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이것은 학이 아니다 (3)
이의민은 장비의 맹공을 계속해서 받아냈다. 천하의 이의민도 반격이 쉽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장비의 공격은 필사적이었고 끈질겼다.
수백 수천 번의 찌르기가 끝나고 장비가 숨을 헐떡였다. 반드시 죽이고자 했지만, 이의민은 끝내 장비의 모든 공격을 다 받아냈다.
“후후! 대단하구나. 역시 장비로다.”
어떻게 보면 관우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 정도였다. 확실히 장비는 관우와 더불어 삼국지 최고 무장 다운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의민을 넘지는 못했다. 장비는 모든 힘을 다 쓴 듯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의민을 노려보았다.
“이의민...!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싶었는데....”
끝까지 적의를 숨기지 않는 장비의 기세는 이의민으로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이의민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냥 대부를 휘둘렀다. 여기서는 그 어떤 칭찬보다 말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장비를 위한 것이다. 관우와 더불어 예전 자신의 우상이었던 장비에게 해주는 최고의 예우였다.
퍼걱!
단 한 번의 반격으로 대부에 장비의 목이 떨어졌다.
‘아쉽군....’
이의민은 장비의 머리를 보며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이제 이의민의 가슴을 끓게 만들었던 옛 영웅은 없었다. 아직 조운이 남아있긴 하지만 관우와 장비 없이 그 혼자라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아쉬움만 달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즐길 거리를 넘어서 고려 시절부터 가져왔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달려야했다.
‘가자! 이제 내 앞을 막을 것은 없다!’
이의민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적토마를 타고 계속 나아갔다. 몇몇 하북 군사들이 그 앞을 막았지만, 관우, 장비도 막지 못한 그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어린진의 1선은 전혀 이의민을 제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파됐다. 이후 퇴각을 하고 있는 2진이 이의민의 시선에 들어왔다.
“절대 놓칠 수 없다! 이랴!”
적토마는 이의민의 의중을 읽었다는 듯 더욱 속도를 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적토마가 지나갈 때 일어나는 풍압만으로도 주변의 군사들이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대부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휘둘러졌다.
퍼퍼퍼퍽!!
이의민이 하북군 2진 쪽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양떼 속으로 들어간 사자였다. 대부를 한 번 휘두르니 사방으로 육편이 날아올랐다. 하북군 군사들은 살기위해, 이의민을 잡아 큰 공을 세우겠다는 공명심이 아닌 정말로 살고 싶어서 이의민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도 그들의 살점과 뼈 파편과 함께 흩날렸다. 진부하지만 지옥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광경이다.
“크아악!!”
“괴, 괴물이다!”
“야차다!!”
오랜만에 전장에서 그의 오랜 별명이 다시 불리고 있었다.
하북군의 숫자가 빠르게 줄고 있었다. 그리고 이의민의 뒤를 따라 다른 이의민군도 하북군 1진을 뚫고 속속 합류했다. 단순히 합류를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것은....?!”
순욱은 2진까지 추격해오는 이의민군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의민군의 진법은 분명 학익진에서 언월진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린진을 쓴 하북군은 박살이 났다. 대신 하북군이 퇴각을 하려 할 때는 수월했다. 언월진은 적을 포위하고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그리 좋은 진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욱은 2진만큼은 큰 피해 없이 업성으로 퇴각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의민에게 발목이 잡힌 동안 이의민군의 진법이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언월진에서 학익진으로 말이다.
처음이 이의민군이 학익진을 쓸 때 그것을 비웃으며 박살내려고 했었던 순욱이지만, 지금 펼쳐지는 학익진은 너무도 두려운 진법이었다. 학익진은 모여 있는 적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진법인 만큼 지금 하북군에게는 죽음의 날개나 다름없다.
이제 와서 학익진에 강한 어린진을 다시 쓸 수도 없다. 이미 1진이 완전히 박살났는데 어찌 다시 어린진을 만든단 말인가.
“최대한 빨리 퇴각하라! 속도를 더 내라! 지금 당장 퇴각하지 않으면 여기서 전멸을 당할 것이다!”
결국 순욱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학익진의 날개가 자신들을 완전히 가두기 전에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순욱은 이의민군의 움직임 하나를 완전히 놓쳐버렸다.
순유는 매의 눈으로 하북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흠! 이 상태로 학익진으로 바꾼다면 뭉쳐있는 적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순유가 고민하는 것은 상대가 그냥 퇴각하려고 무작정 도망칠 때였다. 그럼 적들 중 일부는 학익진으로 확실하게 포위 섬멸할 수 있겠지만, 다른 갈래로 도망치는 적들은 잡기 힘들어 질 수가 있었다. 학익진은 한군데에 있는 적을 잡기에는 최적의 진법이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적을 잡는 건 힘든 진법이니 말이다.
그때 순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순유는 즉시 학익진의 한 곳을 담당하고 있는 곽봉에게로 갔다.
“위장군! 위장군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요? 순 군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실행할 것이오.”
“위장군께서는 지금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곧장 업성으로 가주십시오. 도망치는 적들보다 더 빠르게 말입니다.”
순유의 지시에 곽봉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자신이 빠지게 된다면 학익진을 완성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곽봉은 의문을 표하지 않고 순유의 지시대로 군사를 이끌고 업성으로 향했다. 여태껏 순유의 지시를 듣고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었던가. 순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는 곽봉이다.
“알겠소! 총군사. 군사들은 들어라! 우리는 지금 당장 업성으로 향한다!”
“충! 위장군의 명을 받듭니다!”
순욱은 곽봉의 부대가 학익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적들이 계속 학익진으로 자신들을 포위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익진을 상대로는 최대한 빨리 흩어져야 한다. 그럼 누군가는 반드시 미끼가 되어야 하는데....’
순욱이 둘러보니 그 미끼 역할을 해줄 인물이 없었다. 결국 순욱은 자신이 그 미끼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적들에게 잡히겠지만 대신 최대한 많은 군사들을 업성으로 퇴각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번 패전의 책임을 지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가 공달에게 완전히 졌구나.... 어리석구나. 문약. 공달을 인정한다면서도 내심 내가 그보다 낫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파 놓은 함정으로 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야.... 나 때문에 우리 군이 패배했다.’
순욱이 자책하는 것만큼 그가 모자라서 진 건 아니었다. 물론 순욱은 순유와의 수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건 사실이다.
순욱은 순유가 원하는 대로 진법 싸움에 스스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법을 운용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순유보다 모자란 건 아니었다. 정상적인 진법 싸움이었다면 순욱의 어린진이 순유의 학익진을 무난하게 박살내고 승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유 쪽에는 이의민이란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황충, 마초와 같은 상장들이 있었다. 이의민과 그의 상장들이 초반 어린진의 1진 공격을 한 차례 버텨준 덕분에 이의민군의 학익진이 언월진으로 바뀔 시간을 벌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순욱도 이의민이란 변수를 생각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순욱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의민이 가져올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할 수는 없었다. 이의민이 수만 명의 군사들이 만드는 진법의 상성을 잠깐이나마 막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번 전쟁에서 순욱과 순유가 가진 패가 애초에 달랐다. 이의민이라는 사기적인 패를 가진 순유는 장기로 치면 모든 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고, 순욱은 차포를 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순유가 수 싸움에서 절대적인 이점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
‘이의민이 다른 상장들과 함께 했을 때,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진법의 상성마저 뒤집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설마 공달은 그걸 노리고 계속 이의민 혼자 싸우게 놔두었단 말인가?’
물론 마지막 생각은 순욱의 오해였다. 이의민이 혼자 싸운 건 사실 그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일 뿐이니까.
어쨌든 순욱은 자신에게 주어진 패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소수의 별동대는 나를 따르라! 총군사인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적들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깃발을 들어라!”
스스로 미끼가 되어 이의민군을 유인하는 순욱. 학익진으로 보이는 이의민군은 그런 순욱을 따라가는 듯했다.
그 사이 전풍과 조인, 순우경 등은 각자의 부대를 이끌고 거대한 학익진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곧장 업성 쪽으로 향했다. 특히 조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순욱 쪽을 바라보고 복수를 다짐했다.
“순 군사. 내 순 군사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소. 반드시 이의민의 피를 그대의 무덤 위에 뿌리겠소.”
그렇게 조인이 이끄는 다수의 하북군이 업성 성문 앞에 도착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러나 굳게 닫힌 업성 성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조인은 다시 한번 성루를 향해 호통을 쳤다.
“지금 뭐하는 거냐? 어찌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이야?! 죽고 싶은 거냐?”
그때 성루 위에서 익살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난 죽고 싶지 않은데? 성문을 열고 싶지도 않고.”
“네, 네놈이 어찌...?!”
성루 위를 바라보는 조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곽봉이었다. 순유의 명을 받고 학익진을 벗어난 곽봉의 부대는 어느 새 거의 빈 업성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순욱이나 조인 등은 그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업성 성벽 곳곳에 이의민군의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조인 등이 잘 퇴각을 한 것인지 확인한 순욱은 그제야 자신이 곽봉의 부대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뿔싸...! 이번에도 학익진이 아니었구나....!”
그 사이 업성 성벽 위는 거의 정리가 되고 있다. 애초에 최소한의 군사들만 업성에 두고 거의 대부분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나온 하북군이었다. 그러니 곽봉의 부대 하나만 들어가도 막을 수가 없다.
곽봉의 부대 병력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조인과 순우경, 전풍의 부대가 업성을 다시 탈환할 수도 없었다. 성문이 굳게 닫혔으니 공성을 해야 하는데 바로 뒤에 이의민군 군사들이 추격을 해오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공성을 하겠는가.
그들의 방패막이 되어주던 성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뒤에서는 퇴각하라는 명이 들리는데, 퇴각을 할 곳이 없다. 하북군은 업성 성벽 위에 이의민의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는 절망에 물든 표정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