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하늘이 준 단 한번의 기회 (3)
원소와 유비는 상대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들도 곽가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다.
“곽가?! 곽가라니?! 네놈이 진정 곽가란 말이냐? 그럼 어찌 네놈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냐?”
원소와 유비는 심배 등이 보낸 보고를 통해 곽가가 평원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곽가가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곽가는 영문을 몰라 하는 원소와 유비를 비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한 사내를 가리켰다.
“그건 여기 공손속에게 물어보지 그래.”
“허억! 고, 공손속...!”
유비의 안색이 파래졌다. 곽가가 갑자기 계성에 나타난 것도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 도망쳤던 공손속까지 나타났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유비다.
공손속은 유비를 보며 잔뜩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광록훈! 저 자가 악적 유비입니다! 혹시 저 악적을 처단할 기회를 제게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공손속은 이미 유비와 철천지원수가 됐다. 하지만 유비에 대한 복수를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는 건 포기하고 있었다.
유비는 업에서 이의민에게 죽임을 당할 걸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에 그 유비가 등장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할 기회가 생겼으니 오히려 기쁠 지경이다.
“알겠소. 그럼 그대의 손으로 직접 유비를 처단하시오.”
곽가는 공손속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곽가 입장에서는 어차피 유비를 누가 죽이든 상관없다. 유비를 확실히 죽이기만 하면 된다.
유비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속에게 사정했다.
“속아.... 이 숙부를 잊은 것이냐? 어찌 저들과 함께 나를 핍박하려 드느냐?”
끝까지 가증스러운 유비의 모습에 공손속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흥! 이제 가면은 벗지 그러느냐. 이미 서막이 모든 것을 밝혔다.”
공손속의 조롱 섞인 얘기에 유비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곽가의 군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평원에 있던 유주군까지 함께였다. 유비는 그것을 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렸다. 지금 이곳에서 곽가와 함께 있는 유주군은 엄밀히 얘기하면 유비의 군사들 아닌가. 정확하게는 공손찬의 군사들을 그대로 가로챈 것이지만.
어쨌든 유비는 유주군을 설득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유비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유주군은 모두 유비의 뜻에 반하는 군사들이었다. 유주를 손쉽게 넣기 위해 그리 안배를 한 것이지만, 그것이 결국 유비의 목을 조이는 결과가 됐다.
유비는 공손속만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기며 그에게 매달렸다.
“속아!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이 숙부는....”
하지만 이미 공손속은 유비의 검은 속셈을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비인 공손찬을 죽인 것이 유비라고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유비의 사탕발림에 넘어갈 리 없다.
“닥쳐라! 전예장군 무엇하는가?! 저 놈의 목을 가져와라!”
“명 받들겠습니다! 전 주군이셨던 공손 자사님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전예는 도를 들어 단번에 유비의 목을 쳤다. 허무하게 떨어지는 유비의 목.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엿보던 유비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원소는 땅에 떨어진 유비의 목을 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비와 함께 도모했던 마지막 계획이 모두 허사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죽여라....”
원소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고, 얼마 후 그의 목도 유비의 머리 옆에 나란히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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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업성으로 대규모의 군대가 입성했다. 유주를 정리하고 온 곽가의 군대였다.
“봉효! 그리고 태사자, 우금, 관해... 다들 잘 있었나? 얼굴을 잊어 먹겠어.”
“하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주군. 주군을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제가 벌을 받아야겠군요. 선물을 준비했으니 마음 푸시지요.”
곽가는 선물이랍시고 가져온 두 개의 보따리를 풀었다. 원소와 유비의 목이었다. 그 둘의 죽음을 보니 이제 정말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쯧쯧! 어차피 죽을 거 왜 도망간 건지.... 그래도 장사는 성대하게 치러줘. 둘 다 나름대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 아니던가. 아무튼 다들 이리 모였는데 간만에 성대하게 연회를 해야겠군. 군사들도 실컷 먹이고.... 그런데 봉효. 자네 뒤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꼬맹이는 누군가?”
이의민이 가리키는 사내는 공손속이다. 긴장된 자세로 쭈뼛거리던 공손속은 이의민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소인. 공손찬의 장자 공손속이라 합니다.”
“아! 네가 서신에 적힌 그 공손속이로군. 그래. 아비의 원한을 갚았으니 이제 어쩔 거냐? 계획한 일이라도 있느냐?”
“그, 그것이.... 어, 없습니다....”
공손속은 원래는 할 말이 많았으나 이의민을 직접 대면한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절대자의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 기운은 이민족들을 공포에 몰아넣던 자신의 아비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 밖으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공손속이다.
옆에 있던 곽가가 그런 공손속을 대변하듯 입을 열었다.
“주군. 공손속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에 만족하는 자입니다. 주군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곽가의 얘기를 직설적으로 풀면 공손속은 감히 이의민에게 덤빌 배짱이 없는 간이 작은 자라는 뜻이다. 공손속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얘기였지만, 공손속은 오히려 그리 말해준 곽가가 고마웠다.
곽가의 말대로 그는 아비인 공손찬과는 달리 이의민과 절대 척을 질 생각이 없고, 패권을 노릴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을 확실히 이의민에게 알리고 싶었다.
어쨌든 곽가가 먼저 나서준 덕분인지 공손속의 말문이 조금 트였다.
“그렇습니다. 저 같은 소인이 어찌 감히 승상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원수는 갚았으니 자식으로서 할 도리는 다 한 셈입니다. 승상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공손찬이 원래 유주 자사였으니.... 아비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도 되겠군. 그럼 이제부터 유주 자사를 해봐.”
역시 이의민은 자신에게 오겠다는 사람을 막지 않았다. 공손속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에 적절한 보상까지 확실히 내렸다.
이에 공손속은 크게 감격했다. 어쨌든 자신은 이의민에게 반기를 든 공손찬의 아들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휘하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서 원래 아버지의 관직까지 그대로 받을 수 있게 해준다니, 생각도 못한 환대였다.
“승상! 아니! 주군! 소인은 주군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군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유주를 다스리겠습니다.”
“그래. 잘 해봐. 하지만 명심해. 유주 안에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야. 유주 내에서 사소한 일이라면 모를까, 중요한 일은 네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을 거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올바로 유주를 다스릴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신다면 감사할 일이지요.”
공손속에게 파격적으로 유주 자사 직을 내린 이의민은 만총에게 다가갔다.
“만총. 자네는 기주 자사를 해봐.”
“감사합니다. 주군.”
“감사는 무슨... 낙양을 떠나 변방에서 고생하는 걸 텐데...”
“아닙니다.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소인의 변변찮은 공을 부풀려 주셔서 이와 같은 중요한 자리를 맡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만총에게 기주를 맡긴 까닭은 간단했다. 기주는 하북의 혈맥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위치상 기주 하나만으로 병주와 유주까지 자연스레 아우를 수 있다. 즉, 기주에서 공손속의 유주에 대한 감시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기주는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그런 기주 자사를 무에 치우친 인재로 삼을 수도 없고 문에 치우친 인재로 삼을 수도 없다. 만총처럼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재가 맡아야 적격이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까지 향상된 이의민이다.
이윽고 성대한 연회가 시작됐다. 많은 장수와 참모들이 그간의 전쟁 피로를 잊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간만에 긴장을 풀고 제대로 즐기는 이들이다.
이의민은 거기서도 예전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술만 마시지 않았다. 직접 휘하들을 둘러보면서 하나하나 챙겼다.
“하하! 그래. 우금. 낙양에서도 한잔 하자고. 음.... 그런데 자네들은....?”
이의민은 처음 보는 인물에게 관심을 표했다. 한 명은 비대하게 보일 정도로 덩치가 컸고, 다른 한 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탄탄한 구릿빛 몸을 가지고 있었다. 허저와 전위였다.
쿵!
둘의 무릎 꿇는 소리에 연회장이 울릴 정도다.
“충! 소인! 허저라 합니다! 승상을 뵙습니다!”
“충! 소인! 전위라 합니다! 승상을 뵙습니다!”
“허저와 전위라... 처음 보는 놈들이군.”
역시 둘의 이름은 모르는 이의민. 하지만 그 둘이 범상치 않다는 건 한눈에 알아봤다.
“흐흐! 그런데 내게 궁금한 게 많다는 눈빛들이군.”
이의민을 마주하는 허저와 전위의 눈에는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인들은 지옥야차라 불리는 승상의 대부를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모두 놀란 눈으로 허저와 전위를 바라보았다. 특히 순유는 노발대발했다.
“이런 무엄한...! 봉효! 이 자들은 어디서 데려온 건가?!”
그럴 만했다. 허저와 전위는 이의민으로 바뀐 지금의 세상에서는 무명소졸에 불과했다. 물론 청주와 평원에서 제법 활약을 했다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 작은 무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런 순유를 저지했다.
“공달. 이놈들은 이 정도 패기를 부릴 만한 놈들이야. 내가 알아. 아무튼 내 대부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나에 대한 소문을 믿지 못해 이러는 건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승상. 저희들도 승상에 대한 소문을 믿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무인으로 태어나서 무신이라는 승상의 대부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만약 이대로 평생 승상의 대부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죽기 전에.... 아니. 죽어서도 한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들에게 승상의 대부를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 승상에 대한 무례를 처벌하여 주십시오.”
“그 처벌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나 있나?”
“그렇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이의민과 상대해보고 싶다는 허저와 전위, 이의민은 그런 둘이 마음에 들었다. 뼛속까지 무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좋다. 너희들 둘 다 힘 좀 꽤나 쓰는 것 같구나. 허나 결코 내 상대가 되진 못할 거다. 그러니 둘 다 한꺼번에 덤벼라.”
“좋습니다. 저희들의 합격은 장비도 두려워할 정도이지만, 승상께서 그 장비를 물리치셨다고 하니 저희도 합격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연회 도중 이의민과 허저, 전위의 2대1 비무가 벌어졌다. 허저와 전위는 비무가 계속 될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장비와 비슷한 줄 알았더니... 완전한 착각이었군.’
장비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대부가 장팔사모에 비해 파괴력이 더 높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대부가 더 느릴 수밖에 없을 텐데, 어째 장비의 사모보다 이의민의 대부가 더 빠른 것 같았다. 게다가 이의민은 대부만 잘 쓰는 게 아니었다.
부우웅!
이의민은 대부가 전위를 노리고 크게 휘둘러졌지만, 허공만을 갈랐다. 전위는 당연히 이의민이 자신을 다시 공격하기까지 빈틈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의민은 전위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해왔다.
뻐억!
“크악!!”
이의민의 박치기 공격이다.
대부로만 공격 할 줄 알고 거기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너무 큰 빈틈을 노출했고, 이의민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박치기 한번에 전위를 쓰러뜨린 이의민은 다시 대부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허저를 노린 공격이다. 대부는 정확히 허저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어때? 더 해야겠나?”
전위와 허저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막연하게 이의민과 비무를 하고 싶었던 그들이지만, 막상 이의민과 비무를 하고 나니 자신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여주십시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감히 승상께 무기를 들었습니다.”
“됐어. 나도 무인이야. 그런 마음 이해는 가. 그리고 자네들의 실력도 제법 쓸 만하고 말이야. 그 정도 실력이면 이런 호승심을 가질 만 하지. 아무튼 이제부터 내 밑에서 잘 해봐.”
죽음을 각오했던 허저와 전위는 이의민의 관대한 처분에 감동했다.
“충! 이제부터 승상의 명이라면 불구덩이도 마다않겠습니다.”
“충!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상을 위해서는 소인은 물론이고 소인의 자식들의 목숨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허저와 전위까지 완전히 굴복시킨 이의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