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이것은 학이 아니다 (1)
하북군은 이의민군의 정중앙을 박살낼 것 같은 기세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어린진의 위력이었다. 어린진이 한곳을 목표로 삼고 돌파를 하려하면 웬만해서는 막아내기가 힘들다. 특히 군사들의 배치가 가로로 쭉 늘어져 있는 학익진은 상성 중에 상성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익진의 중앙에 이의민이 있다. 여태껏 그 어떤 상식도 다 파괴해버리고 날뛰었던 이의민이 말이다.
“하아앗!!”
이의민은 한 차례 포효를 터뜨리고 적의 어린진 꼭지 점을 향해 다가갔다. 적들이 무서운 기세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의민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됐다. 아무리 강한 기세로 온다고 한들 오는 족족 대부로 박살을 내버렸다.
군사들이 당하는 것을 본 관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조운과 함께 이의민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자룡! 이의민을 막으러 가세!”
“예! 장군!”
또 다시 2대1 일기토가 시작되나 했는데, 오늘은 평소와 모양새가 좀 달랐다. 늘 혼자 다니던 이의민 곁에 황충과 마초가 딱 붙어있었다.
그간 이의민은 계속 혼자 다니며 2대1 일기토를 했었지만, 오늘은 순유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저하게 승리를 위한 싸움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서 적들이 원하는 대로 2대1 승부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주군. 소장이 조운을 한번 상대해보겠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봐. 아마 좋은 승부가 될 거야.”
“자룡! 내 그대의 실력을 눈 여겨 보았소! 오늘은 나와 한번 어울려 봅시다!”
낭패를 느끼는 관우와 조운. 관우는 결국 장비를 불렀다.
“익덕! 아니 되겠다. 오늘은 네가 나와 함께 승상을 상대해야 하겠구나.”
“예! 형님!”
장비까지 불렀지만 역시 2대1 일기토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초가 나섰기 때문이다.
“주군! 소장이 저 장비란 자를 상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림이 얼추 맞는군! 흐흐!”
장비까지 2대1 일기토에 가세할 수 없어졌다. 다급해진 관우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자신과 함께 이의민을 상대할 장수를 찾았다. 조인은 뒤에서 중군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만 한 장수는 하후연 밖에 없었다.
“하후 장군! 그대라도 나와....!”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위연이 앞으로 나와서 하후연과 싸울 준비를 했다. 관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이의민이 더 이상 자신들과 2대1 일기토를 해줄 마음이 없다는 걸 말이다.
“승상... 이제 혼자 나서기 두려우신 거요?”
“흐흐흐! 혼자 나서기 두렵다라.... 솔직히 여태껏 두 명이서 계속 덤벼왔던 그대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소?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할 터인데... 물론 이해는 하오. 내가 좀 강해야지... 어쨌든 내가 기회를 준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또 기회를 달란 말이오? 이제 무도로서 승부를 볼 시기는 지난 것 같소. 이제는 철저히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오. 군사들이 나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 이상 즐기기도 좀 그렇고.... 그리고 그것이 그대에게도 덜 부끄러운 일 아니오?”
관우의 붉은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의민의 말대로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름 다시 2대1 일기토를 유도하기 위해 격장지계를 쓴 것인데, 오히려 안 쓴 것만 못하게 됐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이 자리에서 승상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게 되었다.’
관우는 마음을 다잡고 청룡언월도를 치켜들었다. 사실 지금 이런 1대1 싸움이 관우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다시 정정당당하게 일기토를 펼치는 이의민과 관우. 그들을 시작으로 다른 장수들도 서로 각자의 상대에게 무기를 휘두르며 일제히 일기토를 벌였다.
오호대장군 다섯이 모두 이 자리에 있다. 원래 삼국지에서는 모두 촉한의 장수로서 활약했지만, 지금은 양패로 나뉘어서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렸다.
이의민과 관우의 일기토에서는 확실히 이의민이 한수 위의 실력을 보였다. 이전처럼 일부러 힘의 대결로 가지도 않았다. 초반부터 이의민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속도를 이용하여 관우를 공략했고, 기교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관우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른 장수들은 팽팽한 일기토를 이어갔다. 확실히 오호대장군으로 묶였던 그들은 서로 누가 우위랄 것 없이 대등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운은 힘과 속도에서 황충보다 더 우위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초반 분위기를 잡았다. 하지만 황충은 노련함으로 그 차이를 메웠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충의 노련함에 계속 말리는 조운이다.
“크윽! 정말 대단하시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난 황충이라 하오. 하북에서는 상산의 조자룡이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들었소.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조운과 황충의 대결이 정형화된 무도의 극을 보여준다면, 마초와 장비의 대결은 두 마리의 야수가 본능만으로 싸우는 것 같았다. 얼굴 생김새는 극과 극이지만 싸우는 방식은 거의 비슷한 마초와 장비다.
“네 이놈! 생각보다 잘 싸우는 구나! 딱 내 마음에 드는 놈이다! 이름이 뭐냐?”
“훗! 하북은 몰라도 적어도 중원에서는 내 이름이 더 유명할 것이다. 잘 들어라! 난 서량의 금마초다!”
“그래! 금마초라고 들어보았지. 소문대로 대단한 놈이구나!”
오호대장군들은 아니지만 하후연과 위연의 일기토 역시 나름 팽팽하게 진행됐다. 하후연이 좀 더 밀어붙이고 있긴 했지만 위연도 절대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승부가 팽팽해질수록 순유의 표정은 별로 변화가 없지만, 순욱의 표정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끌리는데....?’
사실 순욱은 장수들 간의 일기토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결국 진법을 운용하고 있는 군사들의 전투였다.
진법의 힘이 더해진 덕분인지 확실히 군사들의 대결에서는 어린진을 쓰고 있는 하북군이 학익진의 이의민군을 밀어붙이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순욱이 원하는 건 단순히 몰아붙이는 정도의 그림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벌써 적 학익진의 중군을 찢고 돌파를 했어야 했다. 물론 이의민과 그의 여러 상장들이 막고 있어서 라고는 하지만 어찌 이리 돌파에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원래 순욱의 생각대로라면 하북군의 어린진은 이의민군의 학익진을 만나자마자 박살을 내고 돌파를 했어야했다.
어린진의 뾰족한 선두가 학익진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학을 둘로 완전히 찢어버린다. 그렇게 양쪽으로 찢어진 학익진의 양 날개를 어린진의 중군이 정리한다. 순욱이 애초에 그려왔던 그림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학익진의 중군은 조금씩 밀리기만 할뿐 돌파를 당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 시간이 끌리는 동안 상대는 학익진의 강점인 측면 화살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붓고 있었다. 특히나 화살 공격에 취약한 어린진의 중군이 큰 피해를 받고 있었다. 중군에 있던 조인이 그나마 잘 방어를 해주고 있었지만, 진법 구조상 화살 공격에 취약한 터라 한계가 있었다.
“화살을 막아라! 방패를 더 높이 들어라! 무섭다고 방패를 내리고 엎드리면 다 죽는 것이다! 젠장! 거기! 방패를 들지 않고 무얼 하는가?!”
“장군! 중앙의 군사들의 피해가 너무 심합니다! 화살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돌파도 못하고 있는데 장수들의 일기토에서 서서히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쪽은 이의민과 관우 쪽이었다.
관우는 나름 필사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역시 이의민을 상대하기에는 실력 차가 조금 났다. 끝내 이의민의 대부에 어깨 쪽에 치명상을 받고야 말았다.
“크윽!”
거의 뼈가 보일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그럼에도 관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언월도를 휘둘렀다. 이의민은 그런 관우에게 다시 한번 감탄을 하며 끝까지 그를 명예롭게 보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때 둘의 신성한 일기토를 방해하는 이가 등장했다. 한창 마초와 싸우던 장비였다.
확실히 마초가 대단하다해도 아직 어렸다. 그래서 장비는 마초와 대등한 일기토를 벌이는듯했지만, 실은 주변을 둘러볼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던 중 이의민에게 당하기 직전의 관우를 발견하고 급히 도우러 간 장비다.
마초는 따로 지시받은 것이 있는지 그런 장비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나머지 하북군을 베었다.
장비는 관우를 구하기 위해 장팔사모를 이의민에게 찔러 들어갔다. 그렇지만 역시 먹힐 리가 없다. 가볍게 대부로 사모를 막아내는 이의민이다.
그렇게 이의민과 장비의 1대1 일기토가 이어졌다. 장비도 관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반에는 나름 이의민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 보였지만, 손발이 매우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이의민의 공격에 당할 것 같은 모양새다.
그 사이 하북군 군사를 상대하는 마초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의민군의 중군을 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는데, 마초까지 가세하니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곽도는 초조한 표정으로 순욱을 다그쳤다.
“문약! 그대의 말과는 달리 적 학익진의 중앙을 좀처럼 뚫지 못하잖소? 게다가 적장까지 저리 날뛰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오?”
순욱도 이제는 곽도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순욱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했다.
“당황할 거 없소. 계속 뚫으면 언젠가는 뚫리게 되어 있소.”
하지만 그건 확신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애써 잘 될 거라고 생각해보았지만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기만 했다.
결국 보다 못한 순욱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조인 장군! 그대가 저 마초를 막으시오! 그대가 아니면 막을 자가 없소!”
순욱의 지시에 따라 조인은 마초를 막기 위해 중군에서 선두로 갔다. 이 극약처방은 현재 하북군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이 전투에서 선두싸움이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싸움은 맞다. 하지만 순욱은 거기에 너무 집중해버린 나머지, 전장의 전체적인 상황변화를 놓치고 있었다.
순욱이 조인을 선두로 보낼 때 이의민군의 화살공격이 줄어들었다. 계속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더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 왜 줄어든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순욱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화살이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그 덕분에 조인을 선두로 보내도 되겠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평소의 순욱이라면 좀 더 그 이유를 고민했을 터인데, 지금은 마음이 급해서 생각을 미뤘다. 그리 생각을 미룬 대가는 컸다.
순욱의 눈이 커졌다.
조인의 앞을 가로막는 장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는 마초가 아니었다. 아까 별동대로 봤던 감녕이었다.
조인이 감녕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 여겨 놀란 게 아니다.
“가, 감녕?! 저 자가 어찌 저 곳에 있단 말인가?”
분명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감녕은 학익진의 우측 날개로 별동대를 끌고 퇴각했다. 그런 그가 학의 머리에 있다. 정상적인 학익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욱.
“크, 큰일이다!”
“문약! 왜 그러시오? 지금 그대가 성으로 돌아가면 어쩌자는 것이오!”
순욱은 전투 중에 다시 업성으로 돌아갔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누구보다 긴밀하게 지시를 내리고 지휘를 해야 할 총군사의 임무를 버리고 말이다. 그만큼 순욱에게는 확인이 필요한 것이 있었다.
순욱은 일전에 만들어 놓았던 망루에 다시 올라갔다. 뒤에서 곽도가 총군사가 전장을 떠나면 어찌하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망루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다보는 순욱.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학익이 아니다.... 이것은 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