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어릴 적 우상 (2)
이의민은 관우의 필살의 공격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걸 피해...? 아니면 막아?’
관우의 공격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피할 것인지 말이다.
두 가지 선택지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다. 일단 이의민은 관우의 공격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럼 그냥 피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격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서면 관우에게 반격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상대의 공격에서 도망치기만 할뿐 공격적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리 한다면 단순히 공격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스스로 자존심도 상하는 것 같았다. 관우의 이번 일격필살 공격은 마치 넌 절대 이걸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번 공격을 그냥 피한다면 이의민은 관우와의 승부에서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공격을 막아내는 걸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럼 관우와의 승부를 피하는 것도 아니었고, 만약 이 공격을 방어해낸다면 이후 반격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섣불리 선택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지금 관우의 공격은 강맹한 힘을 담고 있었다. 이의민조차 무조건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위력이었다.
위험부담을 최대한 배제하자면 당연히 피하는 걸 택해야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반격의 실마리를 놓치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인으로서 자존심을 저버리기 싫었다. 이의민이란 사내의 성정이라면 당연히 피하는 것보다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막아내 주마. 지금까지 힘의 대결을 해왔는데 피해버리면 모양 빠지잖아.’
그 어떤 변칙도 속임수도 없는, 오로지 강력한 힘 하나만 담긴 일격이 이의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정직하고도 순수한 공격을 남자로서, 무인으로서 받아내기로 결심한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머리 위로 대부를 힘껏 치켜들었다. 이의민 역시 그 어떤 속임수나 기교도 없이 순수하게 힘으로 언월도를 막겠다는 의지였다.
퍼퍼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의민과 관우 주변으로 충격파가 발생하고, 흙먼지들이 그 충격파로 인해 넓게 퍼졌다. 땅은 진동했고, 심지어 이의민이 딛고 서 있는 땅은 금이 간 것 같았다.
‘크으윽! 이것이 관운장의 힘....!’
이의민은 관우의 언월도를 막아내는 순간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여태껏 그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압력이었다. 그 대단한 이의민도 순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무릎을 살짝 굽힐 정도였다.
그래도 이의민은 버텼다. 땅이 갈라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이의민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을지언정 완전히 굽혀지지는 않았다. 관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난 신력을 가진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마음먹은 대로 언월도를 막아내고 있다.
관우는 이 일격으로 이의민을 어떻게든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듯 언월도를 거두지 않고 더 압력을 가해왔다.
그로 인해 이의민이 딛고 있는 땅은 더 갈라졌고, 흙먼지는 더 크게 퍼지며 둘을 휘감았다.
“시, 신장의 대결이다!”
“사, 사람이 아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 이리 외칠 수밖에 없다. 이게 어찌 사람과 사람 간의 대결로 보이겠는가. 사람과 사람의 대결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땅이 갈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있을 수 없는 광경을 이의민과 관우는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이의민과 관우의 일기토를 볼 수 없었다. 이의민의 발아래에서 소용돌이치던 흙먼지가 점점 그 범위를 넓히더니, 이윽고 둘의 신형을 완전히 감쌌다. 곧 둘의 모습은 육안으로 전혀 확인이 되지 않았고, 흙먼지 안에서 들리는 굉음으로 상황을 파악할 뿐이다.
쿠콰쾅!!
흙먼지가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그 안에서 다시 한번 천둥소리가 났다. 관우가 추가 공격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의민이 반격을 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 어찌된 것이지? 승상! 승상!”
“관 장군!!”
양 측의 군사들은 각자 이의민과 관우를 불렀다. 하지만 흙먼지 안에서는 둘 중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업성 성루에서 흙먼지 안을 조용히 노려보던 한 장수가 먼저 움직였다. 말을 타고 재빨리 성문을 나온 그는 곧 거대한 흙먼지 돌풍 속으로 들어갔다. 이의민군 장료와 곽봉 등이 깜짝 놀라며 같이 따라 들어갔다.
흙먼지 속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들도 알 수 없었지만, 상대 쪽에서 장수가 먼저 들어갔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라도 그가 관우를 돕는다면 큰 낭패이리라.
“주군!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군! 의민 아우! 대답 좀 해보게!”
그때 흙먼지 안에서 장료와 곽봉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할 목소리가 들렸다.
“난 괜찮소. 형님.”
흙먼지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이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료와 곽봉은 크게 기뻐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이의민의 신형이 확실히 보였다. 이의민은 멀쩡한 목소리만큼 멀쩡하게 서 있었다.
“주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군께서 일기토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시는 걸 알지만, 적장 중 한 명이 주군을 노리려는 듯하여 급히 왔습니다.”
“그래. 의민이. 문원을 타박하지 말게.”
“상관없소. 어차피 일기토는 끝났으니....”
“예?”
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나니 이의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관우는 어디로 갔는지 이의민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의민은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의민이 바라보는 쪽을 보니 말 하나에 두 장수가 탄 채 업성 성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은 입에서 연신 피를 토하는 듯 보였는데, 그가 바로 관우였다.
이의민은 관우가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끝내 막아냈다. 이의민은 그 직후 바로 관우에게 반격을 가했다. 두 번째로 들린 굉음은 바로 이의민이 반격을 한 소리였다.
이미 일격에 모든 힘을 쏟은 관우는 그 반격을 막을 힘이 없었다. 반격해오는 이의민의 대부에 언월도를 뻗어보았지만 쏟아지는 충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사실상 이의민의 승리였다.
그때 지금 말을 타고 관우를 구출해가는 유비군 장수가 등장했다. 이의민도 바로 그의 존재를 눈치 채고 대부로 그를 베려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이의민의 대부를 피한 후 관우까지 구출해서 유유히 탈출했다. 이의민이 비록 관우를 상대하느라 많이 지친 상태라고 해도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관우와 대비되는 번개 같이 빠른 움직임이었다. 저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람은 천하에 흔치 않을 터.... 여포는 죽었고, 마초와 황충은 여기 있다. 그렇다고 장비라 하기에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것 같고.... 그렇다면 저 자가 바로 상산 조자룡인가...?’
짧은 역사 지식으로 상대의 정체를 나름 추측해보는 이의민. 그런데 그 추측이 정확했다. 지금 관우를 구출해가는 유비군 장수는 바로 조운이었다.
조운은 성루 위에서 이의민과 관우의 일기토를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 승부를 예측했다. 관우가 마지막 일격을 준비할 때도 이의민이 그걸 막아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조운은 관우를 구출하기 위해 바로 달려 나갔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그를 구할 수 있었다.
“관 장군. 괜찮으십니까?”
조운의 부름에 관우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입에서 피를 게워내면서 힘겹게 대답을 했다.
“크헉! 쿨럭! 쿨럭! 어찌.... 어찌 날 이리 치욕스럽게 만드는가? 자네는 날 승상과의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비겁하게 도망친 장수로 만들었네.”
“장군...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 뭐가 중요한지 잊으신 겁니까? 무인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이 전쟁의 승패입니다.”
“....”
조운의 차분한 얘기에 관우는 입을 다물었다. 관우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의민과 한바탕 일기토를 벌인 지금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치욕스러운 관우다.
아쉬운 눈길로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이의민의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가득해졌다.
“관우에 이어 조자룡이라... 이거 모처럼 싸울 맛 나는군. 흐흐흐!”
관우는 아직 죽지 않았고 조운까지 확인했다. 거기다가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장비도 이들과 함께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의민에게는 최고의 무대가 완성된 셈이다.
당장이라도 업성 안으로 들어가서 관우뿐만 아니라 장비와 조운과도 붙어보고 싶다.
‘앞으로도 날은 많으니 당장 급할 필요는 없지.’
이의민이 관우를 꺾으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이의민군 군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사기가 크게 올랐다. 반면 관우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북군 군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순유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황 장군! 기회요! 궁병들로 하여금 적 성벽 위를 공격하게 하시오!”
일반적으로 따지면 성 아래의 궁병들이 성 위의 군사를 공격하는 건 오히려 불리했다. 하지만 현재 성벽 위의 하북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움직이는 이의민군을 상대로 제대로 대처하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이의민군에는 위치적인 불리함을 극복할 병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르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란이 다시 등장했다. 이미 정란을 경험한 적이 있던 하북군은 기겁을 했다. 정란을 본적이 없던 하북군도 다른 하북군의 반응을 보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허억!!”
“이동하는 망루다! 저것이 또 나타났다!”
“뭐야? 왜 그러는가? 저게 뭔데 그리 놀라는가?!”
그렇게 하북군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정란에 타고 있던 이의민군 궁병들은 화살을 쏠 준비를 마쳤다.
“전원 사격!”
업성 하늘 위를 수천 개의 화살이 수놓았다. 그 화살들은 곧 업성 위로 떨어지면서 수많은 군사들을 쓰러뜨렸다.
“으아악!!”
“사, 살려줘!”
몇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나머지 군사들은 성벽 위를 지킬 생각도 않고 성벽 위를 이탈했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는 군사들의 모습에 누군가 칼을 들고 도망치는 군사의 목을 베었다.
“뭣들 하는가?! 자리를 지켜라!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는 자가 있다면 내 직접 그 목을 베겠다! 죽기 싫다면 자리를 벗어나지 말고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라!”
순욱이 재빨리 나서준 덕분에 군사들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방패를 들었다. 그 이후 하북군의 사상자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성벽 위의 수비도 다시 굳건해졌다.
생각보다 정란에 의한 피해가 크지 않았다. 업성이 다른 성에 비해 성벽이 더 높다는 것을 감안해도 훌륭한 수비를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순유는 훌륭한 수비를 해낸 순욱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역시 문약이로군.”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였다. 실제로 순욱이 결국 이의민 대신 조조를 택했다는 소식에 순유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었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싸워야할 적이다. 적의 활약을 보며 감탄만 할 수는 없다.
“문약 아니오? 내 예상은 했소만 역시 하북에 계셨군. 그래. 좀 지낼 만 하오?”
“공달!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이것이 끝이 아니오.”
“천하의 문약을 상대로 어찌 벌써 이겼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다음을 기대하고 있지요.”
순욱은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으면 도발이라 생각했겠지만, 상대가 순유인 만큼 진지하게 들었다. 순유는 뻔한 도발을 할 인물은 아니니 말이다.
영천 순가가 낳은 희대의 두 천재 순욱과 순유, 무인 못지않은 군사들의 싸움 역시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