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62화 (162/175)

162. 이것은 학이 아니다 (2)

“군사! 군사! 순 군사는 대체 어디 갔단 말이냐?!”

하북군의 전체적인 지휘를 맡고 있는 순우경이 다급하게 외쳤다. 순욱의 부재는 금방 티가 났다. 매 순간마다 적재적소의 지휘를 내리던 그가 없으니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들마저 우왕좌왕했다. 그나마 중군을 맡고 있던 조인마저 감녕을 상대한다고 정신이 없으니, 병사들을 이끌 지휘관이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순우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군사들을 지휘하지만, 백전노장인 그도 진법은 잘 몰랐다. 정확히 어찌 군사를 이끌어야 할지, 지금 군사들을 이끄는 방향이 옳은 것인지 그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애타게 순욱을 찾았지만, 정작 그는 보이지도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순욱은 지금 업성의 간이 망루에 올라 있었다. 그는 전황이 전체적으로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정확히 보려고 지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렇게 망루에 올라 큰 전장을 한 눈에 내려다보고 나서야 순욱은 왜 자신의 뜻대로 어린진이 학익진을 격파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당했구나.... 공달에게 완전히 당했구나!”

순욱은 멍한 표정으로 간이 망루를 내려왔다. 총군사로서 이대로 충격 받은 채 멍청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순욱은 충격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순욱은 멍한 표정 그대로 다시 업성을 나가서 하북군 본대에 복귀했다. 한창 순욱을 찾던 순우경은 그제야 그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총군사!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게요?! 이 바쁜 와중에 총군사가 자리를 비우면 어찌 하냐는 말이오!”

순우경의 분노 섞인 외침에 순욱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 이대로 가면 아니 되오. 어서 군사를 물러야 하오....”

“그게 무슨 소리요? 총군사가 말하지 않았소? 우린 어린진이고 적은 학익진이니, 적을 관통하여 그대로 통과할 수 있다고.... 그렇게만 되면 필승이라고....”

“아니오. 적의 진법은 학익진이 아니오.”

“뭐요? 그럼 대체 뭐라는....?”

마침 순욱을 찾던 전풍도 합류했다.

“총군사! 적들이 뭔가 이상하오! 학의 날개 쪽에 위치한 적들이 점점 줄고 있소! 적이 사용하고 있는 진법이 정말 학익진이 맞소이까?”

전풍도 이미 이의민군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아니오! 적들에게.... 공달에게 속았소이다.... 처음에는 분명 학익진이었소. 그런데 군사들이 격돌하자마자 진법을 바꾼 거요. 학익진에서 언월진으로 말이오!“

“어, 언월진....! 언월진이었다니...! 측면의 그 많던 군사들이 그럼 모두 중앙으로 갔단 말인가?!”

전풍은 순욱의 말을 알아듣고 대경한 표정을 지었다. 순욱이 언급하는 언월진, 그것이 무엇인지 전풍도 알고 있었다.

언월진은 얼핏 보면 학익진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같은 진법이라 착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진법이었다.

학익진이 얇고 넓게 포진되었다면, 언월진은 반달모양으로 측면보다는 중앙에 군사들이 집중되어 있는 진법이었다. 그로 인해 적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화력은 학익진에 비해 매우 약한 편이지만, 대신 학익진의 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진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언월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어린진과 언월진이 학익진과 어린진처럼 상성인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얘기는 결국 두 진법의 대결은 상성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양 군사들의 전력에서 판가름 난다고 봐야했다.

그런데 지금 전황은 점점 하북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관우가 치명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장수의 머릿수와 기세에서 차이가 났다. 장비가 갑자기 이의민을 맡게 되자 제어할 장수가 없어진 마초가 날뛰면서 하북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대로 가면 하북군의 필패였다.

그걸 잘 아는 순욱이 외쳤다.

“모두 퇴각해야하오! 장군들은 퇴각할 준비를 하시오!”

그때 곽도가 악을 쓰며 순욱의 지시에 반대했다.

“지금 여기까지 와서 퇴각이 무슨 소리요? 지금까지 있었던 군사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자는 말이오? 기왕 이리된 거, 그냥 뚫어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아니 되오! 지금은 적들이 언월진으로 완전히 바꾼 상태요. 언월진은 어린진을 상대로 딱히 불리하지 않은 진법이란 말이오! 이 상태로 계속 전투를 하면 적진을 뚫는 것은 고사하고 날뛰는 적장들에 의해 전멸을 당할 거요!”

“젠장! 절대 갈 수 없소! 이 희생을 치르고 그냥 퇴각하자니! 어찌 주군의 뵐 면목이 생기겠소? 무조건 뚫을 것이오!”

곽도가 고집을 피웠다. 그로 인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퇴각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을 놓쳤다.

“으아악!”

“사, 살려....!”

전장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거의 대부분 하북군의 것이었다. 반면 이의민군은 언월의 형태를 유지한 채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계속해서 돌파를 고집하던 곽도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봐도 돌파가 되기는커녕 전멸을 면치 못할 것 같으니 어찌 퇴각하지 않으랴.

“퇴각... 퇴각하라! 전군! 업성으로 퇴각한다!”

한편 1선에서 잘 싸우고 있던 하북군의 장수들은 어리둥절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왜 갑자기 퇴각 징이 울린다는 말이냐?!”

조운은 황충과의 일기토를 멈추고 군사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허허! 이리 계속 나와 싸우기만 해도 되겠소? 나야 그래주면 좋지만 말이오.”

“크윽! 황 장군이라 했소? 다음을 기약합시다.”

조운뿐만이 아니었다. 장비도 그렇고 하후연도 퇴각 징소리를 듣고 영문을 몰라 했지만, 어쨌든 본대에서 지시가 떨어졌으니 따라야했다. 하지만 퇴각하고 싶다고 해서 자유롭게 퇴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의민은 관우를 데리고 도망치려는 장비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지. 여기가 오려면 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뒷간인줄 아느냐? 뭣들 하느냐? 적들이 도망치려한다! 적들이 이대로 내일 해를 볼 수 있도록 놔둘 것이냐?!”

“아닙니다!!”

이의민과 군사들의 기세가 순간 변했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는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이의민은 어떻게든 관우를 등에 업고 가려는 장비 앞을 막았다. 관우는 이의민의 등에 업힌 채 계속 피를 토했다. 이미 가망이 없어보였다.

“쿨럭! 쿨럭! 크으으! 익덕! 나를... 버리고 가라... 난 이미 틀렸다.”

“형님!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시오!”

이의민은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 같은 관우를 향해 예를 다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미안하지만 운장. 장비도 돌아갈 수 없을 거요. 그 동안 즐거웠소.”

“나야 말로 영광이었소.... 승상. 저승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겠소....”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눈을 감는 관우. 장비는 그런 관우의 몸을 흔들며 울부짖었다.

“형님! 운장 형님!!”

장비의 눈이 완전히 돌았다. 친형제 이상이었던 관우의 죽음에 눈에 뵈는 게 없다. 퇴각이고 뭐고 다짜고짜 사모를 이의민에게 휘둘렀다. 확실히 분기탱천한 장비는 이의민으로서도 쉽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장비의 강력한 공격에 잠시 수비에 집중하는 이의민이다.

장비가 잠시 이의민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이는 하북군 전체로 보면 좋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장비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를 따르는 하북군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조운이나 하후연 역시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장비를 불렀다.

“장 장군! 정신 차리시오! 지금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퇴각해야 하오!”

하지만 조운과 하후연이 외치는 소리는 장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 황충을 필두로 마초, 위연, 감녕, 곽봉 등이 조운과 하후연, 그리고 하북군을 포위했다.

“후훗! 다들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여기서 죽게 된다!”

사방에서 이의민군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분명 병력은 비슷했지만, 왜 인지 이의민군이 훨씬 더 많게 느껴졌다. 아까 전에는 상대와 대등하게 싸웠던 조운과 하후연도 수세에 몰렸다. 그만큼 주변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곽봉은 하북군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릴 비책을 가지고 나왔다. 아직까지 데리고 다니던 원소군 포로들까지 끌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북군에게 항복 권유를 하게 했다.

“다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승상께 항복하면 단순히 목숨을 건지는 정도가 아니다! 난 승상께 항복한 이후 줄곧 후회했다. 왜냐고?! 왜 이제야 항복을 했는지, 원소 밑에 있었던 지난날이 후회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 포로가 되니 원소군 병사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우리들을 그저 장기 말로만 보는 원소보다는 승상을 따르자!”

그들의 외침으로 무기를 떨어뜨리고 백기를 드는 하북군이 점점 늘어났다.

순유는 그런 전장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면서, 순욱에게 최후통첩을 가했다.

“문약! 포기하시오! 이미 승패는 판가름이 났소. 더는 헛된 희생을 치르지 말고 그대도 백기를 드시오. 그럼 승상께서도 그대를 중히 쓰실 것이오.”

이에 순욱은 악을 쓰듯 외쳤다.

“닥치시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소!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남은 군사가 있고, 업성으로 들어가서 잘 지킨다면 충분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소! 모두 귀를 닫아라! 적들의 얘기는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아직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여태껏 순욱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 왔던 하북의 군사들도 이번에는 의문을 품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순욱의 얘기와는 달리 하북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였다.

“제길! 이대로 우리더러 개죽음을 당하라는 건가?”

“쳇!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는 순 군사의 얘기다! 이미 우리는 패했어. 여기서 어찌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냥 무기를 내려놓고 승상께 항복하자!”

순욱은 1선의 하북군 군사들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1선 군사들은 포기하고 어린진 2선의 본대 군사들만이라도 퇴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만총이 나타나서 2선의 중군을 휘젓고 있었다.

“하하핫! 어딜 가려고 하느냐? 너희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

사방이 이의민군인 것 같았다. 순욱과 전풍, 조인, 순우경 등은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2군 군사들만이라도 퇴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래도 확실히 그들은 마지막 남은 하북의 명장들과 명참모다웠다. 어떻게 손 써볼 틈도 없는 상황임에도 그들은 침착하게 한 명의 군사들이라도 더 퇴각시키기 위해 군사들을 지휘했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소! 부대를 여러 갈래로 퇴각시켜 각자 도생에 기대야 하오. 내가 중군에 남아 계속 지휘할 것이오! 조 장군과 순우 장군, 두 분은 군사들을 나눠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빠지시오!”

하북군 1군의 희생으로 2군은 퇴각할 길이 보이는 듯했다. 이들의 앞을 막는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뻘건 잔상을 남기고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이들에게 돌진해 들어오는 이가 있다. 어느새 1군을 돌파하고 2군까지 노리는 이의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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