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71화 (171/175)

171. 천하통일 (1)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거대하고 화려한 궁. 그곳에는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이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 수하들로 보이는 많은 이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비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인의 정체는 바로 변방의 익주 땅에서 자사의 관직을 가진 인물이자 거의 왕이나 다름없이 군림하고 있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부복한 이들은 당연하게도 유언의 수하들이다.

유언은 이의민 천하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제후였다. 지금 당장으로 보면 손견과 함께 거의 유이한 제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력도 곧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이의민이 직접 본대를 끌고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유언의 수하들은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 모두 고개를 땅바닥에 쳐 박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크흐흑! 주군.... 송구합니다.... 더 이상은 무리일 듯싶습니다....”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을 것 같은 유언은 수하들의 얘기에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닥쳐라!!”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온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내가... 나마저 쓰러진다면... 이 나라,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던 한나라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것이다. 절대! 절대 쓰러질 수 없다!”

비장한 듯 결의를 다지는 유언. 그의 모습은 마치 나라의 마지막 남은 충신 같지만, 그 역시 제위를 노리고 변방에서 힘을 키우던 야심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의를 다지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유언에게는 전혀 남은 힘이 없었다.

“자사님! 적들이 몰려왔습니다! 일전 싸움에서 무너진 동쪽 성벽 쪽으로 끊임없이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유언의 마지막 보루인 이곳 성도마저 사실상 완전히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언도 사실 이리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떼를 쓰듯 억지로 버티고 버텼다. 그 결과는 아군의 처참한 패배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언이 있는 궁 안으로도 이의민군이 몰려왔다. 이번 전쟁의 승패를 유언에게 확실히 알려주려는 듯했다.

“저기 유언이 있다! 잡아라!”

“유언을 가장 먼저 잡는 자에게는 큰 포상이 내려질 것이다!”

유언 앞에서 엎드려 울부짖던 수하들도 그제야 일어섰다. 이미 패망한 것이 확실해보였지만 자신의 주군이었던 자가 일반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막아라! 주군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해라!”

“주군께 가려면 나를 먼저 죽이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유언의 수하들을 향해 이의민군은 자비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런 군사들 뒤로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이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렇다고 그들이 뒤에서 구경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의민처럼 가장 선두에서 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오는데 그들도 적지 않은 싸움을 했는지 무기와 갑옷에 피가 제법 묻어 있다. 물론 그 피들은 자신들의 피가 아니다. 전부 익주 군사들의 피다.

이곳 이의민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일전에 이의민에 의해 익주정벌 사령관으로 임명된 고순이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참모 역할을 맡고 있는 가후가 있다.

“이리도 쉬이 익주를 완전히 점령할 줄은.... 정말 대단하오. 문화.”

고순의 감탄에 옆에 있던 가후가 슬쩍 웃었다.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오늘 중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장군께서는 아직도 절 믿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일전에는 내가 잘못했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오. 뭐, 성도를 접수하고 유언까지 잡은 마당에 문화의 조언을 들을 일이 당분간 없긴 하겠지만 말이오.”

서로 농담조로 얘기를 하는 고순과 가후. 하지만 고순이 가후를 신뢰한다는 얘기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내다. 낙양의 공달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 자가 이유 대신 동탁의 총애를 받았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순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익주를 점령하기까지 있었던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사실 고순도 처음에는 가후에게 별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지방을 전전하고 있다면 그 능력은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순의 그런 고정관념이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익주정벌 최고의 난관인 검각 앞에서의 일이다.

고순은 말로만 듣던 천혜의 요새인 검각 앞에 오자 익주 정벌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검각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요새가 특별히 단단한 것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용맹한 것도, 장수나 참모들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검각 주변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허어! 정말로 천혜의 요새로다. 저걸 사람의 힘으로 어찌 뚫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가후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항복한 장로를 통해 지금 저곳을 지키는 장수들과 참모들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고순은 처음부터 가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퉁명스럽게 그의 얘기를 받아쳤다.

“지금 저곳을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오? 저 가파른 절벽과 좁은 길목을 보시오. 저 길은 사람이 아니라 닭이 지키고 있어도 결코 쉽게 뚫지 못할 거요.”

“아닙니다. 결국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까? 한두 가지 계책만 있다면 아주 쉽게 뚫을 것입니다.”

가후는 고순의 푸대접에 오히려 더 강하게 얘기했다.

“뭐요? 전시에는 허언이 없소. 군사는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으시오?”

“좋습니다. 만약 이틀 이내 저 곳을 함락시키지 못 한다면 제 목을 내어 놓지요.”

“목을 내놓겠다라... 지금 괜히 자존심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오? 난 군법은 엄히 적용하는 사람이오. 그것이 군사라도 예외는 없소.”

“대신 그 과정에서 제가 낸 계책은 무조건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알겠소. 목까지 걸었는데 기꺼이 그리 하도록 하지.”

그렇게 좋지 않은 시작을 했던 고순과 가후다.

원래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지만 가후는 아니었다.

가후는 한중에서 굴복시킨 장로를 이용했다. 가후는 소수의 별동대를 꾸리고 장로의 사신단인 척 꾸며 유언에게 동맹을 제안한답시고 검각에 접근했다.

그 별동대에는 고순과 악진, 그리고 서량의 용사 방덕을 포함한 정예 중 정예를 선별했다. 그 정예 별동대로 하여금 검각의 뒤를 치겠다는 속셈이다. 고순은 가후의 계책을 무조건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니, 이 계책 역시 수용했다.

고순은 그때까지도 가후의 계책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유언이 과연 우리를 정말 장로의 사신단이라고 믿겠는가? 우리가 장로를 무너뜨렸다는 소문이 이미 낙양까지 퍼졌을 터인데....’

하지만 고순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검각은 천혜의 요새였고, 전국 어디에도 그보다 방어가 좋은 곳은 없지만 그만큼 매우 폐쇄적이었다. 검각을 대놓고 걸어 잠근다면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자연히 장로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유 자사께서 동맹 요청을 수락하시겠다고 합니다.”

‘뭐야? 이게 진짜 통한다고....?’

가후의 예상대로 별동대는 바로 검각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다. 유언과 그 수하들은 검각의 지형만 믿고 뛰어난 장수들을 검각에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니 검각 안에서 기습한 고순과 악진, 방덕 등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 정말로 가후의 말대로 이틀 만에 검각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순도 가후를 신뢰했고, 이후의 전투마다 가후의 조언을 들었다. 가후는 그때마다 시기적절한 계책을 내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묘안을 떠올렸다. 그렇게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성도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 익주정벌군이다.

이윽고 군사들이 유언과 그 수하들을 포박하여 고순 앞에 끌고 왔다.

“흐음... 유언의 수하였던 자들 중 아군이 될 만한 자들은 회유하고 나머지는 처형하라. 그리고 유언과 그 아들인 유장은....”

고순은 잠깐 고민했다. 이의민의 결정 없이 자신이 마음대로 이 둘을 처리해도 되는지 걱정스러웠다.

“역시 이들은 낙양으로 압송해야....”

이때 가후가 나섰다.

“장군. 둘을 그냥 처형하시지요.”

“주군의 명 없이 그래도 되겠소?”

“이제 이 나라는 본격적으로 주군의 나라가 될 겁니다. 그러니 유씨인 이 둘을 처형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유언과 유장을 처형하라!”

이제는 가후의 말을 크게 신뢰하는 고순이다. 그의 조언을 들은 후 망설이지 않고 유언과 유장을 처형했다.

그렇게 익주까지 이의민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이의민에 대항하는 남은 세력은 단 하나다.

**

그 남은 단 하나의 세력도 양주를 거점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도 역시 이의민은 없었다.

양주의 손견과 맞서 싸우고 있는 원술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투덜댔다.

“이런 망할 놈들! 친우의 혼인식이 코앞이다! 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냐?!”

이곳은 익주와는 달리 이의민 쪽 군사들이 꽤나 고전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이의민군이 아니고 원술의 군사들이다.

“사도 어른. 일전에 경험해보셨겠지만, 적들의 수군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강 위에서 싸우는 것은 우리가 명백히 불리합니다. 적들을 육지로 유인해야....”

하지만 이전 전투와는 달리 그렇게 육지로 유인하기도 쉽지 않다. 예전에는 손견이 반 이의민 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강을 넘어 반드시 육지 쪽으로 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견이 강을 끼고 수비만 하면 되는 입장이다.

이제 손견은 굳이 육지로 갈 필요가 없으니 전투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에잇! 못난 놈들! 양홍이 이미 적들의 군선 상당수를 제거했다고 들었는데....”

원술이 초조해하는 가운데 노숙이 그를 안심시켰다.

“주군. 적들은 지금 이 장강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니, 쉽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허나 이 전투만 넘으면 그때부터는 이 전쟁은 급격히 우리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끄응! 자경. 나도 아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말이지.... 지금 당장의 이 전투가 너무 어려워 보이니 문제야. 이 전투를 어찌 이길 수 있겠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십시오. 하남윤이 원군을 보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의 원군이 문제야! 중덕이 원군을 보내준다고 한지가 며칠이나 지났어. 그 원군이란 놈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길래 코빼기도 아니 보이는 건가?”

원술이 투덜거릴 만했다. 이미 유표의 군사들은 진작 도착해서 원술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정욱이 보내준다던 원군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거리상으로 치면 이곳에서 서주나 형주나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노숙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원군이 아직 오지 않는다라... 하남윤이 보낸다는 원군이 서주의 군사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 서주군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어디에서 원군을 보낸단 말인가? 왜 가까운 군사들을 보내지 아니하고....?”

“하남윤은 손견이 장강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군사들이 수전에 얼마나 더 뛰어난지도 말이지요. 만약 일반적인 군사들을 원군으로 보냈다면 머릿수가 좀 더 늘어난다고 해서 이 전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길로 뒤를 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과연 노숙이 말하는 생각지도 못한 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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