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천재들의 수 싸움 (2)
오래간만에 소주를 만나 반가웠던 전예. 하지만 그 반가움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다.
“크흐흐흑! 주, 주군께서 정말 돌아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전 장군....”
공손속으로부터 공손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예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구슬프게 울었다.
“대체 강건하시던 주군께서 어찌.... 어찌 돌아가셨다는 것입니까? 어찌 하루아침에 그리 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전예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예가 평원으로 떠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공손찬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다. 공손찬의 나이가 적지 않다고는 해도 그리 한순간에 갈 나이는 아니었다.
전예의 의문에 공손속은 자신이 추측하고 있는 부분까지 모두 얘기를 해주었다. 공손속의 얘기를 들은 전예는 당장이라도 유비에게 뛰쳐나갈 듯한 모습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유비! 이 악독한 놈! 그럴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주군의 원수를 갚겠다!”
전예는 원래 유비가 꺼림칙했다. 그래서 그가 공손찬 휘하에 들어온 이후로도 사사건건 그와 대립을 했었다. 하지만 공손찬은 충성심이 높은 전예를 내치고 유비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예는 공손찬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큼 공손찬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있는 전예다.
어쨌든 전예가 당장 군사들을 모두 끌어 모아 유주로 돌아갈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공손속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전 장군! 진정하시오. 이미 유주의 모든 것들이 유비, 그놈 손아귀에 들어간 지 오래요. 만약 전 장군이 유주로 돌아가 유비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허무한 죽음만 맞이할 뿐이오. 그리 되면 아버지의 복수를 영영 갚을 길이 없소.”
“소주! 그럼 소장에게 이대로 참고만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만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미 유비에게 어찌 복수해야 할지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공손속은 차분히 자신과 전주가 세웠던 계획에 대해 전예에게도 설명해주었다. 전예는 그걸 듣고 나서야 겨우 흥분을 진정시켰다.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소주? 소장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전주 선생이 내게 길을 알려줬소.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승상 이의민과 손을 잡는 것이오.”
공손속의 설명에 전예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이의민은 가장 두려운 적이자 가장 강한 적이었다. 원소와 한창 치열한 전쟁을 치르다가도 서로 손을 잡은 이유가 바로 이의민이 아닌가.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이의민의 군사들과 대립을 하고 있잖은가. 그랬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의민과 손을 잡으라고 하니, 전예 역시 처음 공손속이 보였던 반응처럼 빠르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의민과 손을 잡는다니.... 소장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전예가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자 전주가 나섰다.
“쯧쯧쯧! 뭐가 문제란 말이냐? 원수라 할 수 있는 너와 나도 손을 잡았고, 당장 저기 원소 놈들만 하더라도 얼마 전까진 적이었잖은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고, 반대로 오늘의 동맹이 내일은 다시 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너희들이나 우리나 이의민에게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 있는가? 복수를 해야 할 만 한 것이 있느냔 말이다.”
전주의 얘기에 전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말투였지만, 듣고 보니 전주의 얘기가 구구절절 옳았다.
전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전예가 당장 거부의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공손속은 여전히 불안했다. 전예가 전주의 얘기를 옳다고 느낀다고 해도 자신과 함께 할 지는 미지수다. 전예가 가진 공손찬에 대한 충성심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군주가 대를 이을 때 그 수하들 역시 후계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게다가 지금은 공손찬의 세력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예가 공손속에게도 충성을 바칠지, 그의 명을 들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 장군 어찌 하시겠소? 나와 전주 선생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없소?”
그런 공손속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전예는 공손속의 질문에 계성에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공손속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제부터 소장 전예는 소주를 주군으로 받들 것입니다. 그리고 주군의 뜻에 따라 이의민과 손을 잡고 유비에게 복수를 할 것입니다.”
감동하는 공손속.
“정말 모자란 이 몸을 따라주시겠소?”
“주군께서 돌아가셨으니 마땅히 그 분의 장자인 소주께서 그 뒤를 이으셔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소장 역시 주군을 따라야지요.”
“아아... 전 장군! 정말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지금 이렇게 주군과 소장이 신의와 충의로 묶였으니 지나온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입니다. 주군의 계획대로 하려면 이의민... 아니. 승상과 은밀히 접촉을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승상은 현재 업성에 있지 않습니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이곳 평원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겠소? 현재 이곳에 있는 광록훈 곽가는 승상이 곽봉, 순유만큼이나 신뢰하는 인물이오. 그와 접촉을 한다면 승상과 직접 접촉하는 거나 다름이 없소.”
“알겠습니다. 그럼 소장이 작은 전투를 벌이는 척하면서 곽가와 은밀히 접촉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이의민과 손을 잡기 위한 공손속, 전주, 전예의 은밀한 밀담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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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는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이들이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흐아암! 참으로 따분하구먼. 주군과 공달 형은 지금쯤 어디에 계시려나.... 어이! 거기! 심배에게 연통을 넣어봐라.”
“뭐라고 합니까?”
“장기나 또 한 판 두자고 해라.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이번에는 쌀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말이다.”
그에 부관은 바로 서신을 하나를 작성하더니 성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에 태사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전장 한 복판인데, 너무 여유로운 건 아니신지.... 자칫 군사들의 긴장이 풀릴까 염려 됩니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나도 태사 장군의 염려는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장기를 두자고 하는 게 아니오. 적에게 한 가지 속임수를 쓰기 위해 이러는 것이오.”
“소장이 어리석어 군사의 고견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장기를 두는 것으로 어찌 적을 속인다는 얘기입니까?”
“아까 내가 분명 장기를 둘 때 그냥 두지 말고 쌀을 걸자고 했잖소. 그게 무슨 의미겠소?”
“글쎄요... 말 그대로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 쌀을 걸자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태사자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후후! 그게 아니오. 심배는 필시 우리 군의 보급상황이 좋지 않다고 믿고 있을 거요. 그런데 내가 쌀 내기를 하자고 하면 심배는 어찌 생각하겠소? 틀림없이 우리 군의 보급상황이 좋지 않다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게 될 거요. 아마 몇날 며칠을 굶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소. 그럼 심배 입장에서는 이 지루한 대치 전을 끝내기 위해 모험을 걸어볼만 하지 않겠소?”
“오! 알 것 같습니다. 한데 그럼 처음 장기를 둘 때부터 쌀 내기를 했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왜 이제야....?”
“적을 속이려는 것도 너무 급하면 아니 되오. 처음부터 내가 대놓고 쌀을 내기로 걸자는 둥 얘기를 했다면 심배는 필시 의심을 했을 것이오. 하지만 이제야 내가 그런 내기를 제안하면 보급이 없는 상황에서 버틸 만큼 버티다가 수를 쓰는 것이라 믿을 거요.”
지금 곽가와 태사자의 대화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현재 곽가군의 보급은 심배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군사들을 끌고 청주에서 이곳까지 올 때만 해도 보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건 맞다. 천하의 곽가라도 군사들을 그리 빨리 이동시키는데, 보급까지 완벽히 챙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곽가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바로 오래 전 교역을 맺었던 백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즉, 곽가는 길태로 하여금 백제로부터 수입하는 군량 및 보급품들을 평원 근처의 항구로 도착하게 만들었다. 딱 곽가군이 평원성을 접수하는 시기에 맞춰서 말이다.
그러니 심배의 예측과는 달리 평원성 내에 있는 곽가군의 보급은 모자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넘쳐나는 중이다.
“역시 군사입니다. 고견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혹시 오늘 조식과 중식도 그러한 이유로 거르신 겁니까?”
“맞소. 오늘 호위도 좀 비리비리한 자들로 뽑으시오. 아주 못 먹은 티가 팍팍 나게 말이오. 자! 그럼 장기나 두러 가볼까.”
그렇게 곽가와 심배의 장기 2차전이 시작됐다. 역시 이번 장기도 곽가가 앞서나갔다. 심배의 말들을 잡아가며 그를 궁지로 몰았다.
고심이 길어지는 심배. 그런데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곽가는 살짝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심배를 도발했다.
“으음...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소. 그리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소.”
그런데 심배는 갑자기 장기에 대한 얘기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미안하오. 생각이 조금 길어지는 군. 그런데 봉효. 성 안에 식량이 없나보오? 호위하는 군사들도 그렇고, 곽 군사의 얼굴도 며칠은 굶은 사람 같소이다.”
“후후! 그럴 리가 있겠소? 성 안에는 먹을거리가 넘쳐 나오.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아니 될 정도지요.”
“그렇소이까? 그런데 그리 말하는 것 치고는 너무 마른 것 같소? 마치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난 본시 몸이 약한 사람이라 그런 거요. 신경 쓰지 말고 장기나 두시지요. 이거 시간이 너무 오래 끌리고 있습니다.”
“예. 이제 두겠습니다.”
심배가 다음 수를 둔 직후 곽가는 차로 그의 마를 따냈다. 심배는 핵심인 마를 빼앗겼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오늘도 내가 졌소. 못 당하겠군. 어이! 쌀을 가져와라!”
제법 많은 곡식을 가져오는 원소군. 하지만 8만 군사가 먹기에는 턱도 없이 적어보였다.
곽가는 쌀을 보자 눈이 희번덕희번덕 돌아갔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오늘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심배는 그것을 보고 곽가의 거짓을 정확히 잡아냈다고 여겼다.
‘흐흐흐! 이러고 먹을거리가 넘쳐난다고? 거짓말도 좀 믿게끔 쳐야지.’
“그런데 먹을거리가 많다던데 이리 쌀을 가져가봐야 쓸데가 있소?”
“뭐 당장 어디로 행군할 것도 아니고, 군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아니겠소. 아무튼 오늘 승부 즐거웠소. 그럼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소.”
그렇게 군량을 준 심배와 군량을 받아온 곽가 모두 돌아서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곽가가 막 평원성 안으로 들어오자 호위 군사 중 하나가 그에게 곱게 접힌 서신을 건넸다.
“응? 이건 뭔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적의 호위 중 하나가 제 소매에 슬그머니 이걸 넣어줬습니다. 군복을 보아하니 공손찬쪽 호위 같았습니다.”
“공손찬이 왜....?”
영문을 모르는 곽가. 서신을 펼친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