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천재들의 수 싸움 (1)
기주의 업성에서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평원성 쪽은 조용했다. 분명 이곳도 이의민의 군사들과 하북군이 맞붙는 전장인데 작은 전투도 없고, 오히려 분위기가 평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터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명 평원성을 두고 양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다. 곽가군은 평원성 안에서 나오지 않고 철통 방어를 하고 있고, 하북군은 평원성 바로 앞 벌판에 진을 쳤다.
그런데 바로 그 사이, 평원성 성문 근처에 두 사내가 한가롭게 장기를 두고 있었다. 양 군사들을 합하면 무려 18만이라는 대군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은 장소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두 사내 중 한 명은 곽가였다. 어찌 보면 괴짜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긴 했다.
“흐음... 정말 마(馬)를 잡으시겠다....? 그럼 그쪽의 차(車)가 위험할 터인데.... 한 번 두면 무르기 없소. 정말 그리 두시겠소?”
곽가의 질문에 상대 사내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정말 내 노림수를 모르고 그리 얘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기 위해 일부러 차를 언급하는 것인가....? 곽봉효.... 대면을 해보니 생각보다 더 무서운 자로다.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도 생각을 전혀 읽을 수가 없구나.’
지금 곽가의 상대는 현재 10만의 하북군을 이끌고 있는 심배였다.
곽가야 워낙 괴짜라고 소문이 났으니 전쟁 중 이런 기행을 일삼는 게 이해가 되었지만, 심배는 의외였다. 어쨌든 심배는 곽가와는 달리 나름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니까.
그런 심배가 왜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전장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장기를 두는 행위를 괴짜 곽가와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심배가 이러는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 곽가군과 하북군이 조우했을 때는 당연히 곽가군은 평원성 안에서 수성을 하고 있고, 하북군은 공성을 하려 했다.
그건 심배도 익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서 기다렸다.
‘지금이야 성 밖으로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지만, 저들은 분명 군량이나 물자가 부족할 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여유롭게 곽가군이 먼저 움직일 것을 기다린 심배.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곽가가 아니라 오히려 심배였다.
‘아니? 분명 모든 것이 부족할 터인데....? 이리 급히 저 많은 대군을 끌고 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지금쯤 군량이 다 떨어져서 군사들은 배를 곯고 있을 것이다. 설마 백성들을 위한다고 그리 떠들어놓고 성 안 백성들을 약탈한 것인가? 그럼 분명 성 안에서 소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낌새도 없었고....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심배는 자신이 예측한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날 때마다 점점 초조해졌다. 그 말인즉슨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는 얘기니까.
‘정말 그 짧은 시간에 8만이라는 군사들을 다 부양할 정도의 보급물자까지 함께 가지고 이리 왔단 말인가? 그게 정녕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묘수가 있었던 것인가....?’
심배는 애초에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하북군에 좋다고 여겼다. 평원까지 급하게 오느라 곽가군의 보급물자가 부족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럼 적들은 수성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알아서 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굶어 죽든가 싸우다 죽든가 둘 중 하나인데, 무얼 택할 지는 뻔한 일 아닌가.
심배는 그래서 곽가의 의중을 알아보려 갖은 방법을 써봤다. 평원성 안으로 첩자들을 보내기도 해봤고, 성문 앞에서 온갖 도발을 하기도 하고, 슬쩍 화살을 날려 간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곽가군은 그저 성문을 닫고 방어에만 치중할 뿐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보낸 첩자들은 모두 빠짐없이 색출당해 효과를 볼 수도 없었다.
결국 심배는 오만가지 추측을 다 해봤지만 곽가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당최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때 곽가가 먼저 심배에게 장기나 한판 두자는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처음에는 심배도 당연히 대꾸할 가치도 없는 황당한 제안이라 여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과 같은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적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 만약 내 예상이 틀렸다면... 내 예상과는 달리 적들의 보급물자가 넉넉해서 충분히 오래 버틸 수 있다면.... 이대로 대치하는 건 결코 주군께 좋지 않다. 우리 대군들이 이대로 묶여 있다면, 업이 위험할 수도.... 차라리 곽가와 직접 대면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심배는 그렇게 곽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에서 같이 장기를 두는 중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심배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심배는 곽가군의 상태와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두면서도 슬쩍 슬쩍 질문을 던졌다. 곽가는 심배의 질문에 모두 대답하면서도 교묘하게 핵심은 모두 피해갔다.
오히려 곽가가 역으로 던지는 유도질문에 넘어갈 뻔 했던 적도 있는 심배였다.
‘이런....! 상대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군의 정보를 주겠구나!’
그 상태에서 장기마저 불리한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심배는 장기를 통해 곽가의 의중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접고, 그냥 장기에 집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의 수 싸움에서 계속 밀리니 장기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다.
곽가나 심배 같은 모사들은 다른 건 몰라도 머리를 쓰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승부욕이 강하지 않던가.
그렇게 심배는 장기에 집중했다.
‘마를 잡고 차를 준다. 그럼 바로 이 상(象)길이 열리고, 그걸로 인해 5수 안에 왕을 잡는다.’
마를 잡고 차를 내주는 듯한 심배의 수는 사실 왕을 잡기 위한 외통수였다.
곽가는 마치 도발하듯 그 수를 꼬집었지만, 심배는 곽가가 그 수를 보지 못했을 거라 믿고 그냥 두었다.
“때로는 뼈를 취하기 위해 살을 내줄 수도 있어야 하는 법이오.”
“하하! 그거 꼭 심 군사의 이야기 같소?”
“분명 사심 없이 장기 한 번 두자고 한 거 같소만?”
“뭐 이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오? 자! 그럼 제가 둘 차례군요.”
곽가가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곽가는 뻔히 취할 수 있는 차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심배가 신경도 쓰지 못했던 포를 하나 움직였다. 그 포는 정확히 왕을 향하고 있다. 외통이다.
심배의 표정이 굳었다. 장기에서도 완벽히 패배였다.
심배는 집중을 했던 장기마저 곽가에게 완패하니 좌절감이 온 몸을 덮쳤다.
‘이것마저....’
그래도 곽가에게 티를 낼 수는 없기에 심배는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끙! 졌소이다... 대단하군. 군략만 밝은 게 아니라 장기도 아주 능하시군.”
“후후! 둘이 다르다면 다르지만 같은 것이 많지요. 군략이든 장기든 결국 수 싸움이 아니겠소? 심 군사의 생각도 그러하지 않으시오?”
군략이든 장기든 넌 내게 안 된다는 걸 선언하는 것 같았다. 곽가의 도발에 심배는 뼈를 맞은 듯 아프다.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만, 장기는 결국 놀이일 뿐이오. 어찌 실전과 같겠소? 어쨌든 재미있었소.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봅시다.”
태연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이 씁쓸해진 상태로 돌아서는 심배.
그렇게 터덜터덜 돌아오는 심배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가 하북군 진영에 있었다.
“허어! 전장 한복판에서 저게 대체 뭣들 하는 짓이란 말인가?”
공손찬의 수하 장수인 전예는 심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손찬의 수하가 아닌 원소의 수하인 심배가 현재 하북군의 총대장을 맡고 있으니 그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맞서 싸워야할 적인 곽가와 함께 기행을 펼치니 더욱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공손찬군의 실책으로 청주 원정에서 실패를 했으니 그동안은 전예도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은 한 마디 해야겠다고 여기며 심배에게 다가갔다.
“심 군사! 내 가만히 있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소. 이게 지금 뭐하자는 짓이오?”
“뭘 하긴.... 적의 대장인 곽가의 동태를 살피고 왔잖소.”
“지금 한가하게 동태나 살필 때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그냥 평원성으로 밀고 들어가자고 내 말하지 않았소?”
“적들은 평원성을 끼고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소. 거기다가 무작정 공격을 하자는 건 아까운 군사들의 목숨을 그냥 버리자는 얘기요.”
“그럼 이대로 서로 놀고만 있자는 거요? 그대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적들이 알아서 나올 거라고 해서 기다렸소. 그런데 지금 얼마나 기다렸소? 그대의 말이 맞는 것이 없잖소.”
심배는 피곤해졌다. 안 그래도 곽가에게 장기마저 져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전예마저 사사건건 따지고 드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평소 같으면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설득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만 하시오! 그래서 그대들에게 총대장을 맡기고 그대들의 의견대로 군사들을 이끌었을 때 결과가 어땠소? 그러나 우리는 승리를 하지 못했지만 아직 패배한 적도 없소. 혹시라도 패배를 하면 그때나 따지시오!”
심배는 청주에서의 일을 들먹이며 전예의 얘기를 일축했다. 전예도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대신 화를 내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올 뿐이다.
“빌어먹을! 그놈의 청주 얘기는 언제까지 우려먹으려고....!”
전예가 애꿎은 탁자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부관이 보고를 해왔다.
“전 장군. 유랑민으로 보이는 백여 명의 무리들이 전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그냥 내쫓을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장군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전예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지금 나보고 거지새끼들 뒤처리나 해달라는 거냐?!”
“아, 아닙니다! 그럼 당장 그놈들을 내쫓겠습니다.”
“아니다! 감히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다. 내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면 어찌 되는지도 가르쳐 줘야지.”
전예는 이 끓어오르는 화를 풀 대상을 찾았다고 여기고 직접 유랑민들이 있다는 곳으로 갔다.
“어떤 놈이냐?!”
전예가 가니 유랑민 중 하나로 보이는 자가 반갑게 외쳤다.
“전예 장군! 오랜만이오!”
전예는 순간 기가 찼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거지같은데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해대니 말이다.
“이 거지 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내 이름을 팔아?!”
즉시 칼을 뽑는 전예. 하지만 유랑민들은 겁이 나지도 않는지 전예에게 따졌다.
“뭣이?! 이 거지 놈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누굴 보고! 우리는 유주 자사 유우님을 따르던 사람이다! 네놈들의 간악한 간계에 원통하게 돌아가신 유우님 말이다!”
유랑민의 외침을 들은 전예는 더욱 황당했다.
“하! 유우? 이 놈들이 돌았구나! 여기가 어딘지 알고 유우의 잔당들이 왔단 말인가?!”
전예는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유랑민들을 벨 것 같았다. 그때 전예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유랑민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외쳤다.
“저, 전 장군! 정말 나를 모르시오?! 나요! 속이요! 공손속이란 말이요!”
“그 무슨 개소리를....? 응?!”
전예는 처음 보는 유랑민이 자신을 공손속이라 하자 개소리라 치부했다. 그런데 자세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니 어딘가 낯이 익다. 그간 고생을 많이 하고 제대로 씻지 못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정말 공손속과 닮았다. 전예가 공손속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 그의 얼굴이 변한 것도 있지만, 설마하니 이곳에서 자신의 소주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억! 저, 정말 소주셨군요. 소장 전예. 소주를 뵙습니다.”
공손속을 알아본 전예는 그 즉시 칼을 땅바닥에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 유랑민들을 잡아두고 있던 유주군 군사들 역시 혼비백산하며 엎드렸다.
혹시나 전예가 자신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이던 공손속은 기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오. 전 장군. 내 꼴이 지금 이래서.... 어서 일어나시오.”
그때 전주가 혀를 차며 공손속을 타박했다.
“쯧쯧! 아해야. 지금 네가 왔다고 광고라도 할 셈이냐? 왜? 아예 원소 쪽에도 인사를 가지 그러냐?”
소주에 대한 무례한 언행에 분노한 전예. 게다가 상대의 얼굴 또한 기억이 났다.
“네놈은 필시 유우의 구신이 아니더냐?! 전주라고 했던가?”
“칼은 치우지 그래. 내가 어찌 이곳까지 일부러 찾아 왔을까? 그것도 네 소주와 함께 말이야.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나?”
공손속도 전주의 얘기를 거들었다.
“장군. 전주 선생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입니다. 칼은 거두어 주시지요.”
“소주의 명이니 알겠습니다. 일단 소장의 막사로 가시죠. 아무래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손속과 전주, 전예는 함께 막사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