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70화 (170/175)

170. 기회인줄 알았건만 (2)

이의민은 주준의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황제의 명을 따를지, 아니면 내가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볼지 말이다!”

“그만! 저 역도의 말을 더 이상 듣지 마라!”

주준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했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는 발악이었다. 주준의 군사들은 여태껏 자신을 이끌었던 주준을 향해 욕을 했다.

“우리가 듣지 말아야 하는 말은 바로 태보, 당신의 말이다!”

“그래! 승상이 어째서 역도인가? 역도는 바로 태보다!”

그리고는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이의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업성의 백성들도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군사들이 저리 소란이지?”

“황제가 승상을 죽이려고 했대.”

“뭐?! 아니? 승상 같은 훌륭한 분을 어찌 죽이려 한단 말인가? 아무리 황제라도 그렇지!”

“황제면 다인가? 황제랍시고 해준 게 뭐 있다고?!”

노식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반응을 보면서 깨달았다. 자신들이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이럴 수가.... 그랬구나! 이의민이 폐하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명분.... 그것을 얻기 위해 이런 모략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완벽히 걸려들었구나!’

이의민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준과 사손서, 노식을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군사들, 주준이 데려온 군사들, 백성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외쳤다.

“난 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증인이다. 그런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려 했다면 그 누구도 용서치 못한다. 나 혼자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모두들 출병 준비를 하라! 우리는 낙양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발칙한 생각을 한 이 늙은이들의 목을 베어라!”

“예! 승상!”

이의민의 군사들과 주준의 군사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동시에 외쳤다. 그들의 외침 소리가 업성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잠시 후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닫혔던 업성의 성문이 열렸다. 거기서 나온 이의민군은 성난 기세로 낙양으로 향했다.

**

밤이 깊은 시각임에도 소제 유변은 잠에 들지 못하고 서성였다. 일단 하씨와 주준 등의 얘기를 듣고 거사를 벌이긴 했지만, 영 불안했다. 하씨와 주준은 성공을 확신했지만 소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소제가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할 줄 알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랫동안 이의민의 공포에 짓눌려왔기에 본능적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소제는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환관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지금쯤이면 무슨 소식이라도 들려와야할 것 아닌가?”

“폐, 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이만 침수에 드시지요. 내일 기침하실 때쯤이면 소식이 당도할 것이옵니다.”

“이런 상황에 어찌 잠이 온단 말이더냐?”

그 때 불안해하던 황제의 귀가 번쩍 뜨였다.

황제의 침소 밖이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이 야심한 시간에 황제의 침소 근처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소란을 일으킨 자를 잡아 당장 국문에 처할 일이었지만 소제는 오히려 소란을 반겼다.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소란이 일어난다함은 필시 하북에서 전령이 온 것이리라.

“드디어 하북에서 전령이 온 모양이구나. 네가 어서 나가 맞이해라.”

“예. 폐하.”

하지만 환관이 침소 밖을 나서기도 전에 먼저 침소 문이 벌컥 열렸다. 소제는 그걸 보며 인상을 팍 굳혔다. 아무리 그가 하북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어도 이건 너무 선을 넘는 행위였다. 일개 전령 따위가 황제의 침소 문을 허락도 없이 벌컥 열다니, 당장 그 자리에서 참수를 해도 모자를 행동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짐짓 분노한 표정으로 전령에게 호통이라도 치려했던 소제. 들어온 자를 보자마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침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자는 전령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명도 아니다. 갑주를 입은 무장한 군사들 다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조표가 있다.

원래 도겸의 신하였지만, 그가 죽은 이후 바로 이의민으로 갈아탄 인물이다. 그걸 소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표에게 감히 자신의 침소에서 소란을 피운 죄를 물을 수가 없다. 오히려 조표가 무슨 짓을 할지 눈치만 살필 뿐이다.

“조, 조 장군. 대체 무슨 일이오?”

황제 앞에서는 당연히 무기를 가지고 올 수 없다. 하지만 조표는 당당하게 검을 차고 있었고, 심지어 황제를 대면했는데도 무릎조차 꿇지 않았다.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서 소제를 내려다보며 얘기하는 조표.

“폐하. 급보입니다. 주준이 역심을 품고 승상을 공격하려 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폐하의 주변에 그들과 함께 공모하여 역모를 꾀한 이들이 많습니다. 바로 저 환관 같은 놈들입니다. 저 내시 놈을 당장 끌어내라!”

“폐, 폐하! 사, 살려주시옵소서!”

소제는 가장 아끼는 환관이 끌려가는데도 아무런 제지를 못했다.

“저, 정말 주준 장군이 그랬다는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다른 역도들이 황궁에 더 있을 수도 있으니 승상이 오실 동안 소장이 폐하를 보호하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승상은 아직 살아 있단 말이오?”

“안심하옵소서. 승상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소제는 거사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순간 현기증이 나는 걸 느꼈다. 그래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조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됐지만 자신만은 살고 싶은 소제다.

“그럼 혹시... 역모에 가담한 이가 누구누구인지 정확히 아시오? 짐에게도 알려줄 수 있소?”

“주준과 사손서, 그리고 노식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역도들의 머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의 배후에 더 윗선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조표의 얘기에 소제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가 얘기하는 윗선이 대체 누구겠는가? 아무리 소제가 우둔하다고해도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게다가 조표의 말 자체는 공손했지만, 그 어투는 마치 소제에게 따지고 드는 듯했다.

소제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내고 간신히 물었다.

“그, 그 윗선이란 게 대체 누구요....?”

“거기까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배후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하남윤께서 직접 나섰으니 말입니다. 하남윤께서는 이번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조사한 후 그게 누구든 직위고하를 불문하고 처벌할 것이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누구든 직위고하를 불문하고 처벌한다는 말 역시 황제를 직접적으로 저격하는 뜻이다.

소제는 울음을 참고 참았지만, 결국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조표는 그런 소제를 보며 차갑게 비웃을 뿐이다.

그나마 소제는 아직까진 황제였기에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소제의 어미인 하씨가 있는 궁 쪽은 난리도 아니다.

“놓아라! 이놈들아! 감히 네놈들 따위가.... 꺄아악!”

마선식이 하씨를 거칠게 잡아끌고 있었다. 그래도 하씨는 현 황제의 어미다. 하지만 마선식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하씨를 잡아당겼다.

“이 년이 어디서 반항을 하는 것이냐? 요새 좀 풀어줬더니 다시 태후라도 된 것 같으냐? 천한 궁인주제에! 몇 대 맞기 전에 조용히 끌려와라.”

“나,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이냐?!”

“당연히 국문장이지. 네년이 태보, 태부 등과 짜고 승상을 해하려 했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뭐, 뭣이....? 그럼 하북의 거사가 결국 실패를....?”

“흥! 드디어 실토를 하는 구나. 하지만 여기서 실토해봤자 소용없다. 하남윤께서 네년을 국문장에서 직접 심문하시겠다고 했다.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마선식은 그동안 이의민 밑에서 졸병으로 생활하며 쌓였던 불만을 하씨에게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그렇게 하씨를 국문장으로 끌고 간 마선식. 국문장에는 이미 정욱을 비롯한 이의민의 사람들 다수가 앉아 있었다.

하씨는 마지막 발악으로 주준 등과의 관계를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하남윤! 내 비록 궁인이라지만 황상의 생모요. 내가 태보, 태부 등과 공모를 했다는 증좌도 없이 어찌 나를 이리 핍박하는 것이오?”

하씨가 모른 척 하니 정욱이 씩 웃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궁녀 한 명을 앞으로 데려왔다.

“증좌가 없다라.... 이 아이를 보고도 계속 그리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 궁녀는 바로 춘월이었다. 하씨가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녔다던, 유일하게 믿는 시종 말이다.

“추, 춘월아! 네가 어찌....?”

하씨는 춘월을 보며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시오? 우린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소. 괜한 거짓말로 서로 피곤해지지 맙시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하지.”

이윽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국문장에서 퍼져 나왔다. 황궁의 모든 이들은 그 끔찍한 소리에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

낙양에서 하급 관직에 있는 선비 구손은 황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흉흉한 황궁 분위기를 느꼈다.

“이보게. 누가 죽기라도 했는가? 분위기가 왜 이런 것인가?”

“쯧쯧! 말도 말게. 누가 승상을 해하려고 한 모양일세.”

구손은 동료가 얘기하는 자가 당연히 원소나 공손찬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최근 그와의 전쟁에서 승상이 패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은가.

“허! 기어코 원소와 공손찬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닐세. 승상을 해하려 했던 자들은 삼사였던 주준과 그 당여들이라고 하네.”

“뭣이? 그, 그게 사실인가?”

“얼마 전에 승상을 구원하겠다고 태보와 태부가 군사들을 끌고 하북으로 떠났지 않은가? 그게 사실 구원군이 아니라 승상을 죽이기 위해 떠나는 군대였다더군.”

“이런 미친...! 잠깐! 그렇다는 것은....?! 허어억!!”

동료의 얘기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깨달은 구손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숨은 뜻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주준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그럼 결국 이 일의 배후에는 황제 폐하가 있다는 것 아닌가...?’

“허어...! 황궁에 피바람이 몰려오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자신은 이제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특히 이런 시기에 말단 관리들은 줄을 잘 서야하지 않은가. 구손의 동료 역시 그리 생각하는지 은근슬쩍 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라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르겠군.... 자네는 어쩔 셈인가?”

그는 이미 어느 정도 계산을 마친 듯했다. 하지만 구손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승상 이의민은 따르고 싶지만, 그가 황제가 된다면 그를 따르기가 조금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충과 효는 가장 큰 가치라고 교육을 받았던 구손이었다. 이게 하루아침에 바뀌기란 쉽지 않았다.

“모르겠네. 일단은 승상께서 낙양에 다시 돌아오신다면 어찌 하실지.... 그것을 보고 결정해보려 하네.”

“아직 자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군. 자네뿐만 아니라 다른 선비들도 비슷한 것 같고... 한데 잘 생각해보게. 당장 우리의 안위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한 것이 무엇일지 말이야.”

구손이나 그의 동료나 이의민의 혁명이 성공할지의 여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이의민의 역성혁명이 성공할 것이라 믿고, 그 이후의 거취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의민의 세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의 지지와 열망을 등에 업고 있으니 혁명이 절대 실패할 리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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