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59화 (159/175)

159. 영천 순가의 두 천재들 (3)

순유는 고요한 눈으로 업성 성벽의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자신과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순욱이었다. 순유는 왠지 순욱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문약. 그대라면 분명 내 뜻을 알아차리겠지....’

얼마 후 성벽에서 알 수 없는 구조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순욱이 군사들을 지시해서 만든 간이 망루였다. 그곳에 순욱 등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순유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의 상황을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간이 망루가 지어지는데도 오히려 미소를 짓는 것은 상대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함이다.

얼마 후 업성 안에서는 분주히 군사들을 준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순유와 함께 초조하게 업성을 바라보던 유엽이 외쳤다.

“총군사! 성 안 쪽이 분주해진 것 같소. 적들이 총군사의 예상대로 나올 것 같소.”

학익진으로 이쪽에서 승부를 걸었다. 유엽은 그것을 순욱이 받아주지 않을지 걱정했다. 애초에 완성된 학익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순욱이 학익진을 과연 알아챌지가 걱정이었다. 만약 순욱이 학익진임을 알지 못하고 성문을 걸어 잠근다면 그 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모두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욱은 간이 망루를 지어 아군 진채 쪽을 살펴보더니 바로 공세에 나섰다. 순유의 승부수가 통한 셈이다.

순유는 옅게 웃으며 유엽에게 답했다.

“그것 보시오. 문약이라면 분명 우리가 준비한 것이 학익진임을 알아볼 거라 했잖소. 그리고 진법으로 싸움을 걸면 절대 피하지 않을 인물이 바로 문약이오.”

이윽고 거대한 업성의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순욱은 총력전을 준비한 듯했다. 자신 있는 진법 싸움에서 제대로 유리한 고지를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하북의 12만 대군이 거의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내로라하는 하북의 맹장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관우는 말을 채찍질하여 가장 선두로 나왔다. 그리고 그 좌우로 장비와 조운이 나란히 섰다. 하북군 대부분이 절치부심의 심정이었지만, 특히 이 세 사람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그들은 최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의민과 당당히 1대1 승부를 보려했던 관우는 결국 완패를 거두었고, 차라리 장렬히 전사했으면 모를까 조운의 도움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에는 더욱 굴욕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관우는 수치심을 참아가며 장비, 조운과 함께 이의민을 상대로 2대1 승부를 했다. 그럼에도 이의민을 제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의민과 싸우면 싸울수록 그가 점점 더 강해진다는 느낌만 받았다.

동시에 군사들 사이에서 도는 얘기도 점점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장군님들은 승상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보면 뻔하지 않은가? 2대1로도 승부를 내지 못하는 건 명백히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지.”

이제 그들도 자신들이 이의민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기토는 몰라도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조조의 휘하인 순욱의 지시를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오직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꾹 누르고 순순히 순욱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

“돌격하라! 순 군사의 지시대로 따라라! 한 치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거기!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잖은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겠느냐?!”

이의민군 역시 한 치의 방심 없이 적군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했다. 순유와 유엽 등이 고함을 치며 군사들을 다그쳤다.

“정신 차려라! 조금 있으면 적군이 도달한다! 철저히 연습한대로만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승리에 도취되어 적군을 얕보지 마라! 방심하여 실수를 한다면 그때 우리에게 패배가 찾아올 것이다!”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는 군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적군보다 아군의 방심이다. 순유와 유엽은 그 점을 군사들에게 계속 주지시키면서 철저하게 군사들을 통솔했다.

그 덕분에 군사들은 자만하지 않고 조금의 실수나 흐트러짐 없이 연습한 그대로 움직였다. 확실히 순유와 유엽의 통솔 능력은 여느 장군들 못지않게 대단했다.

그때 유엽이 순간 다가오는 적군을 보더니 크게 놀라 순유에게 소리쳤다.

“총군사! 적들을 보십시오! 어린진이 아닙니다!”

순유는 유엽에게 적들이 어린진으로 올 거라고 얘기했었다. 실제로 순욱은 어린진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북군이 돌격해 들어오는 진형을 보면 도저히 어린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정확히 일직선으로 돌파해 들어오는 형태의 장사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장사진은 학익진을 상대로 상성에서 매우 불리한 진법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학익진을 준비하는 이의민군 입장에서 환호성을 지를 만한 일이다. 하지만 유엽은 오히려 당황했다.

그만큼 순유가 확고하게 예상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상대가 순욱이란 점이 유엽을 불안하게 했다. 순유가 뻔해 보이는 함정을 적에게 보여주었지만 사실은 숨기고 있던 비장의 무기가 따로 있었던 것처럼 순욱 역시 그런 것을 숨기고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유엽의 걱정대로였다.

“아니오. 지금은 마치 장사진을 형성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오. 문약의 능력이라면 저리 군사를 이동시키다가도 순식간에 어린진을 완성시킬 거요. 토끼가 범의 아가리로 들어오는 척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 토끼가 아닌 돌덩이인 것이지요.”

순유의 설명대로였다. 돌격해오는 하북군은 얼핏 보면 장사진을 구성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장사진을 완성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점점 이의민군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진형을 조금씩 변경하고 있었다. 군사들끼리 부딪히기 직전까지 장사진인척 하며 들어오다가, 부딪히는 순간 어린진을 완성하겠다는 속셈이다.

유엽도 순유의 얘기를 알아듣고 감탄을 내뱉었다. 순유와 순욱의 지략 대결을 옆에서 지켜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장사진인척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어린진으로 바꾸는 순욱이나 그걸 예상하는 순유나 가히 용호상박이라 할 수 있다.

‘허어! 군사들을 저 정도로 정교하게 다룰 수가 있다니.... 총군사나 적 군사인 순욱이나 정말 대단한 자들이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이름이 아깝지가 않군.’

그 지략 싸움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순유는 순욱을 이기기 위해 최후의 계책을 짜냈고, 순욱은 아직까지는 순유의 예측대로 움직이는 중이다.

순유와 비교해도 절대 모자라지 않는 순욱이 순유의 예측대로 하는 건 역시 순욱은 가지지 못한 절대무적의 패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현재 학익진에서 가장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진으로 적이 들어올 경우 가장 먼저 적과 맞닥뜨리게 되는 위치였다. 그리고 그 옆에로 마초와 황충, 위연이 도열해 있었다.

어린진은 빠른 기동력으로 좌우를 방어하며 힘을 한 점에 모아 한 곳을 터트리는 진형이다. 어린진이 적을 감싸는 형태로 들어오는 학익진에 강점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진형이 다 그렇듯 약점이 없는 진법은 없다. 어린진은 기본적으로 궁병의 공격에 취약하며 선봉에 있는 병사들의 피해가 엄청나고 기력 또한 엄청나게 소모됐다.

순유는 어린진의 이 약점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익진은 어린진의 약점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그냥 박살이 나는 진법이다. 왜냐하면 어린진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1선의 공격을 학익진의 가운데 부분이 제대로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순유는 이의민이라는 존재 하나로 진법의 상성을 뒤엎을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아무리 이의민이라 할지라도 수만 명의 군사들이 이루는 진법의 상성을 뒤집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낼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지만 말이다.

학익진 정중앙의 이의민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하북군을 보며 외쳤다.

“자! 잘 들어라! 우리의 작전은 별 거 없다. 그냥 앞에 오는 놈들을 다 때려 부수면 된다!”

“예!”

순유는 그런 이의민을 듬직하게 보았다.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이의민은 의심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학익진을 완성시킬 4개의 부대인데....’

지금 적군들을 바로 뒤에 달고 매복지 쪽으로 합류하고 있는 4개의 아군 부대였다. 4개의 부대 대장은 현재 장료와 만총, 감녕, 곽봉이었다.

다른 이들도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특히 곽봉이 걱정됐다. 이제는 군사들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 많이 올라온 곽봉이다. 하지만 태생부터 천상 장군인 장료나 만총, 감녕에 비하면 살짝 손색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곽봉 역시 아직까지는 순유의 기대에 부응하여 미끼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여기서 놈들을 잘 유인해야 한다! 너무 빨라서도 아니 되고 느려서도 아니 된다!”

‘나도 이제 위장군이다.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있는 만큼 밥값을 해야지. 언제까지 문원이나 백녕, 그리고 새로 치고 올라오는 장수들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건가? 보사 출신이란 것도 더 이상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위장군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의욕이 넘치는 곽봉이다.

“어이! 내 장군기를 더 크게 흔들어라!”

그런 곽봉을 바로 뒤에서 매의 눈으로 쫓는 자가 있다. 조인이다.

조인은 4개의 이의민군 별동대가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각자 약속이라도 한 듯 매복지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확인했다. 그건 성을 나오기 전에 순욱이 일러준 그대로였다.

‘역시...! 문약의 예측은 빗나가질 않는구나.’

조인은 순욱이 해주었던 조언을 다시 떠올렸다.

“조 장군. 잘 들으시오. 네 부대를 모두 잡으려하다가 한 부대도 잡지 못할 수도 있소. 적들의 학익진은 단 한 부대만 복귀하지 못해도 완성될 수 없소. 그러니 네 부대를 모두 쫓지 말고 가장 잡기 쉬운 한 부대만 쫓으시오.”

순욱의 얘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조인은 즉시 곽봉의 뒤를 쫓았다. 거기에 하후연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형님? 어디를 노리십니까?”

“묘재! 저기 저 깃발이 보이느냐?! 저건 위장군 곽봉의 깃발이다. 다른 놈을 쫓을 필요는 없다. 가장 확실한 한 놈만 잡으면 된다. 그러니 우린 위장군 곽봉을 쫓는다!”

“옛! 형님!”

조인과 하후연이 곽봉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의민군에서 가장 직위가 높으면서도 장군으로서의 능력은 별 볼일 없는 인물로 유명한 자가 바로 곽봉이 아닌가.

이의민군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세력에서도 곽봉은 오로지 이의민과의 인맥하나로 저 자리까지 올랐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장료나 만총은 부대를 귀신같이 부리기로 유명하고, 감녕은 유명하진 않지만 오히려 몰라서 위험할 수도 있다. 거기다가 감녕이 문추를 잡았다는 소문도 자자하니 역시 가장 노리기 쉬운 인물은 곽봉 밖에 없었다.

조인과 하후연은 즉시 관우, 장비, 조운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1선에 있는 장군들은 들으시오! 적들 중 저 깃발을 흔들고 있는 부대만 쫓으면 되오! 그 자가 바로 위장군 곽봉이요!”

조인의 외침 직후 관우, 장비, 조운, 하후연이 네 개의 부대 중 하나를 목표를 정해 맹렬히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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