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하늘이 준 단 한번의 기회 (2)
하씨는 모처럼만에 신이 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태보. 그럼 원군으로 가는 척하면서, 방심하고 있는 이의민의 뒤를 치겠다는 것이지요? 호호호! 정말 기막힌 지모입니다.”
“맞습니다. 태후마마. 만약 이의민이 하북군에 패퇴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도우러 갈 명분도 없고, 또 멀쩡한 이의민의 군대를 상대로 기습을 한다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북군에 대패를 한 상태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북군의 공격을 받고 뒤에서는 아군인줄 알았던 우리의 공격을 받으면 아무리 이의민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주준과 하씨가 서로 눈을 빛내면서 얘기를 하고 있자 사손서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징병된 자들이 과연 승상을 치려고 하겠습니까? 이미 백성들은 이의민을 폐하보다 더 떠받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준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태부. 지엄하신 황명을 받고 떠나는 황군입니다. 게다가 그들도 눈치가 있을 터, 승상이 위급한 상황인데 목숨을 버리고 그를 돕겠습니까?”
주준의 자신감에 하씨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태보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언제부터 이의민, 그놈을 따르기 시작했습니까? 무지한 백성들도 진정한 나라의 근본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금방 마음을 바꿀 겁니다. 그럼 태보만 믿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태후 마마. 신, 이번 거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소제와 하씨, 주준과 사손서의 은밀한 회동이 끝났다. 물론 그 자리에서도 소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지만.
얼마 후 정욱은 황명을 앞세워 낙양과 낙양 근교 전역에서 징병을 시작했다. 군사들이 모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한 덕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백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이의민을 도우러 간다는데 나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순식간에 5만의 병력이 모이고 소제는 직접 그 앞에서 출정 연설을 했다. 이전에는 그저 황궁에서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소제다. 하지만 소제는 이번 원군의 지휘관을 주준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더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이의민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하남윤. 다른 일도 아니고 승상을 돕는 일인데, 이번에는 내가 황제로서 무언가 하고 싶소. 내 군사들 앞에서 직접 출정식 연설도 할 것이고, 지휘관도 내가 직접 뽑고 싶소.”
소제는 정욱이 당연히 반대를 할 줄 알고 약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봤다. 그런데 그는 잠깐 구시렁대더니 흔쾌히 소제의 얘기를 허락했다. 황제의 부탁을 신하가 들어준다는 것이 웃기는 그림이긴 하지만 말이다.
“흠.... 어차피 이곳 낙양에 쓸 만한 지휘관이 없는 상태니...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정 하시고 싶으시다면 그리하시지요.”
“알겠소. 그럼 원군의 총 지휘관으로 태보인 주준을 임명하겠소.”
그렇게 주준은 원군을 이끌고 낙양을 빠져나갔다. 소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꿈에 부풀었다.
‘드디어....! 이의민, 그 악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욱과 종요 등은 그런 소제를 보며 비웃었다.
“후후후. 이리 쉽게 걸려들 줄은....”
“하남윤. 이제 주군께서 황상을 폐할 명분이 차곡차곡 만들어지고 있군요.”
정욱과 종요의 대화를 들으면 알 수 있듯, 주준의 계획은 철저하게 정욱의 계산 하에 있었다. 일부러 소제와 하씨, 주준, 사손서 등이 결탁하여 이의민을 몰래 치도록 만들어둔 것이었다.
물론 주준의 계획이 성공할 리는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의민은 하북군에 패퇴한 적이 없고, 부상을 당한 적은 더더욱 없다. 결정적으로 이의민은 주준의 원군이 무슨 이유로 하북에 오는 것인지 알 터였다.
“원상. 이제 주군께 서신을 보내야겠소. 물고기가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고 말이오. 내가 직접 해도 되지만 그건 원상에게 부탁드리겠소.”
“예. 하남윤.”
이의민에게 보낼 서신을 종요에게 부탁한 정욱은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중요한 서신을 종요에게 맡긴 것만 봐도 알겠지만, 정욱은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가 향한 곳은 삼공부였다.
“오랜만입니다. 사도.”
“응? 자네는 정욱이 아닌가?”
정욱은 사도인 원술을 만나기 위해 삼공부를 찾았다. 원술은 정욱을 보자마자 잘 됐다는 듯 폭풍 질문을 던졌다.
“아니 그래도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네. 승상은 대체 어찌 된 건가? 하북에서 패퇴했다는 말이 사실인가? 부상까지 당했다면서? 그 인간이....? 이게 말이 되는가?”
원술 역시 정욱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이의민의 위급소식을 듣고 놀랐다. 정욱은 원술의 쏟아지는 질문에 슬쩍 미소 짓기만 할뿐이다.
원술도 이제 제법 눈치가 늘었다. 정욱의 비릿한 미소를 보고 대번에 상황을 알아챘다.
“역시 아니지? 헛소문이지? 이의민, 그 인간이 그리 당할 리가 없지. 그럼 대체 그런 개소문은 어디서 나는.... 설마.... 자네가....?”
이때 원술의 책사인 노숙이 등장하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하하하! 돌아가는 상황이 영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역시나 하남윤이 계획한 일이었군요.”
“그런데 왜 그런 거짓 소문을 퍼뜨린 건가? 대체 무얼 위해....?”
원술의 물음에 정욱 대신 노숙이 대답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승상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옥좌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지요.”
노숙의 얘기에 원술은 대경했다. 지금 전 중원이 이의민 천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래도 옥좌에 오르겠다는 얘기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수백 년간 이어져 왔던 한나라의 근간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니, 아무리 이의민이라도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의민은 명망 높은 가문 출신도 아니고, 일개 민초였지 않았던가. 그런 이의민이 황제가 되기 위한 거사가 지금 준비되고 있다고 하니, 웬만한 일에는 별 충격을 받지 않는 원술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이! 자경. 그건 너무 넘겨짚은 것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황상의 자리에....”
“아닙니다. 주군. 황상께서 허수아비가 되신지 오래되었지만, 그 자리를 함부로 끌어내릴 수 없는 이유는 결국 명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주준 장군이 황상의 밀명을 받고, 이 나라의 충신인 승상을 공격한다면...? 백성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승상이 황제의 질투심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면...? 그건 황상을 끌어내릴 명분이 되는 겁니다.”
“그렇군....”
원술이 생각해봐도 노숙의 얘기가 옳았다. 단지 너무 엄청난 일이라 감이 잘 오지 않을 뿐이다.
정욱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노숙의 얘기를 인정했다.
“허허허! 정확히 보셨소. 역시 자경선생이시오. 선생의 능력을 보니 더욱 안심이 되오. 이번 양주원정에 사도 어르신을 도와주시오.”
정욱이 원술을 찾은 이유는 사실 이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양주원정...?”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사도 어른. 양주의 손견 토벌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원술의 표정이 영 마땅찮다.
“흠! 흠! 고작 그런 일에 이 몸이 움직여야하는가? 내가 왜?”
“주군께선 하북 원정에 이어 양주까지 가신다면 너무 오래 낙양을 비워두시는 것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주군께서 낙양에서 하실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 양주에 파견된 인원들이 모두 사도의 수하들 아닙니까? 사도께서 최근에 손견과 자주 부딪혔고, 그래서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아실 테니 이리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긴 한데 승상이 내 공을 알기나 할까? 그가 황상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승상자리는 순유, 그 놈에게나 주겠지 나를 줄 거 같진 않은데?”
원술은 의외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제 더 올라갈 곳도 없는데 굳이 이의민을 도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의민의 명을 듣는 수하가 아니라 아직까지는 동맹이니까.
하지만 상대는 정욱이다. 원술을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욱은 만면에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원술을 설득했다.
“그건 사도께서 잘 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승상보다 높은 자리가 왜 없습니까? 주군께선 모두가 주군에게 등을 돌릴 때, 손을 내밀어준 친우의 도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으실 겁니다. 이번 일을 마무리 잘 지으신다면 왕위까지 바라보실 수도 있습니다.”
“뭐, 뭐라고...? 와, 왕?!”
원술은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의 자리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 자리는 별일 없으면 거의 황실의 핏줄이 맡는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정욱의 말대로 승상보다 더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왕이라니! 내가 왕이라니!”
“후후! 좋으십니까? 양주 원정만 잘 마무리 하신다면 지고한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견과의 전쟁이 그리 힘들지도 않을 겁니다. 여남 쪽에 이미 병력이 있고, 형주의 유표와 서주의 포신이 사도를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욱의 사탕발림에 홀라당 넘어간 원술.
“자경! 뭐하느냐?! 당장 출정 준비를 하라!”
“예! 주군! 명 받들겠습니다!”
그건 원술을 모시는 노숙도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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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와 원소,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500의 군사들은 계성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현덕. 전예나 심배에게 전갈이 온 것은 없소?”
“그렇소. 허나 전갈이 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오. 평원 쪽에 있는 자들은 우리가 패퇴한 것을 아직 모를 터이니 말이오. 퇴각하기 직전 평원 쪽으로 전갈을 보냈으니, 계성에 도착해서 기다리면 그들이 올 것이오.”
이제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계성과 평원 쪽 군사들뿐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희망이 사실은 전멸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유비와 원소는 그 마지막 희망 하나에 모든 것을 기대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상장군을 포함한 모사들을 모두 잃은 원소나 의형제들과 조운을 잃은 유비나 이제는 동병상련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야심도 잊고 어떻게든 이 암울한 상황을 극복할 방법만 생각 중이다.
“현덕... 이 계성에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소.”
“그렇소. 이리 빨리 돌아오게 될 줄은....”
계성이 육안으로 보이자 마음이 더 급해진 원소와 유비는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그렇게 계성 성문 앞까지 도달한 그들. 계성을 보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계성 안이 매우 시끌벅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심배나 전예가 벌써 왔을 리는 없는데...?’
아무리 빨라도 물리적으론 절대 그들이 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의아해 하고 있을 때 계성의 성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비는 그들을 보며 혼비백산했다.
“젠장! 본초 형! 일단 도망가야겠소!”
“도망이라니...? 저들이 설마 이의민군이라도 된 단 말이오?”
“모르겠소! 하지만 전부 모르는 군사들 같소. 게다가 저들의 모습을 보시오! 우리를 마중하려는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잖소.”
“진정하시오. 현덕. 평원군이 진즉 평원을 접수하고 올라왔을 수도 있지 않소?”
원소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은 도망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지친 그들이 도망을 가봤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잡혔겠지만.
그렇게 계성에서 나온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유비와 원소.
“너, 너희들은 누구냐?!”
그런 유비의 질문에 답하듯 포위한 군사들 사이에서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 이게 누구신가?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빛갑주를 보니 그 쪽이 원소고, 저 쪽은 유비로구먼.”
“네, 네놈은 누구냐?”
“나? 나는 곽가라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