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천하통일 (2)
장강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원술 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승리 몇 번 뿐이었지만 계속해서 유리한 전황을 이끌어 가는 손견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저놈들은 대체 군선이 몇 척이란 말인가? 아무리 박살을 내도 끝도 없이 나온단 말이더냐?”
구휼을 핑계로 온 양홍이 온갖 훼방을 놓았음에도 손견은 전쟁준비를 나름 훌륭하게 해왔다. 손견은 원술과의 이전 전쟁에서 패퇴한 후 양주의 오지로 들어가서 5만이라는 병력을 긁어모았다. 단순히 5만이라는 머릿수만 억지로 채운 게 아니다. 군량과 군선, 군마, 병장기 등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들을 5만이라는 병력을 유지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생산해냈다.
양주의 중심부도 아닌 변방, 그것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숫자다. 손견이 이렇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주유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고, 손견 역시 그런 주유를 알아보고 그가 뜻을 펼칠 수 있게 무대를 마련해준 덕분이었다.
그렇게 기적에 가까운 성장을 보여준 손견의 세력. 하지만 역시 그 한계는 있었다. 손견과 상대하는 원술의 세력은 양주의 중심부와 예주에 걸친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의민의 땅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손견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크다. 그만큼 기본적인 생산력이 손견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원술이 가진 땅은 굳이 주유 같은 인재 없이 기본만 하는 위정자가 통치해도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뽑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술에게는 노숙이 있었다. 원래 삼국지에서는 손가를 따랐던 그는 본디 가진 재물이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그 많은 재물을 원술을 위해 썼으니 안 그래도 좋은 땅을 가진 원술의 세력은 더욱 번창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노숙은 내정 능력으로 보자면 주유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원술은 심지어 이의민으로부터 지원까지 받는 상태였다. 그러니 손견이 아무리 장강에서 자잘한 승리를 거둔다 해도 근본적인 물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전쟁이 지지부진 이어지고 있었다.
“주군! 기뻐하십시오! 이번 전투에서 주 도독이 적 군선 10척을 침몰시켰습니다. 아군 군선의 피해는 5척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당은 기쁜 마음으로 손견에게 승전보를 알리러 왔다. 하지만 손견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승전보를 듣고도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아! 적 군선은 10척을 침몰시켰는데 아군 군선은 5척이 피해를 보았다.... 분명 우리가 더 큰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쟁은 점점 불리해지는 건가.”
손견의 얘기는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원술군은 오늘 10척이 부서지더라도 내일 15척이 새로 건조되어 장강에 뜰 터였다. 하지만 손견군은 5척이 부서졌지만 내일 당장 새로 띄울 수 있는 군선은 4척 정도밖에 없다. 분명 손견군이 전투는 이겼는데 장강 위의 군선 숫자는 원술군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기본적인 생산력에서 차이가 나고 있으니, 시간은 원술군의 편인 셈이다.
지금 당장은 주유를 비롯한 손견군 장수들이 유리한 수전 경험과 전략을 발판 삼아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버티고 있지만, 한번이라도 패배를 경험하는 순간 손견군은 급격히 무너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서는 아니 된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은 손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독으로서 이번 수전의 총 지휘를 맡고 있는 주유가 손견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손견과 마찬가지로 이번 승전보에 따른 기쁨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초조한 표정이 만면에 가득했다.
“주군. 비록 이번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적들은 총 전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미미한 피해를 입었을 뿐입니다. 이 시간에도 적들의 전력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면 미래가 없습니다. 적들을 무너뜨릴 대승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찌 그런 대승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적들도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그래서 여태껏 그리 무리한 공세를 펼치지는 않았지 않나?”
“세작들에게 들어보니 원술이 상당히 조급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걸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밑에 노숙이란 자가 원술을 잘 제어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 노숙까지 속이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적들에게 거짓항복을 하겠습니다.”
주유의 얘기에 손견은 크게 놀랐다. 확실히 주유의 거짓항복이 먹히기만 한다면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를 만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너무 위험하다. 적들이 자네를 어찌 믿겠나? 적들이 자네의 거짓항복을 간파한다면 자네는 죽은 목숨이야.”
그 정도는 주유도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 위험 부담을 안지 않으면 딱히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적들이 확실히 속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런 방법이 어디.... 설마 고육지책....?”
손견은 주유의 계책을 듣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직접 매질을 당하고 그걸로 주군에게 앙심을 품고 전향하려고 한다면, 적들이 속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대신 계책을 실행하는 당사자인 주유는 매우 괴롭겠지만 말이다.
“크윽! 미안하네. 공근.”
“아닙니다. 주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버틸 수 있습니다.”
비장하게 각오를 다진 주유는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나를 매질하라!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말이다! 그래야 적들을 확실히 속일 수 있다!”
며칠 후, 손견군 진영에서 나룻배 하나가 원술군 쪽으로 떠내려 왔다.
“사도! 웬 고깃배 하나가 이 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깃배에는 피 떡이 된 사내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어찌나 끔찍한지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심지어는 드문드문 뼈까지 보일 정도다. 그 끔찍한 광경에 원술과 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자는 누구이길래....?”
그런데 그 사내의 얼굴을 보니 한눈에 알 것 같았다. 대충 봐도 눈에 확 띄는 미남자, 바로 주유였다.
“자네는 주유가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주유는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크으윽.... 손견... 그 짐승 같은 놈이 나를 이리 만들었습니다.”
“아니?!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원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까지 불리한 손견군이 계속 승리를 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 주유라는 걸 원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등공신을 어찌 이리 대한단 말인가?
주유는 그 이유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오군의 상황은 점점 암울해지고 있습니다. 군량은 떨어져 가고 있고, 물자는 바닥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진전이 없습니다. 이에 손견은 무척 다급해진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나 손견은 삼일 내로 사도의 군선들을 모두 가라앉히라는 말도 아니 되는 명을 내렸습니다. 전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현실적인 대답을 했을 뿐인데, 손견은 화를 참지 못하고 저를 이리 만든 것입니다.”
“허허!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자네의 공이거늘.... 그래서 투항이라도 하려는 건가?”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가 이런 매질이라면 나도 더 이상 그에게 바칠 충성은 없습니다.”
원술은 참으로 잘 됐다는 표정으로 반갑게 주유를 맞이했다. 주유라면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항상 탐이 나던 인재가 아닌가.
“허허! 그런 것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일세. 손견이 참으로 사람 볼 줄을 모르는군. 이런 인재를 제 발로 걷어차다니...”
그런데 노숙은 별로 반가운 표정이 아니다. 주유가 원술 밑으로 들어옴으로 인해 원술 휘하 최고참모라는 자신의 자리가 위협 받기 때문일까?
그러던 노숙은 불편한 표정을 금세 지우더니 주유에게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고생이 많으셨겠소. 공근. 지금이라도 이쪽으로 오게 되어서 다행이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저는 사도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노숙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주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마침 지금 막 손견군을 향해 출진할 생각이었소. 그럼 공근이 손견군의 약점을 알려주시오. 몸이 그리 좋지 않겠지만, 그대도 최대한 빨리 손견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소?”
“그런 것이라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손견군의 약점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선두에서 수로를 안내하겠습니다.”
주유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구나. 이리 먼저 길 안내를 요구하다니....’
주유는 원술의 수군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함정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만약 그때가 되면 자신은 분노한 원술에게 십중팔구 죽겠지만 상관없었다. 손견이 거기서 대승을 거둬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만 할 수 있으면 열 번이고 죽을 생각이다.
그렇게 주유는 원술, 노숙과 함께 선두의 대장선을 타고 이동했다.
“여기서 좀 더 동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주유가 이끄는 대로 원술군 군선들이 이동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유가 안내하는 대로 원술군 군선들이 이동하지 않았다. 당황한 주유는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억지로 움직여 노숙에게 다가갔다.
“자경.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오? 왜 내가 안내하는 대로 가지 않는 것이오?”
노숙은 비릿하게 웃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자! 공근. 보시오. 그대의 주군이 패망하는 모습을 말이오. 그대의 주군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진퇴양난이라니....?”
주유는 지금 노숙을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얘기한 진퇴양난이란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장강 위에서 전투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뒤로 퇴각을 하려면 언제든지 할 수는 있었다. 손견군 뒤로는 원술군의 군선들이 올 수 없지 않은가. 손견군 뒤쪽으로는 바다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노숙은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손견군 뒤를 가리켰다.
“저 보시오. 저 뒤로 군선들이 오지 않소?”
주유는 노숙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정말 손견군 뒤쪽의 바닷길로 다수의 군선들이 오고 있었다.
노숙이 일전에 원술에게 얘기했던 생각지도 못한 길이 바로 바닷길이었다.
“이럴 수가....”
주유는 식은땀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기습을 받는 형태니 여태껏 승승장구하던 손견군의 수군도 무너지기 직전이다.
‘큰일이다! 여기를 탈출해서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
“그, 그렇군요. 그럼 제게 잠시 작은 나룻배를 내어주시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손견의 패망을 지켜보고 싶군요.”
“허허! 그 아픈 몸으로 어디를 가시려고.... 그냥 여기서 술이나 자십시다. 여봐라! 술을 가져와라!”
노숙은 마치 주유를 절대 자신의 곁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겠다는 듯 술자리까지 마련했다. 주유는 다급한 마음에 품속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꺼냈다.
‘아니 되겠다. 일이 이리 됐으니 차라리 노숙을 인질로 삼아 주군께 다시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노숙이 술을 가져오라 명했던 군사들이 어느새 다가와 주유를 에워쌌다. 이미 그가 무슨 짓을 할 지 다 알고 있었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그렇게 포위당한 주유 앞으로 술상 하나가 놓여졌다. 노숙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술상 앞에 앉았다.
“공근. 표정이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크으윽!”
그렇게 얘기하는 도중 이미 손견군 군선들이 바닷길로 들어온 이의민군 군선들의 기습을 받고 하나 둘씩 불타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미 돌아가서 손견에게 알리기에도 너무 늦었다.
주유가 절망하고 있을 때 노숙은 술상 위에 있는 잔 두 개에 술을 따랐다. 그 두 개의 잔은 특이하게도 하나는 자주색이고 하나는 푸른색이었다.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이대로 승상을 따르실 거면 자주색 잔을 드시고 손견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면 푸른색 잔을 드십시오.”
“언제부터 아셨소? 엄살을 부리지도 않았는데....”
“그 매질이야 진짜였겠지요. 하지만 저는 손견, 그리고 공근, 그대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손견이 고작 그런 일로 매질을 할 사람도 아니고, 설사 매질을 당했다고 해서 그대가 바로 배신을 할 사람도 아니지요.”
“그렇군. 조금 더 신중을 가했어야 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내가 그 부분을 놓쳤구려.”
주유는 미련 없이 푸른색 잔을 들어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