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간웅의 최후 (2)
“자, 잠깐! 승상! 내 승상께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조조는 마지막까지 이의민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은 조조다. 확실히 간웅다운 최후였다.
이의민은 왠지 모르게 그리 발악하다가 죽은 조조가 비겁하다거나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조조는 살아남아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자신과는 야망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달랐지만, 이의민은 그런 조조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잘 가게. 맹덕.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네가 내 자리에 있었겠지...’
다음 차례는 조조의 종제인 조인이었다. 그는 조조와는 달리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승상. 이미 형님께서 가셨는데 제가 살아봤자 뭐하겠습니까? 빨리 제 목숨을 거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인재에 대한 이의민의 욕심은 준 게 아니었다. 조인과 같은 인재를 보면 볼수록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종형이자 주군이었던 조조를 죽여 놓고 어찌 그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네를 오래 동안 봐와서 그런가... 참으로 아깝구먼.... 안량을 보낼 때보다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도 역시 자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살려줄 수는 없지.”
결국 도부수에게 손짓으로 지시했다. 얼마 후 조인의 목 역시 잘린 조조의 목옆에 나란히 놓여졌다. 그 뒤를 이어 하후연 역시 목이 잘려나갔다.
그 다음으로는 조운이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이는 역시 조운이다. 가능하면 어릴 적 영웅이었던 그와 이 세상을 살며 때로는 비무를 하기도 하고 때론 같은 전투를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자룡... 그대도 조인이나 하후연과 마찬가지일 테지?”
이의민의 질문에 조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가 아직 살아있었다. 비록 유비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친 거나 다름없지만, 충성심이 그 어떤 이보다 높은 조운이 주군이었던 유비를 버리고 이의민을 따를 리가 없었다.
“승상은 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인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적이었지만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승상의 대부에 죽고 싶습니다.”
조운의 얘기에 이의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우상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소원은 꼭 들어주고 싶다.
그래서 이의민은 도부수 대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조운의 목을 베기로 했다. 이의민이 대부를 높게 치켜들자 조운은 웃음을 지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정말 기쁜 듯이 말이다.
“즐거웠소. 자룡. 잘 가시오.”
이의민이 대부가 번쩍 빛을 낸 후 조운의 머리 역시 떨어졌다. 다음으로 이의민에게 질문을 받은 이는 원래 원소의 수하들이었던 전풍과 곽도, 그리고 순우경이었다.
“곽도와 순우경, 그리고 원호는 어찌 할 생각인가? 너희들도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나? 조인과 자룡을 따라서 죽을 테냐?”
그들 중 곽도와 순우경은 이의민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다.
“아니오. 난 승상께서 받아주신다면, 이제부터 승상께 충성을 바치겠소. 주군이었던 원소는 저 혼자 살자고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소. 그에게 더 이상 충의를 바칠 생각은 없소.”
“저도 순우 장군과 같은 뜻입니다. 여태껏 한 것만으로 이미 원소에게 수하로서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의민 입장에서 곽도와 순우경은 그렇게까지 휘하로 들이고 싶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태껏 항복하는 적을 막지 않았으니 그 둘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셋 중 전풍은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원호. 너도 이들과 같은 생각인가?”
한동안 눈을 감고 고민을 하던 전풍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섬기던 주군을 두 분이나 망하게 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염치로 벼슬살이를 하겠습니까? 죽이시려면 죽이시고, 살리실 거면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게 해주십시오.”
전풍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의민은 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곽도나 순우경보다는 전풍이 훨씬 더 귀중한 인재가 아닌가.
“정말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예. 그냥 제 목을 베시지요.”
이의민은 전풍을 가만히 두고 보다가 명을 내렸다.
“그를 풀어주라.”
전풍을 풀어준다고 해도 조운이나 조인처럼 복수를 한다고 기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소원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럼 네 소원대로 기주에서 촌부로 살게 해주마. 다만 기주에 큰일이 있을 경우 기주 자사를 좀 도와줘. 백성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만 네 능력을 써달라는 거야. 그 정도도 못해주겠나?”
영 아쉬운 듯한 이의민의 제안에 전풍은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적이었던 저를 이리 살려주시는 것만 해도 감읍할 따름인데, 어찌 그것까지 마다하겠습니까?”
전풍은 그렇게 포박을 풀고 업성을 나갔다. 기주에서도 업성과 같은 큰 도시에는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제 처리해야할 적 인재가 하나 남았다. 조조의 최고 모사이자 마지막까지 이의민군을 긴장시켰던 순욱이었다.
“문약. 너는 어찌 하겠느냐? 너도 결코 내 밑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참고로 말해두지만 네놈은 전풍과 다르니, 내 귀의하는 것을 거절할 경우 전풍처럼 살려둘 생각은 없다.”
이의민의 통첩에 순욱은 담담하게 답했다.
“소인의 짧은 판단으로 수만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저를 죽여주십시오.”
역시 순욱도 살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처리한 적 인재 중 조운이 가장 아깝다고 할 수 있었지만, 순욱 역시 그 못지않았다. 특히 이의민이 순유와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절, 순유로부터 순욱에 대한 칭찬을 얼마나 들었던가.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야 만난 조운보다는 순욱을 더 얻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의민은 알고 있었다. 순욱이 죽음을 결정했다면 결코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의민만 안타까워하는 건 아니었다. 순유도 아주 착잡한 표정으로 순욱을 보고 있었다. 비단 같은 영천 순가라서 그런 건 아닐 터였다.
“역시 자네는 아니 되는군. 순욱을 방에 데려가라!”
그런데 이의민의 결정은 순욱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순욱에 대한 처분은 내일 이뤄질 것이다!”
그렇다고 이의민이 순욱에게 끝까지 미련이 남은 건 아니다. 단지 순유에 대한 배려로 순욱의 처분을 미뤄준 것이었다. 순유가 순욱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적장들에 대한 처분을 모두 끝낸 이의민은 이후로도 토의를 계속했다. 사실상 전쟁이 끝난 거나 다름없지만, 아직 완전히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적인 유비와 원소가 도망쳤지 않은가.
물론 그들의 남은 세력이나 병력으로 볼 때 재기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끝까지 방심할 수 없다.
**
순욱은 자사 치소의 한 방에 갇혀 있다. 이의민의 배려로 감옥도 가지 않고 마지막 밤을 나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런 순욱의 방에 누군가 찾아왔다. 순유였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있었다. 순욱은 이의민과 순유가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공달. 나를 왜 아직까지 살려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대답을 아시잖소. 이만 주군의 곁으로 보내주시오.”
그에 순유는 말없이 술잔에 술을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는 술이 가득 차 있는 잔을 순유에게 내밀었다.
“다른 뜻은 없소. 그저 마지막 가는 길에 술이라도 한 잔 따라드리고 싶었소.”
순욱은 순유가 내민 술을 단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술이 이상하리만치 달다. 그래서 그런지 단 한잔에도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제 승상은 황상의 자리에 오르시겠군... 공달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고... 참으로 잘 되었소. 축하하오.”
“문약의 황실에 대한 충심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이리 비꼬실 것 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오. 잘되었다는 말은 진심이오. 그리고 승상과 공달의 앞날이 평탄대로이기를 진심으로 비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나로 인해 영천 순가가 멸문지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공달이 있으니 괜한 걱정이겠구려.”
“예. 괜한 걱정입니다. 이제 그런 걱정 따위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십시다. 곧 가실 분이 무슨 쓸데없는 걱정입니까? 그래도 문약이 이 사람의 집안사람이라 승상이 두 가지 배려를 해주셨소.”
“그게 뭐요?”
순유는 대답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 끈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허탈하게 웃는 순욱.
“허허허! 시신은 온전하게 보전해주시겠단 건가...? 승상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시오.”
이후 둘은 한참 동안 계속 술을 마셨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순유가 방을 나왔고, 방 안에서는 살짝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
제도 낙양. 한창 전쟁이 일어난 하북과는 제법 동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낙양은 아주 고요했는데, 그 고요를 깰만한 소식이 들어왔다.
정욱은 하북에서 온 전령에게서 서신을 전달받고 생각에 빠졌다.
‘드디어 주군께서 업성을 함락하셨군....’
정욱이 받은 소식은 이의민이 업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이었다. 정욱은 그게 무얼 뜻하지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천하통일이 거의 코앞에 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정욱은 종요나 미축 등 낙양에 있는 이의민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북의 소식을 전달하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하하!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난 것이군요. 어서 빨리 황실과 낙양의 저잣거리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소.”
그런데 정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뻐하는 미축을 말렸다.
“이 소식은 우리들만 알고 있고,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아니 되오.”
“예? 중덕 선생. 어찌 그러십니까?”
“우리는 이 서신의 내용과 정 반대되는 내용을 황실에 퍼트려야 하오.”
정욱의 얘기에 미축이 어리둥절할 때 종요는 그 뜻을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중덕 선생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전쟁이 거의 끝났으니, 주군께서는 마지막 관문만 남으신 셈이지요. 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하시겠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맞소.”
미축은 아직도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자꾸 두 분이서만 얘기하실 겁니까? 저희도 좀 알려주시지요.”
“알겠소. 원상이 얘기한 그 마지막 관문은 바로 황실이요.”
거기까지 얘기하자 미축도 드디어 알아들었다.
“아! 주군께서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시려면.... 기존의 황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지요. 중덕 선생은 폐하와 아직 폐하를 따르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엮을 올가미를 만드시려 하는군요.”
“맞소이다. 허나 명심하시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소. 적어도 일주일 후면 하북으로부터 모든 소문이 황실에도 도달할 것이오. 그러니 그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오.”
“한데 어떻게 황실과 황실의 사람들을 엮을 수 있겠습니까?”
종요의 질문에 정욱은 귓속말로 설명을 해주었다. 어차피 이곳에는 이의민의 사람들 외에는 없지만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했다.
정욱의 설명을 들은 종요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직 신하된 자로서 이런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황상께서 걸려들겠습니까? 그 분은 아무런 용기도 줏대도 없는 분입니다. 주군이 위급하단 소식을 들어도 움직이려 하겠습니까?”
“황상이라면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황상의 곁엔 아직 그 분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종요. 정욱이 얘기한 그분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
가진 재주에 비해 욕심이 과할 정도로 많은 자, 그러면서도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자다. 그라면 지극히 수동적인 황제와는 달리 정욱 등이 퍼뜨린 소문을 듣고 결코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