 살아야지. 왜 자꾸 여길 기웃거려]

한국의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고영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했다.

“중요한 건 국적이나 출신이 아니다. 능력과 재력만 있다면 나만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 이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겠느냐?”

때는 1919년, 고영길의 할아버지 고명출은 일본으로 넘어왔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취직입국을 제한했지만,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제주도민은 알게 모르게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기업이 원한 건 안전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력, 2등 국민이라 병역 의무가 없는 조선인은 환영을 받았다.

물론 밀려오는 인력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열약해졌지만, 이때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우리도 이제 회사를 설립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 1922년, 오사카의 조선인들은 제주도민과 협력해 조선해양통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서울보다 빨리 신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점이 있는데, 이 돈 되는 사업을 그냥 지켜볼 순 없지 않은가.

고명출 역시 조합원으로 참여, 다른 지역의 조선인들도 투자금을 내면서 회사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조선인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잃었다!!”

“놈들을 죽여야 살 길이 열린다!!”

하지만 간토 대지진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부를 축적한 조선인은 폭도들의 화풀이 대상이 됐고, 일본 정부는 학살을 막기는커녕 칼날을 피해 도망친 조선인들의 부동산을 먹어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의 회사를 지켜야 합니다!! 도망쳐선 안 됩니다!!”

하지만 고명출은 도망치지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간부들을 대신해 회사의 재산을 수습,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했다.

2등 신민이라도 어쨌든 보호해야 할 국민 아닌가? 그런데 학살을 방치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도 국민이다!! 정부는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

“저기 조선 놈이 있다!!”

“죽여라!! 죽여!!”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폭도들에게 맞아 죽을 뻔 했지만, 오사카 부 경시청을 역임하고 있던 ‘스미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멸망한 나라가 백성에게 지울 의무는 없어.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명출은 가슴에 칼을 세웠다.

우리는 왜 보호도 받지 못하는 2등 신민으로 전락한 건가.

그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나라 팔아먹은 놈들이야 선택권이 있었지만,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하는 건가.

멸망한 왕조가 백성에게 의무를 부과한다는 건 우스운 일, 그때부터 조국이라는 존재를 가슴에서 지워냈다.

그리고 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삶을 택했다.

“스미다 씨, 사업을 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십시오.”

“말해 보게.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겠네.”

회사를 수습한 고명출은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일본으로 오는 조선인은 매년 늘어나는데 이들을 수용할 숙박시설은 턱 없이 부족한 현실, 일본 정부마저 손을 놓아버리자 고명출은 허가를 받아 숙박업을 시작했다.

‘두고 봐라. 앞으로도 바다를 건너는 사람은 줄지 않을 거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에서 죽어나가는 조선인을 방치했지만, 여전히 값싼 노동력을 원하고 있다.

앞으로도 바다를 건너는 조선인은 늘어나겠지, 고명출은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해운과 숙박업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그동안 방패막이 역할을 해 준 스미다까지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자하면서 회사는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비누나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도 설립,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막대한 타격을 보기도 했지만 끝내 다시 일어섰다.

[일본에 붙어 출세한 놈]

물론 독립을 맞이한 한국은 고명출을 좋게 보지 않았다.

돈만 벌 줄 알지 독립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며 친일파로 몰아 붙였고, 그동안 쌓인 게 많은 고명출도 반격에 나섰다.

“난 일본으로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게 친일이라고 욕을 먹을 일입니까?”

“그렇다면 일본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숙박업을 했다는 건 ··· ”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어디서 자든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무슨 지원금을 줍니까? 그 돈은 제가 조합원들과 모은 돈과 스미다 씨의 도움으로 마련한 겁니다.”

어렵게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것도 순탄치 않았다.

어떤 사람은 ‘같은 조선인끼리 무슨 돈을 받느냐?’라며 숙박비를 내길 거부했고, 고명출이 기어이 숙박비를 받아내자 앙심을 품고 숙소에 방화를 시도하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와전되면서 고명출은 ‘일본에 빌붙은 놈’이라는 오명을 썼다.

“한국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신경 안 씁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죠. 부모 노릇도 못 한 놈이 자식에게 대우받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죠. 백성을 지키지 못한 나라가 무슨 국민의 의무를 논한단 말입니까? 저에게 그런 논리 따윈 들이밀지 말라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잘난 독립 운동가들은 지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겠지?

하지만 현실이 비참하다는 건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독립 운동가들은 대우라도 제대로 받고 있는가? 이런데도 내가 독립운동에 투자를 했었어야 했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고명출을 욕하지 마라!!”

“그는 자이니치의 대통령이다!!”

자이니치는 물론 제주도민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매년 꾸준히 재일사회에 기부를 해왔으니, 고명출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걸 지켜볼 사람은 적지 않았다.

“괜히 벌집을 쑤셨군.”

고명출을 변호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공세를 퍼붓던 한국 여론은 슬쩍 뒤로 물러났고, 고명출은 보란 듯이 자이니치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국적도 선택할 수 있죠. 자이니치라는 게 부끄럽다면 귀화를 하십시오. 성공하고 싶다면 스스로 당당해지는 게 우선입니다.”

이제는 귀화까지 유도하다니, 한국 여론은 다시 들썩였지만 자신만의 왕국을 설립한 고명출은 흔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이 왕국은 너희들이 이끌어 가는 거다. 뒷일을 부탁한다.”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뜻을 이은 고영길은 가업을 더욱 크게 키웠다.

부동산, 스포츠, 호텔, 방송, 유통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고, 지금은 개인 재산만 1조 4천 억 엔에 이르는 거부가 됐다.

나만의 왕국을 세웠는데 자이니치라는 출신이 뭐가 부끄럽겠는가? 고영길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크게 개의치 않게 됐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병실을 찾은 의사는 과거에 빠져든 노인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냈다.

“뭐, 그럭저럭 괜찮네.”

“위기는 넘겼으니 안심하십시오.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그럼 오늘 퇴원해도 되나?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지 여기 더는 못 있겠네.”

“하하 ~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난 여기서 시간을 보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의사는 퇴원을 말렸다.

가슴에 격한 통증을 호소해 실려 온 환자, 잘못하면 심장마비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 했다.

이렇게 멀쩡히 말을 하고 있는 것도 기적, 고영길은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지만 의사의 말은 받아들였다.

* * *

“사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님이?”

이곳은 스기토모 그룹의 사무실, 사장 다카기 요시무네는 비서가 건넨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에 안부 전화도 드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전화를 주시다니, 너무 놀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버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흐음 ~ 그건 됐고, 거래는 어떻게 됐냐?]

고영길은 다짜고짜 사업문제부터 꺼내들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중국 자본의 유입과 엔저 현상이 겹치면서 부동산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다.

중국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 당연히 중국의 부자들은 영구보유권을 인정하는 해외자산에 눈을 돌렸다.

도쿄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도쿄 일대 자산은 2배 이상 오를 거라는 전망이 우세, 고영길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걱정 마십쇼. 아버님이 지시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다.”

[흐음 ~ 그래, 그래야지. 미사키하고 하루는 잘 지내고 있냐?]

“예, 그것보다 건강부터 챙기십쇼. 건강해야 사업도 하고 손주들도 보실 거 아닙니까.”

아들의 위로에 고영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위로를 받는 날이 오다니, 영원할 줄 알았던 건강이 이 흔들리자 괄괄했던 성격도 약간 누그러졌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하루는 요즘 어떠냐?]

“그야 잘 지내고 있죠.”

[그게 아니라 입시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냐 그 말이다.]

“알아서 잘하는 녀석이잖습니까. 일단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쯧 ~ 이런 무심한 녀석 ··· 그러고도 네가 아버지냐?]

고영길이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걸 수 있는 건 돈과 핏줄, 특히 핏줄과 관련된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성격이다.

특히 다카기 하루요시는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손자.

입시 준비로 바쁜 녀석의 입장을 생각해 참고 참다가 아들 녀석에게 전하를 걸었다.

[하루는 필요한 게 있어도 말을 안 하는 성격이다. 그럴수록 네가 잘 챙겨줘야 할 거 아니냐.]

“예, 안사람한테 당부해두겠습니다.”

[이런 ··· 쯧 ~ 쯧 ~ ]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애지중지 하는 손자가 명문고의 러브 콜을 받았다는 걸 알면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까?

괜히 흥분하다가 심장에 무리가 갈지도 모를 일, 다카기 요시무네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괜한 말은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