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가장 높은 곳으로 (1)
조표에게 거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소제는 거의 실성한 듯 했다. 이의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황제인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정욱이 주준 일당의 배후를 알아내겠다고 국문장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을 연일 심문했다. 그로 인해 국문장에서는 연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비명소리 중에서는 소제의 어미인 하씨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제는 그 며칠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것 같았다. 매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더 서글픈 일은 황제가 이 모양인데 그 누구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소제의 곁에는 조표만이 있었지만, 그는 소제를 개나 닭 보듯 했다. 그저 때가 되면 식사나 챙겨올 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국문장에서 결과가 발표되면 언제든지 소제를 포박할 준비를 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며칠이나 국문이 계속되었지만 아직 소제에 대한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하씨와 나머지 일당이 끝까지 소제에 대한 충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욱이 일부러 숨기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둔한 소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남윤이... 그 머리 좋은 작자들이 모를 리가 없지.... 이미 배후가 나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나를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그래도 내가 황제라고 확실한 증좌가 나오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 피를 말려 죽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인가....?’
소제는 속으로 오만가지 추측을 다 해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언제가 됐든 결국 배후가 나라는 걸 밝힐 거다. 증좌가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시간문제일 뿐이지....’
소제의 생각대로 이제 그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정욱이 발표를 미루는 이유도 사실 별 게 아니다. 소제가 생각하는 두 가지 이유와도 거리가 멀고, 그저 이의민이 낙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처분을 미루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다른 인물도 아니고 명목상 이 나라의 지존인 황제의 처분인데, 그걸 하남윤인 정욱이 자신의 독단으로 처리 할 수는 없으니까.
소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장 어미인 하씨의 품으로 달려가서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달달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그러고 싶을 때 정작 그럴 수 없다. 그녀는 국문장에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어머니... 크흐흑....!!’
이전에는 설사 하씨가 없더라도 기댈 곳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왕윤도 있었고 주준이나 사손서, 노식 같은 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이제는 오롯이 홀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스스로 위로를 해야 하는 소제다.
소제는 속으로 끊임없이 고뇌와 번뇌를 반복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 소제가 아닐까 싶다.
그 긴 고민 끝에 소제의 불안하던 표정이 변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지은 소제는 곁에서 무심한 눈빛으로 서 있는 조표를 불렀다.
“조 장군.”
늘 소제를 깔보고 있던 조표도 순간 움찔했다. 평소에는 자신을 늘 두려운 눈으로 보던 이가 갑자기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니 절로 그리 될 수밖에 없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하남윤을 불러주시오.”
“예?”
생각지도 못한 명에 조표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소제가 자신보다 정욱을 훨씬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표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정욱은 소제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 않은가.
그런데 소제가 정욱을 먼저 찾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태껏 겁쟁이, 소심쟁이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한 소제가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죽을 때가 되어서 머리가 어찌 돼버렸나....?’
조표는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소제의 명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허수아비였고 폐위되기 직전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황제는 황제다. 게다가 갑자기 묘하게 변한 소제의 모습과 분위기 때문에 조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명을 거역하기 힘들었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하남윤을 불러오겠습니다.”
얼마 후 정욱이 소제를 찾아왔다. 정욱도 소제가 자신을 찾을 줄 예상 못한 것인지 얼떨떨한 표정이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승상은.... 이 옥좌를 보고 있는 거요?”
“.....”
평소답지 않은 강단 있는 말투에 더 놀란 정욱. 하지만 조표와는 달리 정욱은 침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소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다.
소제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소에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정욱 앞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나는... 솔직히 이 옥좌에 않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소. 어머니나 십상시나 대장군이었던 외숙이나 모두 내가 어릴 때부터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서 이 자리에 앉은 것뿐이오.”
“그 이야기를 신에게 하시는 이유가....?”
“나도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소. 하남윤은 모를 거요. 궁에서 나고 자란 나는 단 한 번도...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소. 모두 나와는 근본이 다른 아랫것들이라고 배웠고, 나는 배운 대로 해왔소. 그러니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친우를 만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소. 허나 나는 최근 깨달았소. 나는 그저 약하디약한 하나의 인간일 뿐이란 것을.... 나도 다른 나약한 인간들처럼 또래의 친구들도 사귀어보고 싶고, 그들과 술도 먹고 싶소.”
“폐하. 어찌 천자와 그들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천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결국 천한 처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존귀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누리시는 것이니 말씀하신 것들은 포기하는 것이지요.”
“내가 존귀하다라.... 정녕 내가 이런 꼴인데도 존귀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보시오?”
“당연하지요. 폐하께서 만약 폐하가 아니셨다면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저 국문장에 있을 겁니다. 아니. 그 전에 이름 모를 오지에서 병으로 죽거나 도적떼를 만나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욱의 말대로 소제가 지금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황제라는 위치 덕분이었다. 소제는 자신이 배부른 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렇구려.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감히 승상과 같은 영웅을 해할 꿈도 꾸지 못했을 터....”
정욱 앞에서 자기 입으로 솔직히 시인하는 소제. 이제 이런 건 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전혀 몰랐소. 이 자리가 그런 자리인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강요하는 대로만 살아왔는데 내 어찌 알겠소? 이번 거사도 마찬가지였소. 난 그저 어머니나 태부, 태보 등이 좋은 기회라고 얘기했고, 그에 따랐을 뿐이오. 난 한 번도 내 의지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소. 만약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때는 비루하지만 내 의지대로 살아보고 싶소. 하지만 한 편으론 두렵소. 승상이 날 살려두지 않을까 봐 말이오. 아니. 확실히 살려주지 않겠지요....”
정욱은 입을 다물었다. 일이 성사되면 가장 먼저 폐제를 처리해야 한다고 이의민에게 말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소제의 한탄이 이해가 갔다. 소제는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서 오른 것도 아니고, 옥좌에 오른 이후로도 무언가를 자신의 뜻대로 한 적은 없었다.
“하남윤... 날 살려주실 수 있겠소?”
정욱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사옵니다.”
**
낙양에 대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북의 유비와 원소를 정벌하고 돌아온 이의민의 군대였다.
낙양의 분위기가 흉흉한데도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이의민이 위급하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왔으니, 백성들의 환영은 더욱 뜨거웠다.
“와아아아아!”
“승상! 이의민! 천세! 천세!”
이의민은 손을 흔들어주면서 환영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그때 이의민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응? 자네는 낙수 아닌가?”
“스, 승상께서 어찌 소인의 이름을....?”
이의민에게 지목을 당한 낙수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승상인 이의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낙양의 민초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의민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말인가.
물론 이의민이 낙수를 비롯한 백성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일전에 낙수객잔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낙수객잔의 요리가 맛이 좋아 자주 찾았었다. 물론 이의민이 직접 간적은 없고 대부분 수하들이 거기서 사왔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낙수객잔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객잔 이름과 주인장 이름이 같으니 기억이 난 것뿐이다. 하지만 낙수는 감격해서 울음이 나올 거 같았다.
“쯧쯧! 한창 바쁜 시간 아닌가? 객잔주인이 장사를 해야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승상께서 역도들을 모두 물리치고 낙양에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그깟 장사 따위가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당장 내일 망한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리 생각해주니 참으로 고맙군. 앞으로 자네의 객잔을 더 많이 이용을 해야겠어.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조만간 내 직접 객잔에 갈 것이야. 하북에 가 있는 동안에도 자네의 소금구이가 계속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감사! 감사합니다!! 승상!!”
수많은 인파들이 모인 가운데 낙수객잔에 대한 홍보를 제대로 했다. 낙수는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몇 번이나 숙였다.
다른 백성들도 낙수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이의민을 찬양했다.
“승상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우리 같은 백성들을 사람 취급해주는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데 이름까지 기억하며 아는 체를 하신다니....”
“그러게. 이전에는 도위 정도만 되도 우리 같은 백성들은 같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 했는데 말이야.”
백성들의 마음에 모두 같은 생각이 깃들었다.
‘저런 분이 영원히 우리를 다스려야 하는데....’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의민은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에서 소제를 만나는 이의민. 그는 조금 의아했다. 겁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 줄 알았던 소제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승상. 어서 오시오. 고생이 많으셨소.”
“신에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실 텐데요....?”
이제야 약간 긴장하는 표정을 짓는 소제. 그러더니 천천히 얘기를 이어나갔다.
“승상이 생각하는 것이 다 맞소. 승상을 해하려고 군대를 보냈소.”
“어찌 신에게 그리하셨습니까...?”
“승상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오. 승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었소.”
“하지만 신은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소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즉, 짐의 목숨은 승상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
“그래서 설마 신에게 목숨을 구걸하실 생각이십니까?”
소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자신이 내뱉을 말을 역사가 어찌 기록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짐은 승상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려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