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간웅의 최후 (1)
하북군 수뇌부인 원소와 조조, 유비는 업성 성루 위에서 전투 현장을 지켜보면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전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일전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비참하게 패배했다. 거기다가 언제 왔는지 곽봉까지 성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며, 이곳 업성까지 빼앗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크으윽!!”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모두에게, 특히 원소에게는 이 업성이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루였다.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녕.... 내가 정녕 이의민에게 진단 말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원소만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편인 조조와 유비도 알고는 있었다. 원소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벽을 막 넘어오려는 곽봉의 부대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현실 파악이 그나마 빠른 이는 조조와 유비였다.
“본초 형.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곧 있으면 적군이 성벽을 넘어 이곳까지 도달할 겁니다. 일단 여기서 내려가시지요.”
“허어! 가긴 대체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내 업성이.... 내 마지막 땅이 이리 빼앗기게 생겼네. 여길 빼앗기면 대체 어디로 가서 내 몸을 맡긴단 말인가?”
이때 유비가 원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원 자사. 업성이 빼앗긴다고 해도 아직 우리에게 땅이 없지는 않소. 유주가 있잖소.”
“....”
유비의 얘기에 원소는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유주는 유비의 땅이지 자신의 땅이 아니지 않은가. 넓게 보면 같은 하북 연합이니 자신들의 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비가 결코 자신의 휘하에 들어올 인물이 아니니 결국은 남의 땅이라는 건 원소도 잘 아는 사실이다.
유비도 그런 원소의 의중을 느낀 것인지 계속해서 설득했다.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백배 낫지 않겠소? 평원에 아직 우리 군사들이 10만이나 있소. 그리고 유주에도 징병을 할 남자들이 아직 풍족하오. 그들을 모두 징병한다면 제법 많은 수의 병력이 나올 것이오. 게다가 유주는 이민족들과도 꽤나 친분이 있소. 이민족들까지 끌어 모은다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하오.”
그런데 유주로 가자는 유비의 얘기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는 원소뿐만이 아니다.
“그건 아무래도 아니 될 말씀이오. 유 자사.”
이번에는 조조였다. 그도 유주로 가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유주로 간다라.... 결국 또 다시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조조는 이제 도망과 재기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낙양에서 이의민을 피해 도망칠 때의 끔찍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조조의 반대에 유비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맹덕. 그럼 대안이 있는 것이오? 우리가 지금 유주로 후퇴하지 않으면 대체 어디로 가서 다시 재기를 할 것이오?”
유비의 말대로 지금 중원 대륙에 빈 땅은 거의 없었고, 운 좋게 조금의 땅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거 가지고 다시 이의민과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조조는 이미 유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부터 전쟁이 슬슬 불리해지기 시작할 무렵 조금씩 했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이 생각을 유비나 원소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 없다. 조조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대안 대신 적절한 변명거리 하나를 얘기했다.
“대안 따위는 없소. 본초형과 유 자사는 유주로 가시되 이 맹덕은 가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어찌됐던 이번 전투에서는 내 수하인 문약의 그릇된 판단으로 패배했소. 내 수하의 과는 바로 나의 과요. 패전의 책임이 바로 내게 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오.”
“책임을 진다라.... 어찌 진다는 얘기요?”
“나는 이 업성에서 결사항전을 할 것이오.”
조조의 얘기에 유비와 원소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놀라운 얘기다.
원소는 바로 절대 안 된다며 소리쳤다.
“절대 아니 될 소리네! 맹덕! 내 어찌 자네를 버리고 이대로 가라는 말인가? 난 다 잃었네. 안량과 문추, 저수 같은 이들을 잃고 피눈물을 흘렸는데 어찌 자네까지 잃으란 말인가?”
아직까지도 조조를 자신의 수하이자 친구로 착각하고 있는 원소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유비는 별 상관없다는 듯 원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맹덕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몰랐구려. 참으로 영웅이오.... 원 자사. 맹덕의 뜻이 이럴 진데 우리가 어찌 말리겠소? 그의 숭고한 뜻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맹덕을 위하는 일이오. 그럼 맹덕. 뒤를 부탁하오. 퇴각에 성공한 이들을 계성으로 보내주시고, 맹덕도 기회를 봐 계성으로 오시오.”
그렇게 유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소를 잡아끌었다. 원소도 눈물을 흘렸지만, 결국 조조 곁을 떠나 유비를 따라갔다. 그들을 따라가는 하북군은 고작 500여기다.
조조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소를 띠었다. 그는 당연하게도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로 이곳에 남겠다는 게 아니었다. 하북 연합과 이의민의 전쟁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보면서 생각해두었던 그 계획을 이제 실행하려는 것이었다.
‘흥! 멍청한 놈들.... 계성으로 간다고 이의민과의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그에게 항복하고 그 휘하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낫다.’
조조는 자신이 원소 휘하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의민 앞에서는 야망을 완전히 꺾은 척하면서 무릎을 꿇으면, 인재 욕심이 많은 그가 반드시 자신을 받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휘하에서 야금야금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종국에는 이의민의 세력을 통째로 먹는다. 이것이 조조가 새로 세운 계획이다.
생각을 마친 조조는 여유롭게 몸단장을 했다. 당연히 항전이나 반격을 하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 얼마 후 업성 안에 들어온 곽봉의 군사들이 조조의 방에 들이닥쳤다. 조조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조조다! 승상께 항복하겠다!”
그런 조조 앞으로 곽봉이 나타났다. 꽤 오랜만에 재회하는 조조와 곽봉이다.
“오랜만이군. 맹덕.... 그런데 이제 와서 항복을 하시겠다?”
“그렇소. 위장군. 이 사람의 그릇된 판단으로 승상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소. 지금이라도 기회를 주신다면 내 과거의 죄를 참회하고, 열과 성을 다해 승상을 모시겠소.”
곽봉은 조조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저놈이 정말 저리 저자세를 취한다고....?’
그래도 속마음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일단 받아들이고 이의민에게 데려가야 했다. 결국 조조를 받을지 말지 최종적인 결정은 이의민이 하는 것이니까.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성 밖에서 아직도 항전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얘기하라.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말이다.”
“알겠소. 내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지금 남아있는 하북군을 바탕으로 차후 이의민 휘하에서 내 세력을 키울 것이다.’
남은 하북군을 살려준다는데 조조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물론 그 하북군들이 조조를 따를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지금 업성에 남은 하북 연합의 수뇌는 조조가 유일했다. 조조는 그런 점을 군사들 앞에 내세우면 충분히 자신을 따를 거라 믿었다.
조조는 즉시 밖으로 나가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하북군을 향해 외쳤다.
“항복하라! 이미 원 자사도 유 자사도 도망쳤다! 너희들의 주인은 너희들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너희들은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있느냐?! 나와 함께 승상께 항복하자! 그래도 살아남아야 할 것이 아닌가?!”
끝까지 항전을 하고자 했던 하북군은 그런 조조의 모습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 그나마 듬직하게 버텨주던 조인이 가장 먼저 무기를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 하북군도 줄줄이 무릎을 꿇고 있다.
순식간에 모든 하북군이 이의민군 앞에 항복했다. 이의민군의 승리다.
역시 이의민은 항복하는 적들을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
“항복하는 자들은 거두어주어라!”
업성으로 입성하는 이의민. 그 옆으로 순유와 유엽, 그리고 그의 상장군들이 도열해있었다. 그 뒤를 따라 수만의 군대가 일제히 업성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업성의 백성들은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은근히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주군.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새삼스레 축하는 무슨.... 전투 경과는 어찌 되었나? 우리 군의 피해는?”
단순히 승리에 도취되지 않았다. 바로 군사들의 피해부터 확인하는 이의민.
“결과가 좋긴 했지만, 진법을 변경하던 도중 제법 피해가 나왔습니다. 아군 사상자도 2만 가까이 됩니다. 죄송합니다. 피해를 더 줄였어야 했는데....”
“그게 어찌 공달의 과인가? 자네의 계획이 아니었다면 전쟁은 더 길어지고 그만큼 사상자는 더 나왔을 거야. 오히려 훨씬 더 많이 나올 사상자를 공달이 2만으로 줄인 것이지. 아무튼 사상자들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챙겨줘.”
“예. 그리고 적 포로도 엄청납니다. 대략 6만 정도 됩니다. 이 중 절반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적장들도 꽤나 생포했습니다. 조운, 조인, 순우경, 순욱, 전풍, 곽도 등이 있습니다.”
포로들을 많이 사로잡았다는 얘기에도 이의민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현재 수거하고 있는 시체들에게 가 있었다.
양 군 합쳐서 8만이라는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시체가 점점 쌓였고, 그 시체들에서 나온 피가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의민은 그 끔찍한 광경을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그도 피를 마다하는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8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전사자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도 슬슬 이 살육을 끝내고 싶었다.
“공달. 이게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겠지?”
순유 역시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굳이 창칼이 있어야만 싸움이 아닙니다. 주군께서 가시는 길은 언제나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대규모의 전쟁은 이것이 끝이겠지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업성 안 자사 치소로 들어가는 이의민은 곽봉과 마주쳤다.
“형님. 아주 잘 하셨소. 응? 그런데 그 자는....?”
곽봉 옆에 조조가 포박되어 끌려 나오고 있었다.
“맹덕.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군.”
“승상. 이 사람이 잘못 판단했소. 나는 나만이 이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할 영웅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승상께서 더 그에 어울리는 영웅이라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소. 그래서 승상께 무릎을 꿇기로 했소. 절 용서하시고 받아 들이실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승상께서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해 승상을 모시겠소.”
조조는 이의민에게 바짝 엎드렸다. 조조도 이의민이 얼마나 인재 욕심이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적들을 물리쳤지만, 상당수의 적들을 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지 않은가. 게다가 조조는 이의민이 수하로 만들었던 다른 인물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이의민이 나 같은 인물을 어찌 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실제로 조조의 생각처럼 이의민은 웬만하면 항복한 이들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조라면 이의민도 생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이 항복했다면 이의민도 순순히 그 항복을 받았겠지만, 조조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삼국지를 조금 밖에 모르는 이의민도 조조가 얼마나 위험하고 야심이 큰 인물인지 알고 있다.
“그래. 기회를 주지. 대신 자네에게 주는 것은 아니고, 자네의 수하들에게 한 번 물어보지. 날 따를 거냐고.”
“그, 그게 무슨....?”
“맹덕. 와신상담하고자 하는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저기 순욱이나 조인 같은 영웅들을 거느렸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하지 않나? 도부수들은 뭣들 하는가! 당장 이 가증스런 놈의 목을 쳐라!”
그렇게 조조의 마지막 수는 실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