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가장 높은 곳으로 (3) [완]
누구나 기뻐하고 있을 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가 있다. 바로 국고를 담당하는 대사농 종요였다.
“끄응! 나라의 창고가 거덜 나게 생겼군. 기왕 이리된 거 아낌없이 풀어라!”
기껏 힘들게 모았던 국고가 다 털리게 생겼으니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도 싫은 기색이 아니다.
황궁의 창고에 있던 각종 재료들로 요리가 만들어졌다. 평소에 황제와 고관대작을 위해서만 요리했던 황궁 숙수들이 직접 나섰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이려면 워낙 많은 양의 요리를 만들어야 했기에 황궁 숙수들의 손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낙수객잔과 같이 이름난 객잔의 주인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요리를 만들었다.
곧 황제와 고관대작들, 낙양의 부호들이나 먹을 수 있었던 고급요리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졌다. 신분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못 받거나 덜 받는 사람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모두가 즐겁게 먹고 마시며 이의민의 혼인식을 같이 즐겼다.
말단 관원인 구손 역시 평소에는 구경도 하지 못한 각종 산해진미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소제가 앞으로 나와 이의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단순히 축하의 인사를 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뭐지? 폐하께서 중대 발표를 하신다던데, 그게 혼인식 도중에 한다는 거였나? 대체 무슨 중대 발표기에....?’
구손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소제를 주목했다. 소제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은 이의민이 승상에 올라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의 위기를 어찌 극복하는지 오랫동안 봐왔다. 승상의 탁월한 지도하에 백성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고, 분열되었던 나라는 다시금 하나가 되었다. 하북과 익주, 양주까지 모두 중앙에 복속이 되었을 때 짐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천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이는 짐이 아닌 이의민이라고. 그리하여 짐은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자고.”
소제의 양위 발표가 진행되자 이를 지켜보던 만백성들이 수군거렸다. 그들도 황제의 중대발표가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황제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한번 오르면 절대 자의로 내려놓지 못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소제는 자의로 자신의 자리를 이의민에게 양보하고 있다.
원래라면 피바람이 불었어야 할 일이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사자인 소제는 절대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의민의 혼인식에서 매우 평화롭게 황제의 자리가 교체되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 백성들은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이어 이의민도 입을 열었다.
“쉽지 않았을 황제 폐하의 결심에 존경을 보내옵니다. 그럼 새로 황제로 등극하는 나 이의민이 모두에게 천명하겠다! 이 땅은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다! 더 이상 피바람이 부는 일은 없을 것임을 천지신명께 맹세하겠다! 무거운 마음으로 폐하의 마지막 명을 따르겠노라!”
이의민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백성들은 조금 전보다 더 큰 함성을 외치며 온 낙양을 뒤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 만세! 만세! 만만세! 신제 폐하 만세!!”
한나라가 사라지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순간이다.
**
며칠 후 혼인식만큼 성대한 이의민 황제 대관식이 열렸다. 초선은 황후로서 이의민과 함께 했다.
새 나라가 되었지만 도읍을 옮긴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낙양을 도읍으로 하고 기존의 황궁을 그대로 썼다.
그리고 새 나라의 국호는 백(白)나라라고 결정했다. 모든 이들과 오랫동안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결정이다. 그 뜻은 황제부터 말단 관리까지 모든 깨끗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자는 의미였다.
이의민이 황제가 된 첫 어전회의. 이의민의 수하였던 이들 대부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모두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곽봉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크흑! 폐하! 감축 드립니다! 신 곽봉, 눈물이 날 거 같습니다.”
“흐흐. 눈물이 날 것 같은 게 아니라 이미 흘리고 있소. 위장군.”
“감축 드립니다. 폐하. 폐하께 이 호칭을 쓸 날을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사옵니다.”
“다들 고맙구나. 공달. 봉효.”
감상에 빠지는 건 거기까지다.
가장 먼저 다루어질 것은 역시 공신들을 위한 논공행상이다.
“전 한나라 황제였던 소제를 홍농왕으로 임명할 것이다. 그의 사가는 낙양과 가까운 홍농에 마련한다.”
소제는 엄밀히 얘기하면 공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가장 먼저 다뤄야 할 인물이었다. 어쨌든 전 황제였고, 그의 결정 덕분에 평화롭게 백나라를 세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사도였던 원술을 여남왕으로 봉한다. 순유는 승상에 봉하고, 곽가와 종요, 정욱을 각각 사도, 사마, 사공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미축에게 태상과 하남윤을 겸하게 한다.”
이후로도 논공행상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사마방은 대사농이 되었고, 공융, 가후 등도 나머지 구경 중 하나의 관직을 맡게 됐다. 그리고 노숙은 양주자사가 되고 황충은 병주자사, 유엽은 익주자사가 됐다.
장군직 역시 빠질 수 없었다.
이의민과 가장 가까운 곽봉이 대장군으로 임명이 됐다. 이제 그의 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그의 무력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여전히 손색이 있었다. 하지만 최고 장군직인 대장군 자리는 무력보다 군사들을 얼마나 아우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군사들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곽봉보다 그 자리가 더 어울리는 장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고순, 서황, 우금이 각각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으로 임명됐다. 장료는 정동장군과 사례교위를 겸하게 됐고, 관해, 악진, 태사자는 각각 정서, 정남, 정북장군으로 임명됐다.
마초와 허저, 전위, 방덕은 각각 사진장군이 되었고, 그 외 관직은 현재 직위에 있는 이들이 그대로 승계가 됐다.
파격적으로 승진을 한 이들은 물론이고, 승진을 하지 못한 이들도 불만은 없었다. 모두 합당한 승진이었고, 공이 있는데 승진을 못한 이들도 대신 충분한 포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공행상 다음으로는 나라의 정책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의민은 과감하게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나라의 모든 세율을 2년 동안 절반으로 줄이겠다! 2년간 줄인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만약 그리 운영해도 국고에 문제가 없다면 줄인 세율을 2년 후에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끼어있던 왕망의 신나라가 어찌 바로 망했는지 순유에게 지겹도록 들은 이의민은 처음부터 파격적인 정책으로 백성들의 마음부터 사로잡으려 했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 발표에 백성들은 다시 한번 환호성을 질렀다.
어전회의에서 나올 만한 주제가 다 나온 후 갑자기 정욱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좋은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옵니다. 허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 말씀드리지 아니 할 수가 없사옵니다.”
“무슨 말인가? 어서 해보라.”
“이전 나라였던 한나라를 아직까지도 추종하는 선비들이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바뀐 것에 불만을 품고 다시 이전 한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을 처벌하시어 백나라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소서.”
역시 정욱은 냉정했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에게 자비가 없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정욱과 비슷했던 이의민은 조금 달라졌다. 정욱의 요청을 거부하며 왜 거부하는 것인지 차분히 설명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야. 평생을 한나라에 대한 충의로 살아왔던 그들인데 당연히 그럴만하지 않나? 이제 나라가 백나라로 바뀌었다고 선비들의 충의사상까지 바꿀 생각은 없어. 그럴 진데 어찌 그들을 처벌한단 말인가?”
“하지만....”
“됐어. 내 말대로 해. 끝까지 충정을 지킨 이들이 어찌 되는지 보여줘야 다른 이들도 우리 백나라에 그 같은 충정을 보일 것 아닌가. 더군다나 새로운 나라에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 법. 그들이야 백나라에 마음을 열지 않겠지만, 그들의 후손은 다를 수 있어. 지금 그들을 모두 처벌한다면 그들의 후손 역시 나와 백나라에게 척을 질 것이 아닌가?”
이제는 말하는 솜씨도 정욱이나 순유 같은 이들 못지않아진 이의민이다. 결국 이의민에게 설득 당한 정욱은 고개를 조아렸다.
“신이 아둔하여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 못하였나이다. 송구하옵니다.”
“자자! 나라가 바뀌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소. 모두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해주기만 하면 되오. 이제 끝이 아닌 시작이오. 앞으로 그대들의 활약을 기대하겠소.”
그렇게 백나라의 첫 어전회의가 순조롭게 끝났다.
**
이의민의 말대로 황제가 되고 나라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와 그 주변의 일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크악!”
“쯧쯧! 거기서 힘을 빼면 어떡하나? 미래의 대장군이 될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질러서야 되겠나? 설마 내가 황제라고 해서 설렁설렁 하는 건 아니겠지?”
이의민의 목검에 제대로 두들겨 맞은 마초가 이를 악물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다음에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이의민은 황제가 되어서도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늘 마초 등과 함께 비무를 하며 실력을 연마했다. 그 덕분에 한창 전쟁을 하던 때보다 그의 무예는 더 는 것 같았다.
마초와 대련을 마친 이의민은 곧바로 승상부로 향했다.
이제 승상이 된 순유가 득달 같이 달려 나왔다.
“폐하! 이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부르시면 신이 즉각 달려갈 것을....”
“됐어. 할 일도 없는데 그냥 산보 겸 나온 거니까. 그래. 요새 별 다른 문제는 없나?”
“큰일은 아니지만 전에 말씀하신 학관에서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이의민은 부족한 관료들을 채우고, 또 신분을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 정도는 마련해 두고 싶은 마음에 학관이라는 기관을 건립했다.
“학관은 자네도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것이... 사마의가 문제입니다. 대사농의 둘째 아들 말입니다.”
“아! 그 똘똘한 놈? 그 놈이 왜?”
“다른 게 아니라 워낙 똑똑한 게 문제입니다.”
“허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똑똑해서 문제라고...?”
“학관 내에서 그의 재능이 워낙 독보적이라 다른 학생들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마의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혼자 뛰어나다며 남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다른 학생들은 심한 자괴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다가 전부 그만둘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마의가 그만큼 뛰어난 인재라는 건 분명 좋은 일입니다만, 그 아이 하나 때문에 나머지 나라의 동량들이 의욕을 잃고, 심하게는 학업을 아예 포기할 수도 있으니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흐음.... 그건 확실히 큰 문제로군.... 그렇다고 사마의를 학관에서 내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럼 사마의를 겸손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려면 사마의보다 더 뛰어나거나 적어도 비슷한 인재는 들어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뛰어나기는커녕 조금이나마 비슷한 재능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의민이 해결책을 내보았지만 그건 순유도 이미 생각해본 바였다.
“그래? 그 정도로 인재가 없는가?”
“인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만큼 사마의가 너무 뛰어납니다.”
다시 고민에 빠지는 이의민. 그때 순유가 업무를 보는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서신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그 서신을 보는 이의민의 눈이 순간 커졌다. 거기에는 뜻하지 않게 이의민이 아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뭔가?”
“아! 그건 서주 지방에서 온 내년 학관에 입학할 예정인 학생들의 추천서입니다.”
“그래? 그럼 내년에 여기 적힌 이들이 입학한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사마의는 더 이상 걱정할 거 없어. 자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야. 일단 날 믿고 그대로 가 봐. 그러면 이 나라는 적어도 다음 세대까진 문제가 없을 거야.”
“예? 폐하? 그게 무슨....?”
이의민이 이리 확신하는 이유는 서신에 적힌 그 이름 때문이다. 그가 본 서신에는 제갈량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fin
K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