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가장 높은 곳으로 (2)
이의민은 순간 당황했다. 설마하니 소제의 입에서 직접 양위를 하겠다는 얘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황제의 자리라는 건 아무리 두렵다고 한들 자기 목숨 하나 살리자고 선뜻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소제의 태도가 자기 목숨 하나 살리자고 이러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소제의 성정대로라면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 황제 자리를 내놓을 테니 제발 살려달라며 울고불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았을 테니 말이다.
너무도 침착하고 평온한 어투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겠다고 하니 천하의 이의민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당황했던 이의민은 곧 침착을 되찾았다. 그리고 소제의 생각을 확실히 듣고 싶었다.
“어찌 양위를 이리 쉽게 말씀하십니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그 자리를 내놓는 것입니까?”
“내 목숨은 방금 얘기했다시피 이미 내 소관이 아니오. 승상. 내가 여기서 애원을 해봤자 승상의 결정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소. 단지....”
잠시 뜸을 들이는 소제. 이내 할 말을 모두 정리했는지 이의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말을 더듬고 당황하던 모습은 오간데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이 자질이 없는 자보다는 승상과 같은 이가 이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오. 이 제왕의 자리는 수만, 아니. 수백 수천만의 백성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요. 나처럼 내 스스로 무언가 할 줄 모르는 자가 아니라 승상처럼 모든 것들을 떠받들고 감당할 수 있는 영웅이 어울린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소. 하지만 아무리 승상이 대단한 영웅이라 해도 이 한나라는 수백 년을 이어왔던 나라요. 그런 나라가 한순간에 다른 나라로 바뀌려면 엄청난 출혈이 따를 것이오. 하지만 짐이 직접 양위의 뜻을 밝힘으로서 그 출혈을 최대한 막고 싶소.”
이의민은 얘기를 하고 있는 소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제는 그런 이의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고 있다.
‘진심이다....’
이의민은 소제의 진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의민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피어났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던 살벌한 분위기는 눈 녹듯 사라지고 햇살만큼 따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폐하의 뜻을 신은 확실히 알아들었나이다. 이제 그 누구도 폐하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의민은 결국 소제를 살려주기로 약속했다.
새롭게 나라를 세우려 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건 역시 이전 나라의 흔적이다. 그것들 중 가장 확실히 지워야 할 것이 바로 이전 나라의 황제다. 그래서 이의민은 다른 이에게는 자비를 베푼다 해도 소제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제의 진심을 확인하고 보니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의민 입장에서는 최선의 결과였다. 소제가 진심으로 양위를 한다면 이의민도 굳이 손에 피를 더 묻히지 않고 평화롭게 새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의민이 아무리 싸움을 좋아한다 해도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는 건 결코 원치 않으니 말이다.
이의민의 약속에 소제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의민에게 잘 전했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옆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순유가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럼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기왕이면 폐하께서 만백성 앞에서 양위조서를 발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서를 황제가 직접 발표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뭐 어떠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제다.
“그럼 양위 날짜는 언제가 좋겠소? 빠를수록 좋지 않겠소?”
“허나 지금 당장 할 수는 없겠지요. 칠일 후가 신의 혼인식입니다. 그때에 맞춰서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겠소. 내 그리 알고 준비하겠소.”
이의민은 대전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의민은 걸어가는 내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얼떨떨했다.
‘내가 황제라니.... 황제라....’
정말로 황제의 자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칠일 후면 소제는 이의민에게 양위를 할 것이고, 그럼 정말로 황제가 된다.
그렇게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뒤에 있던 곽봉이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외쳤다. 위장군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웬만하면 체통을 지켰던 그가 말이다.
“크핫! 아우님! 축하하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막상 코앞에 닥치니 실감이 아니 나는군. 아! 혼인식 전만이라도 내가 형 대접을 좀 받아야겠네. 양위가 끝나면 아우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은가? 크하하하!”
평상시라면 그런 곽봉의 흉을 봤을 곽가도 전혀 타박하지 않고 이의민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릴 뿐이다.
“주군. 감축 드립니다.”
이어서 다른 수하들 역시 모두 이의민 앞으로 몰려와 축하 인사를 올렸다.
“주군! 감축 드립니다!”
“다들 애써줘서 고마워. 다 자네들 덕이야. 이리 되고 보니 익주로 보낸 고순과 악진, 그리고 양주에 있는 내 친우인 공로가 보고 싶군. 그쪽들은 어찌 되어 가나?”
이의민의 질문에 정욱이 대답했다.
“익주는 거의 정리가 끝났다고 합니다. 이제 낙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양주도 곧 끝날 것 같습니다. 바다 쪽에 있던 길태가 손견군을 기습한다고 했으니 큰 이변이 없는 이상 곧 승전보가 들려올 겁니다. 아마 주군의 혼인식에는 고순 장군과 원 사도, 둘 다 무리 없이 참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좋군. 마음 같아서는 자네들에게 좀 쉬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자네들의 고생은 내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전쟁은 끝났지만 양위준비로 인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질 이들을 위로한 후, 이의민은 황궁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낙양을 떠난 후 가장 보고 싶었던 이를 보기 위해서.
“상공!”
이의민이 집으로 들어가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이의민의 품에 안겼다.
“잘 지내고 있었느냐?”
“네. 상공.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소녀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허허! 내 너에게는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따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더냐.”
“알고는 있었지만 상공께서 전쟁터에 나가계신 것만으로도 두려운데 어찌 합니까?”
계속 이의민의 품에 안겨 투정을 부리는 초선. 이의민은 그런 그녀가 귀엽기만 하다.
이의민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초선에게 얘기해주었다. 하북에서의 무용담을 들을 때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도 했고, 기가 막힌 순유의 계책을 얘기해주니 입을 벌리고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양에 도착해서 소제와 대화를 나누었던 일까지 얘기했다. 초선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기뻐하는데 반해 그녀는 이의민이 황제가 된다는 사실이 기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째 기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역시 아직도 네 아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왕윤은 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으니 초선 역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의민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럼 왜 기쁘지 않은 표정일까?
“상공.... 소녀는 두렵습니다. 상공이 황제 폐하가 되신다면 이제 소녀와 멀어지는 건 아니신지....”
“무슨 소리!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느냐? 난 폐하께서 양위를 할 시기도 너와의 혼인식 날짜로 정했다. 모두에게 너와의 혼인을 알리면서 동시에 황제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면 너도 자연히 황후가 되는 것이다.”
초선은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것인지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소, 소녀가 황후.... 소녀 같은 천녀가 정말 황후가 되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네가 어때서?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일개 보사 출신인데 황제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어떤 자리에 오르는데 출신 따위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나라는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럼.... 상공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나라의 황제, 천자가 된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져야 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두려운 것은 매한가지다.”
이의민은 지난날을 회상했다. 천출이라 무시 받던 어린 시절. 고려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지만 끝내는 얻지 못한 왕좌.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봤다는 최충헌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보아라. 최충헌. 나는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고려보다도, 한나라보다도 훨씬 살기 좋은 제국을 만들 것이다. 천출이자 보사출신인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그리고 훗날 네게 물을 것이다. 이래도 핏줄이 중요하냐고.’
그리 생각하자 조금 두려운 마음이 가시는 것 같았다.
“아니다. 내가 실언을 했구나. 나 이의민이 가는 길은 어디든 두렵지 않다. 거기에 초선 너까지 있다면 더더욱.”
“소녀도 그렇습니다. 황후자리 따위 어찌돼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상공만 제 곁에 계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눈을 마주치다 입을 맞추었고 그렇게 밤은 깊어져갔다.
**
순식간에 7일이 지났다. 낙양은 시끌벅적했다. 이의민의 혼인식과 더불어 황제의 중대발표가 있다는 소식이 낙양 전체에, 아니. 중원 전체에 퍼졌다. 그래서 낙양 백성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원술이나 마등, 유표, 만총, 포신, 철리길, 공융, 공손속과 같은 이의민에게 복속되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이들까지 모두 빠짐이 없었다.
원술은 한창 단장을 하고 있는 이의민 곁으로 와서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 이의민을 봤을 때, 죽인다며 길길이 날뛰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크하하! 자네가 이제야 결혼을 하는구나. 암! 사내라면 가정이 있어야지. 가정이 있어야 큰일도 하는 법이야.”
“저.... 사도 어른. 많은 분들이 보고 계시는데....”
고순은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원술을 말렸다. 고순도 이제 이의민이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원술은 이의민을 너무 편하게 대했다. 아무리 친우라고 해도 말이다.
원술은 고순이 왜 자신을 말리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그를 타박했다.
“고순! 네놈이 언제부터 감히 사도인 내 말을 자를 수 있었느냐?”
이의민은 기분 좋게 웃으며 원술과 고순 사이를 중재했다.
“하하!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지. 좋은 날 얼굴 붉힐 필요 없잖아. 더군다나 둘 다 이번에 익주와 양주에서 큰 공을 세워줬지 않나? 어찌 보면 둘 다 곧 공신이 될 처지인데 사이좋게 지내라고.”
“험험! 아랫것들 보는 앞에서 추태를 부렸군. 이해해주게. 이제 내일이면 이리 편하게 말도 못 할 거 아닌가. 아무튼 혼인 축하하네.”
역시 원술은 앞으로 지금까지와 같이 이의민에게 편하게 얘기를 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기도 하다.
얼마 후 낙양에서 가장 큰 대로 한 가운데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혼인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직접 축하 연사를 연설하면서 중원이, 천하가 통일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공표했다.
“오늘 같이 기쁜 날은 없을 것이오! 본관의 혼인식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더 이상 나라와 백성들을 위협하는 적들이 없소! 이 것을 기념해 쌀과 고기를 풀어 축하해주러 온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소!”
먼발치에서 구경하던 백성들 쪽에서 환호성이 일어났다.
“와아아아!! 승상!! 천세!! 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