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66화 (166/175)

166. 하늘이 준 단 한번의 기회 (1)

제도 낙양은 언제나 활기찼다. 백성들은 늘 웃음을 잃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고, 생업에 종사하며 돈을 벌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런 낙양에서도 기쁨과는 거리가 먼,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참으로 웃기게도 이 나라의 가장 지존이 살고 있는 황궁 안이었다.

한나라의 황제인 소제. 이의민이 아니었다면 진작 이 자리에서 내려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이의민 덕분에 원래 주어진 천수에 비해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지만, 당사자인 소제가 그걸 알 리 없다.

남들 같으면 성인으로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을 나이였지만, 소제는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성정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낙양 황궁 안에서 늘 울상을 지은 채 자신의 어미만 찾을 뿐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소자 왔습니다.”

“오셨습니까? 폐하.”

“어머니. 소자, 두렵습니다. 흑흑!”

“왜 그러십니까? 무엇이 두렵다는 말씀이십니까?”

“최근에 몸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복부에 통증을 느낄 때도 있고,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혹시 승상이.... 승상이 소자를 죽이려 음식이 독을 탄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제가 느끼는 증상은 그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이다. 황궁 안에서의 불안과 우울, 고독 등의 감정을 풀기 위해 그간 과식을 밥 먹듯 했다. 그러니 속이 좋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소제는 피해망상까지 생겼는지 이의민이 밥에 독을 탔다고 여겼다. 그럼 차라리 먹지를 말든가.

소제 어미인 하태후, 아니. 이제 태후에서 궁인으로 강등당한 하씨도 소제의 걱정이 피해망상이란 걸 알고 그를 달랬다.

“걱정 마십시오. 이 어미가 보니 승상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폐하. 아무리 승상이 악독한 자라고 해도 그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상황이 어려워도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이 어미가 아들 하나 보고 목숨을 부지하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원래 소제와 하씨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의민은 일전에 하씨를 궁인으로 강등시키면서, 그녀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물론 그 명을 내린 이의민 위에 황제가 있으니 소제가 원하면 그녀와 만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지금 한나라의 권력 구도가 어디 그런가? 소제는 이제 아무 힘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일 뿐이니 사실상 이의민의 뜻대로 하는 처지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도 소제와 하씨가 이리 만날 수 있는 것은 정욱이 일부러 그러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 소자, 너무 두렵습니다. 꿈에도 이의민 그 자가 나옵니다... 매일을 눈물로 지새웁니다.”

“이런...! 흐흑! 이 얼마나 가여운 일인고....”

눈물을 흘리는 소제를 안고 하씨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어미 된 입장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리라.

하씨는 소제를 보면 볼수록 이의민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이의민, 그 악마 같은 놈을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그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온 천하에 뿌릴 겁니다. 그 누구도 그놈의 시체를 찾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선채로 끔찍한 말을 내뱉는 하씨.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다.

소제는 악에 받힌 하씨의 말을 누가 들을까봐 화들짝 놀랐다.

“어, 어머니! 어찌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하십니까? 혹시라도 누가 듣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끔찍한 일을 당하실까 두렵습니다.”

“후후후. 걱정 마십시오. 폐하. 여기에 폐하와 이 어미, 그리고 춘월이 밖에 없지 않습니까? 춘월이는 폐하도 잘 아시는 아이 아닙니까? 어렸던 시절부터 이 어미의 시중을 들었던 아이입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아이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하씨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시종이 춘월이다. 그런데 그녀는 하씨의 말대로 어릴 때부터 데리고 온 시종이었다.

다소 안도한 표정의 소제. 그럼에도 소심한 그는 하씨처럼 대놓고 이의민에 대한 욕을 하지는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그런 소제의 모습에 하씨는 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나라의 황제가 한낱 신하의 눈치나 본단 말인가.... 잘못 되었다! 한참 잘못 되었어! 이번 전쟁에서 그놈이 반드시 죽어야 할 터인데....’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소제에게 묻는 하씨.

“폐하. 이의민, 그놈이 하북으로 간지 꽤 오래 되었지 않습니까? 혹시 그에 대해 소식을 들은 건 없습니까?”

당연하게도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소식이 있어도 아무도 소자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소자는 그저 허수아비 황제일 뿐입니다.”

“크으윽! 천벌을 받을 놈들! 이 나라의 황제폐하께 어찌 그리 불경할 수가 있단 말인가. 폐하! 그래도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듣자하니 하북의 원소와 공손찬은 군대의 강함이 이의민 못지않다고 합니다. 그들을 믿어 보소서. 하늘이 폐하와 이 어미를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알겠사옵니다. 어머니.”

소제는 문안을 마치고 내전으로 돌아갔다. 생모를 만나서 그럴까? 아니면 이의민이 낙양에 없어서 그럴까? 평소보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내전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흠칫하며 멈추었다.

소제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상대는 바로 정욱이었다. 소제는 이제 정욱 앞에 서면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몸이 굳었다.

“폐하. 신 하남윤 정욱. 폐하를 뵙사옵니다.”

“아.... 하, 하남윤. 잘 지내셨소? 어쩐 일이시오?”

“폐하께 긴히 알려야 할 중요한 소식이 있어서 급히 왔사옵니다.”

“그렇소...? 일단 들어가십시다.”

소제는 정욱과의 독대가 내키지 않았다. 이의민만큼은 아니지만 정욱도 충분히 두려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이 독대를 거부할 수도 없다.

“무, 무슨 일이오?”

정욱은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살피더니 소제에게 가까이 와서 귓속말을 했다.

소제는 정욱이 과연 무슨 얘기를 할지 너무도 불안하고 두려웠다. 지금 당장 이 황제의 자리에서 자신을 끌어내겠다고 말할 것 같기도 했다. 소제에게는 다행이도 그런 얘기는 아니었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승상이 하북 전쟁에서 역도들에게 대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승상도 큰 부상을 입고, 치료를 하는 중이라 합니다. 일단 승상의 목숨은 큰 지장이 없습니다만, 전황은 아주 어렵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북에서 패퇴하여 이곳 낙양까지 밀려 올 수도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 그게 정말이오? 이의민... 아니. 승상의 군대가 그토록 위급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하북의 군사가 매섭습니다. 승상은 대패 후 낙양에 구원군을 요청하셨습니다.”

정욱의 보고에 소제는 순간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아니! 애통한 일이오. 그래서 짐이 어찌하면 좋겠소?”

정욱은 그런 소제의 표정을 정확히 읽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답했다.

“어찌하시다니요. 승상은 자나 깨나 폐하만 생각하는 이 나라 황실의 유일한 충신입니다. 그런 승상의 요청을 설마 무시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속히 폐하께서는 금위군을 포함한 황군을 소집하여 승상을 도와야 합니다.”

“그, 그런....”

소제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지만 정욱 앞이라 그 기분을 드러낼 수도 없고, 또 원군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이의민이 패배하면 난 그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정욱 앞에서 원군 요청을 어찌 거부한단 말인가....’

고민하던 소제는 잠깐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럼 짐이 고려를 해보겠소....”

“폐하! 고려를 하신다는 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지금 한 시가 촉박한 상황입니다.”

“아, 알겠소. 하남윤. 그럼 즉시 증원군을 파견토록 하시오.”

“그럼 당장 폐하의 명에 따라 증원군을 징병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욱이 내전을 나갔다. 소제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하아! 이대로 원군을 보내면 이의민이 하북군을 상대로 승리하려나? 그럼 그놈에게서 해방되는 건 물 건너가는 것인가?’

물론 원군을 보내고도 이의민이 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소제는 그리 생각하니 다시 우울해졌다.

소제는 자신의 우울한 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시 어미 품을 찾았다.

“폐하. 이 어미의 품이 그리도 그리우십니까? 문후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머니. 급히 상의해야 할 일 있습니다.”

소제는 정욱과 나눴던 대화를 하씨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하씨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벌컥 소제에게 화를 냈다.

“폐하! 대체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거기서 덜컥 원군을 보내겠다고 해버리면 어찌 하십니까? 어떻게든 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미루고 또 미루셨어야지요! 폐하께서는 지금 이의민, 그놈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차버리신 겁니다!”

“어, 어머니. 정욱의 기세가 너무 강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원군이 간다고 해도 이의민이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있잖습니까? 하북의 소식을 좀 더 기다려보는 게 어떻습니까?”

하씨는 소제의 말을 듣고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씨는 소제와는 달리 낮은 확률만 믿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되겠어요. 태부와 태보를 만나야겠습니다. 춘월아. 태부와 태보에게 연락을 취해라. 은밀히 자리를 가지자고 말이다.”

하씨는 결국 삼사의 직을 받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는 주준과 사손서를 불러 이 일에 대해 논의를 할 생각이다.

“어,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다른 이들을 만나시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 분들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소제. 하씨는 다시 한번 그런 소제를 다그쳤다.

“무얼 두려워하는 겁니까? 폐하! 정욱이나 종요 같은 이의민의 하수인들은 이의민의 패전으로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이건 이의민을 몰아낼 하늘이 준 유일한 기회입니다.”

하씨의 엄한 다그침에 결국 소제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다.

며칠 후, 황궁의 은밀한 장소에서 소제와 하씨, 그리고 삼사인 주준과 사손서의 비밀 회동이 이뤄졌다.

하씨는 걱정하는 부분을 주준과 사손서에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결국 폐하께서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을 하셨소. 이를 대체 어찌 물릴 수 있겠소?”

하씨의 질문에 주준이 눈을 빛냈다.

“폐하께서 원군을 보내기로 하셨다라.... 지금 와서 그 결정을 물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아닙니다. 폐하께서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을 하신 것이 더 잘 된 일일 수 있습니다.”

주준의 얘기에 놀라는 소제와 하씨.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보.”

“지금 낙양에 군사를 새로 징집해서 하북으로 보낸다면 그건 이의민의 군사들이 아니라 폐하의 군사들입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의 명을 듣겠습니다.”

하씨는 눈을 빛냈다. 이제 주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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