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반딧불의 선택 (2)
공손속과 전예, 전주는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곽가 앞에 섰다. 이미 기주군의 뒤통수를 치면서부터 곽가와 한 편이 되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확실한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곽가도 그 뜻을 잘 알았다는 듯 경계하는 군사들에게 물렸다.
“되었다. 무기를 내려라. 이제 한 편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어찌 됐든 유주군 덕분에 손쉬운 승리를 가져가게 됐다. 곽가 입장에서도 굳이 이들과 날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서신은 잘 받았소이다. 역시 나를 속이려던 책략 따위는 아니었군.”
“그렇소. 광록훈.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돕고자 했소.”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어째서 갑자기 원소를 배신한 거요?”
곽가로서도 전예의 갑작스런 제안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전까지 딱히 하북 연합군이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이번 평원성 전투는 곽가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걸 전예나 공손속이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손을 잡자고 하니 곽가는 오히려 서신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손속이 나서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유주에서 있었던 일 모두와 자신들이 왜 곽가와 손을 잡으려 하는지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비에게 복수를 하고자 승상의 손을 잡겠습니다.”
“허어! 유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비, 그 자는 참으로 위험한 자요. 주군께도 보고를 드려야겠군.”
유비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 곽가는 이제 공손속의 무리들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물론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의민이 하겠지만, 그 전에 이들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원소를 배신한 것이구려.... 아무튼 적의 적은 친구라고 우리로서는 나쁠 건 없는데...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곽가는 공손속에게 다소 딱딱한 어투로 얘기했다.
“그대들이 하려는 것은 승상의 손을 빌려 복수를 하려는 것 아니오?”
“그, 그렇지요....”
“그런데 손을 잡자고 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는 얘기지 않소?”
공손속은 크게 당황했다. 지금 곽가가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손을 잡는다는 건 대등한 관계에서 동맹을 맺을 때 하는 얘기가 아닌가.
사실 공손속은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세력의 크기는 다르지만 이의민도 제후 중 한 명이고, 자신 역시 제후였으니 그냥 동맹을 맺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곽가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자신과 이의민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덜컥 남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이제 어엿한 제후 중 한 사람이다. 그리 쉽게 복속을 할 수는 없다.’
공손속은 머뭇거리면서도 동맹을 하겠다는 얘기를 꺼냈다.
“어찌 어폐가 있단 말이오? 난 승상과 같은 제후로서 동맹을 맺자는 것이오.”
이에 곽가는 다소 무례하게도 코웃음을 쳤다.
“하! 같은 제후라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는 구려. 지금 확실하게 알려주겠소. 지금 승상의 군대는 하북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멀리 익주에도 있고, 양주에도 있소.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오. 그 상황에서 유주 하나만 겨우 차지하고 있는 그대와.... 아니지. 지금은 그마저도 빼앗긴 그대와의 동맹이 승상에게 무슨 의미가 있소? 설마 그대들이 가진 힘이 승상과 대등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오?”
곽가의 신랄한 얘기에 공손속은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공손속 대신 전예가 나섰다.
“광록훈! 너무 무례하시오. 주군.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기입니다. 선친의 시신에 피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남의 밑에 들어가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전예와 한편이면서도 견원지간이 된 전주가 한마디 했다.
“흥! 그럼 이의민과 싸우기라도 할 것이냐? 지금 우리 꼴이라면 이의민이 아니라 여기 있는 광록훈의 군대만으로도 우린 전멸당할 거다.”
“닥쳐라! 그 이야기가 아니지 않느냐? 네놈은 이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으니 남 밑에 들어가는 게 쉽겠지만, 주군과 난 아니다!”
곽가는 둘이 싸우는 꼴을 보며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아무래도 얘기가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군. 잘 들으시오. 복속이란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꼭 나쁜 것만도 아니오. 그대도 원술이란 이름을 알지 않소? 그 역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승상께 복속된 자요. 요즘은 삼공에 올라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고 있지. 승상 밑에서 이리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소. 잠시 자리를 비켜줄 테니 한번 잘 생각들 해보시구려.”
그렇게 곽가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공손속과 전예, 전주만 남았다. 전예와 전주는 계속 말다툼을 벌이며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했다. 둘이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니 공손속의 의견에 따라 결정이 될 공산이 컸다.
“주군! 주군께서 결단을 내리시지요. 정말 승상에게 복속되시겠습니까?”
“아해야. 잘 생각해보아라. 이의민의 밑에 들어가지 못하면 복수도 없다.”
전예와 전주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공손속.
스스로 생각해도 곽가의 말대로 현재 승상의 위치에 있는 이의민과 자신은 너무 차이가 났다. 자신이 반딧불이라면 이의민은 태양이었다. 태양 빛에 반딧불을 더한다고 조금이라도 더 밝아지는가? 그리고 승상인 이의민이 아무 세력도 없는 공손속과 동맹을 맺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공손속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세상물정을 모르는지 알았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던 공손속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창 전후 복구를 하는 평원성 내부를 말이다.
평원성 백성들로 보이는 이들은 군사들이 나눠준 고기와 쌀로 밥을 지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군사들이 부서진 집들을 수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평소에 자신들을 수탈하기만 했던 관군이 갑자기 자신들에게 잘 해주니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백성들은 승상의 이름을 찬양했다. 황제를 연호하는 대신 승상 이의민의 이름을 목 놓아 외쳤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손속은 다시 곽가에게 갔다.
“광록훈께 한 가지만 묻겠소. 승상이 가고자 하는 길,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소? 옥좌요?”
곽가는 그 답지 않게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저 하늘이 점지해 둔 길로 갈 뿐,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오.”
곽가는 뜻이 모호한 얘기를 했지만, 공손속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승상께서는 황제가 되시려는 것이지요?”
“후후....”
곽가는 대답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공손속은 말을 이었다. 아까는 부끄러워서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저 민초들을 보니 확실히 느껴지오. 그동안 하북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이미 황하 이남 사람들은 모두가 승상 이의민의 이름을 높이 숭상한다고 들었소. 그리고 지금 승상의 군대를 처음 겪는 저 백성들도 모두 승상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소. 광록훈이 말한 하늘의 뜻이란 저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오?”
옅게 웃던 곽가는 공손속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 있게 얘기했다.
“바로 보셨소. 승상께서는 반드시 황제가 되실 것이오. 백성들이 저리 원하오. 저들을 보시오. 승상의 통치를 경험한 자들은 절대 승상께 반대하지 않소. 이런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어찌 나쁜 선택이란 말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 아니오? 지금 유비 같은 자를 확실히 잡아줄 수 있는 인물은 승상 밖에 없소. 그러니 승상 밑으로 들어오는 것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오. 그대가 승상을 확실히 따라 유비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승상께선 반드시 큰 상을 내릴 것이오. 승상께서는 자신의 사람은 무조건 챙기신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 거요. 운이 좋다면 그대는 전 공손 자사의 땅이었던 유주를 그대로 다시 다스리게 될 수도 있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소. 그대는 천하를 잡겠다는 야망이 있소?”
곽가의 질문에 공손속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공손찬의 장자로 살 때는 그냥 주변에서 천하를 제패해야 한다고 떠드니 그냥 그런 가보다 했다. 아비인 공손찬은 몰라도 공손속은 천하를 제패하는 것에 대해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내가 천하를 제패한다고....? 난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다.’
“광록훈의 얘기를 들으니 이제야 제 앞길이 보입니다. 복속을 선택하겠습니다. 전 장군. 부디 내 뜻을 따라주세요.”
공손속의 간곡한 얘기에 전예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전예로서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도 이의민과 맞붙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의민과는 딱히 원한관계도 없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주군인 공손속이 결정을 내렸으니 자신은 따라야 했다.
곽가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공손속과 전예, 전주를 환대했다. 이제는 확실히 같은 편이 되었으니 그만큼 챙겨줘야 한다.
“잘 생각하셨소. 내가 이 자리에서 약속해드릴 자리는 없소. 모든 것은 승상께서 결정하실 일이니 말이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오. 유비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업성으로 갑니까?”
“원래는 그리할 계획이었소만.... 그대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더 좋은 생각이 났소.”
곽가는 지도를 펼쳤다. 그의 손가락은 평원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업을 지나쳤다. 그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공손속과 전주가 도망치듯 내려온 길을 따라서 말이다. 곽가의 손가락은 최종적으로 공손찬의 본거지였던 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대들의 얘기대로라면 유비도 업으로 갔다는 것 아니오? 우리는 그걸 이용할 것이오. 바로 비어 있는 유주를 차근차근 점령한단 말이오. 업으로 갔던 유비는 이제 오도 가도 못할 것이오.”
곽가의 얘기에 공손속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비에게 빼앗겼던 유주 땅을 하나씩 회복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물론 그 주체는 이제 공손가가 아니라 이의민이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비가 현재 업에 있는데, 이의민이 거기서 유비를 끝낸다면 원수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유비가 같은 하늘 아래서 계속 살아있는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더 낫다.
그렇게 공손속까지 합류를 하자 곽가는 즉시 유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며칠 뒤 평원성에 5천의 군사를 남기고 나머지 군사들이 모두 빠져 나왔다. 원래 곽가의 군사들 7만과 유주군 4만까지, 도합 11만의 대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