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어릴 적 우상 (1)
상대를 바라보며 잔뜩 흥분해 있는 건 이의민 뿐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
관우 역시 이의민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관우란 인물이 누구인가. 관우는 스스로 가진 신력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여태껏 자신보다 강한 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의제 장비와 조운 역시 자신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최강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관우다.
하지만 상대인 이의민은 명실상부 중원 최강의 사나이로 인정받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의민과 맞붙을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무인으로서의 자웅을 겨뤄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세상은 관우의 이름을 아직 잘 몰랐다. 원래 삼국지에서야 여포 다음 가는 최고의 무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고, 장수로서의 종합적인 평가는 그보다 훨씬 앞서기에 사실상 최고의 장수로 평가받았다. 오죽하면 관우를 거의 신처럼 추앙할까.
하지만 지금 이의민이 끼어들어 조금씩 뒤틀린 채 흘러가게 된 중원대륙의 역사는 조금 달랐다. 원래 역사와는 달리 관우는 화웅을 상대한 적이 없고, 안량과 문추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당연히 반동탁연합과 같은 중원에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굵직한 활약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공손찬 밑에서 유우와 전쟁을 하면서, 잠깐 원소와도 전쟁을 하면서 그때부터 어느 정도 진가를 드러냈던 관우였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전 중원에 이름을 알리기에는 부족했다. 기껏 하북에서 서서히 이름이 퍼져가는 정도다.
자연스럽게도 호사가들 사이에 누가 중원 최고인지 가리는 논쟁을 한다면 오직 이의민과 여포, 두 사람의 이름만 들렸다. 물론 이의민이 여포를 참한 후부턴 오직 이의민의 이름만 들리게 됐지만.
그런데 이 자리에서 만약 관우가 이의민을 쓰러뜨린다면 그 모든 평가가 바뀌게 된다. 순위에서 언급도 되지 않던 관우가 순식간에 중원 최강의 명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관우는 중원 대륙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상상을 하며 청룡언월도를 꽉 쥐었다.
‘반드시 이긴다. 그리고 내가 최고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겠다.’
전설적인 인물을 드디어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는 흥분은 사실 관우보다 이의민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관우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 자신이 한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삼국지 최고의 장수로서 여포 따위보다 훨씬 더 추앙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연히 고려인이었던 이의민에게도 관우라는 존재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의민이 고려에서 천민이었던 어린 시절 때 우상으로 삼고 그와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지 않았던가. 그래서 삼국지 인물들 중 여간 유명하지 않으면 이름조차 모르는 이의민이 자까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관우다. 그 정도의 우상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그가 느끼는 흥분은 관우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이의민과 관우는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의민군 군사들은 아주 여유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하북군은 다소 긴장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물론 하북군들 중 관우를 의심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래도 그들 입장에서는 이의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 귀에 박히도록 들어보았고, 게다가 안량을 직접 죽인 모습을 기억하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나보다.
어느덧 이의민과 관우는 서로의 무기로 서로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까지 다가갔다. 당장 무기를 휘둘러 상대를 기습해도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둘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이를 만난 것이었다. 기습 같은 비겁한 술수로 승부를 낼 생각 따윈 둘 다 추호도 없다. 물론 서로 기습 같은 것을 해봤자 통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지만.
“운장. 참으로 보고 싶었소.”
현재 이의민은 승상이라는 자리에 있다. 그래서 그는 황제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반말을 일삼았다. 하지만 관우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 관우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분명 이의민은 오만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라 들었는데, 아직 하급 장수직에 불과한 자신에게 왜 존대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전국구 이의민과는 달리 하북의 국한된 명성을 가진 자신은 어찌 보면 무명이었다. 그런데 이의민은 자신의 자까지 알고 있으니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음.... 승상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나? 그리고 내 자까지 알다니.... 나에 대한 정보까지 파악을 한 것인가? 역시 만만찮군.’
관우는 단순히 이의민 쪽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만 여기는데, 이어진 이의민의 얘기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 오래 전부터 관공의 이름을 흠모했었소. 이 대부와 그대의 청룡언월도를 섞을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소.”
관우는 순간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단순히 정보를 잘 파악한 것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이의민의 진심 가득한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이건 승상이 정말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를 상대로서 말이다...’
자연스레 오만하던 관우의 태도도 조금 바뀌었다.
“승상. 소장을 잘 아십니까?”
“잘 알지요. 천하에 관공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
“승상께서 어찌 소장과 같은 천한 자를 이리 대하십니까? 혹시... 소장을 회유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회유라니... 당치도 않은 생각이오. 그대들 삼형제의 의리를 아주 잘 아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소?”
관우 뿐만 아니라 유비와 장비에 대해서도 잘 아는 듯한 이의민의 얘기에 관우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자자! 그리 복잡한 표정 지을 거 없소. 승상이고 졸장이고 나발이고, 그 전에 우리는 무인이 아니오? 그저 무기를 맞대고 싸우면 될 일이지.”
이의민의 얘기에 관우는 다시 언월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의민의 말대로다. 무인은 무기를 섞는 것으로 대화를 나누면 되지 더 이상의 얘기는 필요 없었다.
이윽고 이의민의 대부와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맞부딪혔다.
콰콰쾅!!
예전 여포를 상대했을 때 나는 굉음보다 더 큰 굉음이 사방을 때렸다.
‘흠! 확실히 힘은 여포보다 한수 위다.’
관우의 공격은 말 그대로 무지막지했다. 보통 사람은 제대로 들지도 못 할 청룡언월도를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있다. 단순한 빠르기는 여포의 방천화극이 우위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위였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포보다 상대가 쉬워.’
이의민 역시 빠르기는 여포 못지않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의민의 장점은 신력이었다. 관우의 신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의민이 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의민 입장에서는 빠르고 기교가 넘치는 여포가 더 까다롭게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의민은 결코 관우가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강한 힘은 이의민으로서도 두경승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신력의 우위를 겨루고 싶은 이의민의 호승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관우의 정직하면서도 강력한 공격은 이의민에게 다른 기교를 부리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둘은 마치 연습을 하듯 정확하고 정직한 일격을 교환했다.
쾅! 쾅! 콰쾅!!
대부와 언월도가 부딪힐 때마다 나오는 천둥소리가 온 천지를 울리고 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른 소리들은 다 묻힐 정도였다. 정말 천지가 진동한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의민과 관우는 100합이 넘게 합을 교환했다. 100합 정도로는 전혀 지친 기색을 느낄 수도 없다.
‘그래. 역시 운장이야. 딱 내가 생각했던 것 그대로군.’
이의민은 진심으로 신이 났다. 마치 고려시절 두경승과 철없는 신력 다툼을 하던 그 때가 생각나 너무 즐거웠다.
반면에 관우의 속내는 좋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그는 느끼고 있다.
‘내가... 이 운장이 밀리다니....’
한 합이 지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던 팔 근육이 아주 조금씩 떨려 왔다. 조금의 차이였지만 확실했다. 분명 이의민의 신력이 더 강했다. 그 힘의 차이가 한 합마다 누적되면서 100여 합이 지날 때는 제법 큰 차이를 보였고, 여기서 200합, 300합까지 가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질 터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설마 진다는 것을 알고 두려움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아니다.
관우는 지금 당장 이의민의 대부에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이의민과 이리 합을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무인으로서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관우가 고민하는 것은 유비가 내렸던 명 때문이었다.
유비는 관우가 이의민과 일기토를 하기 전에 신신당부를 내렸다.
“운장. 명심해라. 만약 이의민에게 조금이라도 밀리는 것 같으면 바로 신호를 보내라. 그럼 뒤에서 대기 중에 있던 조운이 바로 널 도울 것이다. 그렇게 2대1로 이의민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물론 그게 무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짓임을 나도 안다. 하지만 이건 무예를 겨루는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놓고 싸우는 전쟁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실제로 관우는 유비의 명을 충실히 따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운과 2대1의 합을 맞추는 연습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의민과 마주 했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찌....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관우는 이의민이 어떤 인물인지 겪었다. 그를 본 시간은 업성 문을 열고 나와 일기토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시간으로 따지면 기껏해야 1각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관우는 확실히 느꼈다.
무위의 강약을 떠나 이의민은 진정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관우에게도 무인으로서의 예를 다했다. 서로의 급소를 노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를 휘두르는 이의민의 눈에는 관우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다.
‘나는 할 수 없다. 이런 자를 상대로 어찌 그런 비겁한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관우는 조운을 부르는 걸 포기했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니 일기토에 더 집중 가능해지는 관우다.
‘호오! 그새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풍기는 기운이 달라진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관우의 변화는 이의민을 더욱 즐겁게 했다. 이의민은 이제 슬슬 일기토를 끝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관우와의 신력 대결이 즐겁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포보다는 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렇게 슬슬 승부를 내려던 찰나 관우의 기세가 변했다. 마음먹은 대로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이의민에게 더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수백 합을 겨루는 이의민과 관우다. 그럼에도 둘의 승부는 도저히 갈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관우가 먼저 승부수를 띄웠다.
관우는 지금껏 해왔던 공격과는 다르게 말을 뒤로 뺐다. 약간의 거리를 벌린 후 그는 언월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빙빙 돌렸다.
‘이 일합에 모든 것을 걸겠다.’
단 한 방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관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