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천재들의 수 싸움 (3)
전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평원성 쪽을 지켜보았다. 서로 간에 간자 따위는 절대 침투할 수 없는 철통같은 방어가 이어졌다. 그래서 전예는 작은 전투를 벌이는 척이라도 하면서 서신을 곽가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이곳에 있는 하북군의 총대장은 심배였고, 그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작은 전투든 큰 전투를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물론 원래 전예와 심배 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했으니, 심배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그냥 전투를 일으킨다면 의심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전투란 것은 한쪽만의 일방적인 의지로 일어나지 않는다. 곽가군이 호응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은 성 안에 틀어박혀서 도통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작은 국지전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하는 전예였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전예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대체 어찌 해야 곽가와 은밀히 접촉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전예에게 마침 좋은 소식이 들렸다. 곽가가 또 심배에게 장기를 제안했다는 소식이었다.
‘장기를 둔다라....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그 소식을 들은 전예는 즉시 심배에게 갔다.
“심 군사. 또 장기를 두러가는 것이오?”
이번에는 전예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있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최대한 이전처럼 불만 가득한 사람인양 행동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심배의 행동을 막아서도 안 됐다. 너무 강하게 항의하는 척을 하다가 심배가 장기를 두지 않는다고 하면 큰 낭패니 말이다. 물론 전예의 걱정과는 달리 그가 아무리 강하게 항의한다고 해도 자신의 행동을 멈추거나 바꿀 심배는 아니다.
‘적당히 화를 내는 척하면서 심배의 호위에 내 군사를 끼워 넣어야 한다.’
“그렇소만.... 내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적진의 탐색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오. 그걸로 문제 삼을 생각은 마시오.”
“그 소득도 없는 탐색은 대체 언제까지 하겠다는 것인지.... 에잉! 좋소. 그럼 그대의 호위 군사들 절반은 내 군사들로 하시오. 그대가 정말 그 탐색이란 것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 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니오?”
“참 나! 이게 단순히 상대를 지켜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인지 아시오? 병사들 몇몇이 아니라 당신들의 군사인 관정이 와도 모를 것이오.”
“어쨌든 우리는 무조건 봐야겠소.”
심배는 더 이상 전예와의 논쟁이 귀찮았다. 그래서 그의 요구를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장기에서 호위 군사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은 전혀 아니니까.
“알겠소.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단, 장기가 끝나고 괜히 군사들이 보고한 걸로 트집이나 잡지 마시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소?”
심배가 승낙을 하자 전예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의 호위군사가 될 이들에게 은밀히 서신을 내밀었다.
“이걸 곽가 쪽 호위 군사들에게 어떻게든 은밀히 전하라. 절대 기주군에게 들켜서는 아니 된다.”
군사들은 영문을 몰라 했지만, 현재 이곳에 있는 유주군의 최고 지휘관은 전예였다. 당연히 그가 까라면 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또 다시 시작된 곽가와 심배의 장기. 전예는 초조한 눈빛으로 그 둘의 장기를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둘 뒤에 서 있는 호위 군사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낸 호위 군사 하나가 곽가군 호위 군사에게 은밀히 서신을 전달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후 장기가 끝나고 각자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전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물이 엎질러지고 화살이 쏘아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미 서신을 전달했으니 기주군을 배신하고 이의민의 편에 붙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배신이 순탄하게만 진행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장기가 끝난 직후 심배로부터 받은 전갈 때문이다.
“뭣이? 3일 후에 평원성을 총공격 할 것이라고....? 하필이면 이때....”
지금까지 곽가와 마찬가지로 전혀 움직일 생각도 않던 심배가 갑자기 총공격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전이었다면 이제야 시원하게 움직인다며 이 소식을 환영했겠지만, 배신을 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은 최악의 소식이었다.
물론 전예가 곽가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곽가가 하북군의 총공격을 오히려 유도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전혀 불안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전예는 그걸 몰랐다. 곽가군의 위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곽가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었다.
“허어! 어떻게든 곽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터인데.... 관정 군사. 방법이 없겠소?”
군사인 관정에게 물었지만, 그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 우리가 뒤에서 그들을 치면 평원에서도 금방 대처를 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소. 그런데 군사들은 어떻소? 갑자기 동맹군을 친다고 하면 크게 혼란스러워 하지 않겠소? 5만 유주군이 다 내 뜻에 따르겠냐는 말이오.”
“그것 역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이들은 전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평소 심배의 기주군과 우리 유주군의 차별대우가 얼마나 심했습니까? 기주군을 친다고 하면 오히려 기뻐하면 기뻐했지 반발을 하는 군사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그리고 심배가 심어 놓은 간자들을 먼저 색출해야 되지 않소?”
엄연히 같은 동맹군인데 웬 간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말이 동맹이지, 근본적으로는 적이다. 당장은 같은 편이라며 손을 잡고 있지만, 이의민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그 직후 서로의 뒤통수를 노리고 싸울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전예처럼 아예 이의민과 손을 잡고 서로를 노리는 것까지는 생각 못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간자를 심어놨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실제로 전예 역시 얼마 전까지는 기주군에 간자를 심어놓았지 않은가.
전예의 우려에도 관정은 걱정이 없다.
“걱정 마십시오. 얼마 전 장군께서 심배에게 불만을 품고 진채를 살짝 옮긴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쪽 간자들의 활동이 어려워진 바람에 낭패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좋지요.”
“알겠소. 관 군사. 그럼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오.”
그렇게 3일이 지나, 심배가 얘기했던 총공격 시간이 다가왔다.
둥! 둥! 둥! 둥!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하북 연합군 10만이 한꺼번에 평원성을 향해 돌격했다.
심배는 기습을 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오히려 목소리가 큰 자들을 앞세웠다. 그들은 평원성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거 참! 쫄쫄 굶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하기 미안하다만, 우린 매일 밥과 고기를 원 없이 먹고 있다! 오늘도 출정 전에 먹고 왔지!”
“그래! 괜히 거기서 버티지 말고 얼른 투항하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배는 불려야지 않겠는가?!”
“투항할 자들은 군복을 거꾸로 입어라! 절대 죽이지 않겠다!”
하북군 군사들의 외침에 평원성 위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심배의 눈에 보였다. 심배는 그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적군을 동요시키기 위한 자신의 계책이 잘 먹혔다고 여겼다.
그 이후 평원성의 성문이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닫혔다가, 또 다시 열리고를 반복 했다.
‘크흐흐! 성 안에서 투항하기로 한 자들과 투항하지 않는 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렷다?’
“지금이다! 쳐라! 평원성의 문이 열리면 지체하지 말고 들어가라!”
심배의 명에 하북군, 정확하게는 기주군만 벌떼처럼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결국 평원성의 문이 닫히기 전에 많은 군사들이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기주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위는 온통 군복을 거꾸로 입은 자들만 있었다. 그들은 기주군 앞에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심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다들 우리 군에 투항하려는 자들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저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래. 다들 받아주겠다. 쌀은 오늘 전투가 끝난 후 지급될 것이다. 곽가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엄청난 포상을 내리겠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성 내 반란이 터지자 그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습니다. 소인이 그가 어디로 도망 쳤는지 알고 있습니다.”
“앞장서라! 장합 장군. 날 따라 오시오.”
심배는 투항한 곽가군의 안내를 받고, 곽가가 도망쳤다는 쪽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전예는 안절부절 못했다.
“이런....! 천하의 곽가가 이리도 허망하게 패한단 말이던가?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전예는 적당히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면 뒤에서 심배의 기주군을 칠 생각이었다. 8만 대 10만이고, 그것도 공성전이라면 분명 하북군이 절대 쉽게 이기지는 못할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곽가가 무너졌다. 기주군이 순식간에 평원성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 뒤를 치는 것도 부담스러워졌다. 유주군이 뒤를 치면 곽가군의 호응이 있어야 쉽게 기주군을 제압하는데, 곽가군 대부분이 이미 항복한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호응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곽가에게 서신도 전달해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런다면 유비에게 복수를 하려던 계획도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
공손속도 걱정스런 얼굴로 전예에게 물었다.
“전 장군. 이제 어찌 해야....?”
“지금 당장 기주군의 뒤를 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곽가를 모른 척 할 수도 없지요. 일단 심배의 뒤를 따르는 척 하면서 곽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라도 탈출시켜야 승상께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결국 전예는 심배와 장합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심배와 장합, 전예까지 곽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곽가의 모습이 심배와 장합, 전예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겁먹었거나 비통한 표정으로 있을 것 같던 곽가는 느긋하게 단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심배에게 말을 건넸다.
“오셨소? 그렇게 지고도 또 장기가 두고 싶었던 거요? 응? 그런데 함께 온 군사들을 보니 장기를 두려고 온 게 아니구먼.”
“흥! 애써 여유로운 척 할 거 없소. 이미 상당 수 군사들이 우리에게 투항했소. 그대도 괜히 허세를 부리지 말고 순순히 투항하시오.”
“응? 투항이라니...? 누가 말이오?”
“여기 군복을 뒤집어 입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응?!”
심배는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다가 크게 당황했다. 군복을 뒤집어 입은 채 자신을 안내했던 곽가군 병사가 없었다. 심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병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군복을 뒤집어 입었던 그 병사는 어느새 군복을 제대로 착용하고 있었다.
“심 군사. 대체 무얼 본 게요? 아무리 봐도 내 눈에 그런 자들은 보이지 않는데....? 흐흐.”
곽가의 낮은 웃음소리에 심배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이 곽가의 속임수라는 것을.
“적의 함정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항복한 것처럼 보였던 곽가군 군사들은 어느새 방심하고 있던 기주군을 무참히 도륙 내는 중이었다. 심배는 기습을 당했다는 것이 아찔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우리는 10만이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의 말대로 병력은 오히려 자신들이 더 많다. 그리고 어쨌든 성문을 넘어 무혈입성을 했으니 불리한 위치도 아니다. 그걸 믿고 평원성 안에서 제대로 싸워보려는 심배다.
하지만 곽가의 준비는 보통 철저한 게 아니다. 여기저기서 숨어 있던 곽가군 궁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많은 화살들이 평원성 안쪽에 몰려있는 기주군에 사정없이 떨어졌다.
“크아악!”
순식간에 많은 군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래도 장합의 활약이 빛났다. 안량과 문추, 고람과 함께 하북사정주로 꼽히는 장합이었다. 많은 군사들이 쓰러짐에도 아랑곳 않고, 직접 선두로 나가 화살을 쳐내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버텨라! 내가 앞에 서 있겠다! 나를 믿고 방패를 들어라!”
그런 장합을 지켜보던 곽가군 장수 하나가 나섰다. 거대한 것을 넘어 비대할 정도의 덩치를 지닌 장수, 허저다.
“흐흐흐! 이놈! 제법 재주를 보이는구나! 과연 내 앞에서도 재롱을 피울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