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기회인줄 알았건만 (1)
며칠 후 이의민은 다시 낙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병주로 갔던 서황도 어느새 병주 순회를 마치고 업성으로 왔다.
“주군의 명을 받들어 병주를 안정화시키고 왔습니다. 이제 병주의 태수와 현령들은 모두 주군의 사람으로 채웠고, 변방에서 날뛰던 흉노들과 총 다섯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흉노들이 아주 크게 혼쭐이 난 터라 당분간 국경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군 사상자는 500여명이었습니다.”
확실히 대단한 성과였다. 이의민은 기분 좋게 웃으며 서황의 공을 칭찬했다.
“역시 공명이군. 아주 잘했어. 기대 이상이야. 이제 서황도 왔으니 슬슬 돌아가야 되겠군.”
군사들도 모두 적당한 휴식을 취했으니, 더 이상 이곳 업에 있을 필요가 없다. 승상으로서 낙양을 오래 비워둘 수도 없고 말이다. 결정적으로 이제 낙양에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하나 생겼지 않은가.
“정동장군의 군사들은 이제 막 도착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휴식을 줄 겸 며칠 더 쉬었다 가시지요.”
“아니야. 별동대 군사들이 피로하다면, 그들만 며칠 후에 복귀하라고 하면 되지 않나? 난 이만 먼저 가야겠어. 너무 오랫동안 못 봐서 그리운 얼굴도 있고...”
순유는 이의민이 얘기하는 그리운 얼굴이 누구를 뜻하는지 눈치 채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후훗! 그분이 많이 보고 싶으신가봅니다. 주군께서 이리 서두르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에이! 뭘 안다고 그래? 공달도 매일 책상머리에 앉아서 글만 읽지 말고 밖에 나가서 다른 여러 처자들 좀 만나봐. 그래야 조강지처도 더 만족을 시키는 법이야.”
“아니? 여인이라고는 초선 아가씨 밖에 못 만나보신 주군께서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흠! 흠! 그거야... 아! 그런 게 있어!”
이의민이 순유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업성을 떠나려고 하는데 낙양에서 온 전령이 다급히 뛰어왔다.
“승상! 승상! 하남윤이 승상께 올리는 서신입니다. 그리고 하남윤께서 이런 얘기를 추가하셨습니다. 혹시 승상께서 낙양으로 오시는 중이라면 다시 업성으로 가시기를 요청 드린다고 했습니다.”
정욱이 서신을 보내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니, 별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업성에 남아달라는 요청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응? 중덕이 무슨 일이지? 서신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려나?”
하지만 순유는 정욱의 서신을 보지 않고도 그런 요청을 한 이유를 알았다.
“하북이 정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하남윤이 결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나라의 기둥을 뒤흔들기 위한 작업을 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라의 기둥을 뒤흔드는 작업?”
성질 급한 이의민은 순유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그냥 정욱의 서신을 읽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나서야 정욱의 계획을 모두 알게 됐다.
“흐음.... 공달. 자네 말대로야. 황제와 황제를 따르는 남은 이들을 전부 솎아내기 위해 계책을 낸 것이로군.”
지금 당장 낙양으로 가서 초선을 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아쉽지만 이대로 낙양으로 가면 아니 되겠군. 이곳 업성에서 마지막 대어를 낚기 위한 낚시를 해야겠어.”
“예.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이제 정욱의 계획대로만 하면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옥좌를 넘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난이도로만 따진다면 최근 끝난 하북 전쟁과 비교도 안 되게 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태껏 해왔던 그 어떤 전쟁보다 긴장됐다. 아직까지 자신이 해보지 못한 일이다. 절대지존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아무리 천하의 이의민이라도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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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남쪽에서 업성으로 대군이 이동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주준이 이끄는 황군, 명목상 이의민군을 구원하러온 원군이었다.
주준은 낙양을 떠난 이후부터 늘 긴장했다. 이의민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대는 이의민이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렇게 업성 근처로 오니 여기저기서 나는 시체 썩은 내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주준의 신경을 자극했다.
“흠. 어찌하여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시체 썩은 내보다 주준을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업성 주변의 고요였다. 시체 썩은 내뿐만 아니라 아직 씻겨나가지 못한 피 웅덩이들과 피비린내는 이 곳에서 얼마나 큰 싸움이 있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주변은 고요했다.
“이들은 이의민의 군사들이 흘린 피 인가? 그런데 대체 왜 이의민군이든 하북군이든 군사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주준이 계속 불안해하자 사손서가 달랬다.
“이의민이 여기서 크게 대패를 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야겠지요. 제발 내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의민이 어찌 되었는지, 정말 낙양에 들려온 소식처럼 패퇴했는지 확인을 하려면 업성에 가봐야 했다.
주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업성 바로 앞까지 군사를 이끌고 갔다. 업성 성벽 위에 빼곡하게 들어 찬 군사들이 주준의 눈에도 보였다.
그때 업성 성루에 있는, 아직 앳되어 보이는 장수 하나가 주준과 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멈춰라!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나는 태보 주준이다! 네 소속과 직위는 무엇인가?!”
주준은 상대를 향해 당당하게 외쳤지만,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만약 예상과 달리 업성에 빼곡히 들어찬 군사들이 이의민군이라면 황실을 위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제발.... 제발...!’
주준은 속으로 저들이 이의민군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성루에 있던 앳된 장수의 소개가 이어지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태보 어르신이셨군요. 소인은 공손찬의 장자 공손속이라고 합니다.”
‘공손찬의 장자가 여기 있다? 그럼 이곳에 있는 군사들은 모두 하북 연합군이란 뜻이렷다? 이의민이 패퇴한 게 정녕 사실이구나! 되었다!’
주준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역적 이의민을 몰아내고자 했던 희망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공손찬과 안면이 있는 노식에게 물었다. 노식도 주준과 같이 낙양에서 산송장 생활을 하며 황실이 다시 부흥하기만 바라는 충신이다. 그래서 이곳까지 주준을 따라온 것이고.
“자간 선생. 저 자가 정말 공손찬의 장자 공손속이 맞소?”
“흠... 확실합니다. 속이가 어릴 때보고 그 후로는 못 봤지만, 저 자는 확실히 공손속이 맞습니다. 어릴 때의 모습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속아! 난 네 아비의 스승인 자간이다! 날 기억하느냐?”
노식은 공손찬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의 장자인 공손속의 얼굴도 알고 있다. 비록 어릴 때였긴 하지만 아주 많이 변하지는 않았으니, 공손속인지 아닌지 여부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공손속도 노식을 기억하는 듯 기쁜 음성으로 외쳤다.
“하하! 자간 선생님께서도 오셨군요. 아버지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어서 성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지 않고!”
곧 업성의 성문이 열렸다. 주준 등은 흐뭇한 표정으로 열리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하북군이 승리한 것이 정말이군요.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들어가는 주준과 그의 군사들이다.
주준은 들어가자마자 공손속에게 물었다.
하북군이 승리했다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의민의 죽음 아닌가.
“공손속.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의민과 그 군사들은 어찌 됐는가?”
“보시는 대로 입니다. 역도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아직 하북에 그 잔당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입니다.”
주준은 공손속의 보고를 들으며 그를 유심히 지켜봤다. 주준은 노식과는 달리 공손속과 친분도 없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지금 당장은 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공손찬도 황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제후가 아닌가. 그래서 공손속을 눈 여겨 보았지만, 그가 얘기하는 것에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럼 공손속이 연기를 잘 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공손속이 주준을 잘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주준의 질문에 공손속은 그저 역도들을 모두 처리했다고 답했다. 공손속은 이제 이의민의 수하가 되었으니, 그에게 있어서 역도는 원소와 유비였다. 그러니 거짓말을 한 게 아닌 셈이다.
그걸 전혀 모르는 주준은 공손속이 얘기하는 역도가 당연히 이의민이라 생각하고 있다.
“오오! 열조들께서 아직 한을 보살펴주시고 있구나. 그래! 역적들을 모두 처리했다고? 이의민 역시 당연히 처리했겠지? 그는 어찌 되었는가? 목을 베었는가?”
주준의 연속적인 질문에 공손속은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역적의 목은 확실히 베었습니다만....”
“그렇군! 어서! 어서 이의민의 목을 보여주게!”
주준의 요구에 공손속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공손속의 달라진 태도에 주준은 언짢아졌다. 그래도 공손속이 이러는 건 단순히 논공행상 때문인 줄 알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달랬다.
“뭣이? 내가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고 무시하는 겐가? 엄연히 황명을 받고 온 사람일세. 어서 폐하께 이의민의 목을 가져가야하네. 혹시 역적 이의민을 죽인 공을 내가 가로챌까봐서 그런가? 그건 걱정 말게. 자네들의 공을 폐하께 낱낱이 고할 걸세.”
“그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 계신 분의 목을 어떻게 보여드립니까?”
“뭐, 뭣이?!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공손속의 얘기에 모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표정이다. 모두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성루 위에서 성난 듯한, 그러면서도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목소리였다.
“호오! 그러니까 황제가 나를 죽이라는 황명을 내렸다 이 말이지?”
주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절대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목소리의 주인공이 성루 위에서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심하게 다칠 만한 높이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주준 등이 몰려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깨에는 대부를 걸치고.
“어, 어째서 이의민 네놈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그래도 신하로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하니 날 죽이라는 명을 내릴 줄은 몰랐어. 그런데 그 명이 제 놈 명줄을 끊게 생겼구먼.”
그제야 주준 등은 상황을 파악했다. 공손속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는 군사들 뒤로 쏙 빠진 상태다.
사손서는 이를 악물며 이의민을 다그쳤다.
“스, 승상. 그대가 방금 했던 얘기는 명백한 역모 행위로서....”
하지만 이의민의 일갈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닥쳐라!!”
이의민이 내뿜는 기세에 사손서는 물론이고 주준, 노식 역시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럼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에게 얌전히 목을 내밀고 있으란 말이더냐?! 내가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는 그가 자격이 있든 없든 그를 황제로 떠받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나라, 그의 백성들을 위해 모든 헌신을 다 했다. 이런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이의민의 기세에 얼어붙었던 주준은 용기를 쥐어짜내 데리고 온 군사들에게 외쳤다. 어차피 죽음도 각오했지 않았던가.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역도 놈을 죽여라!”
하지만 주준 등은 자신들이 데려온 군사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승상을 죽인다니?”
“우리는 승상을 돕기 위해 모병에 응한 사람들이잖아?”
“방금 승상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폐하께서 승상을 돕는다고 해놓고 사실은 승상을 죽이기 위해 우릴 보낸 거다! 우린 폐하께 속은 거야!”
“아니?! 황상께서는 대체 왜 승상을 죽이시려는 거지? 나는 못해! 우리 집은 승상이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거야. 승상이 위험하다 길래 뒤도 안 보고 지원한 거라고.”
주준의 명을 따르려는 군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