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드러나는 검은 속내 (3)
조용한 업성에서 숨죽이고 있던 조조. 그는 원소가 패퇴해서 돌아온다는 보고를 받고 인상을 구겼다.
“뭣이?! 그게 사실이냐?!”
“예. 이의민의 군사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 반면, 원 자사는 많은 군사들과 함께 안량, 문추 등의 상장들을 잃고 패퇴하여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허어! 원소마저....”
조조도 원소가 이의민을 상대로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이 정도로 쉽게 대패를 해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유주의 공손찬이 원군을 보내기 전까지는 어찌 버틸 줄 알았다. 그런데 조가현으로 간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대패를 하고 돌아오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조는 이를 악물면서 원소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어쨌거나 현재 자신은 명목상 원소의 수하로 있지 않은가.
이윽고 업성 주변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원소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패잔병이니 당연하게도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모든 군사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부상 때문인지 심신의 피로 때문인지 똑바로 걷는 자들이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는 비단 말단 병사들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선두에서 오는 원소와 그 옆에 있는 여러 장수들, 참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그런 원소의 모습을 보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한심한.... 하북의 지배자라는 자가 어찌 저 모양인가....?’
그래도 속마음을 바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원소를 걱정하는 척하며 맞이하는 조조.
“본초 형. 소식 들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대체 얼마나 크게 패한 겁니까?”
원소는 조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전풍에게 물었다.
“원호.... 우리 군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가?”
조조의 질문에 이제야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원소. 조조가 보기에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한다면 원소보다 훨씬 더 잘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본초는 진정한 제왕의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그 자격은 오직 나만 가지고 있어.’
조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전풍이 씁쓸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사상자는 총 3만입니다. 그리고 안량과 문추.... 장의거, 여상, 여광이 전사하였습니다. 고람과 저수는 아직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사실상 죽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크으윽....!”
전풍의 참담한 보고에 원소는 침음을 흘렸다.
너무도 뼈아픈 패배였다. 짧은 전투에서 무려 3만이나 되는 군사를 잃은 것도 참담했지만, 무엇보다 원소가 그리 자랑스러워했던 안량과 문추가 둘 다 죽었다. 그 외에도 원소의 세력을 지탱해왔던 많은 장수들이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전풍, 심배와 함께 원소의 최고 모사라 할 수 있는 저수 역시 죽었다고 봐야했다. 병력 3만을 잃은 것 이상으로 원소 세력의 기반이 크게 무너진 셈이었다.
그러니 원소가 넋이 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조도 전풍의 피해 보고를 듣고 나서야 원소가 왜 저렇게 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지 살짝 이해가 갔다.
하지만 유비의 부추김으로 조조의 마음속에 야망이 크게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래도 난 저렇지 않다. 난 오히려 내 세력이 완전히 무너졌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군주답게 내 사람들을 이끌었다. 역시 본초보다는 내가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그 마음을 지금 당장 드러낼 수는 없었다. 원소의 세력이 아무리 줄어들었다고 해도 아직 세력이 거의 없는 조조였다. 당장 원소에게 발톱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조조는 속마음을 완전히 숨기고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원소를 위로했다.
“본초 형.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공손찬의 군사들이 도착하면 여전히 이의민에 비해 우리 동맹의 병력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제 휘하의 장수들과 참모들 역시 아직 건재합니다.”
전풍도 얼른 조조의 얘기를 받아 원소를 위로하는데 동참했다.
“맹덕의 말이 옳습니다. 맹덕 휘하의 조인이나 하후연 같은 장수들도 매우 용맹스런 장수들이고, 순욱 역시 뛰어난 인재가 아닙니까? 이들이라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주군.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한 번의 패배로 낙담하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기회는 앞으로도 많습니다.”
전풍까지 나서서 위로를 하자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리는 원소다.
“그래. 이의민에게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지. 한번 진 것일 뿐이다. 그나저나 공손찬은 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이리 대응이 느린 것인가?”
기분이 살짝 나아진 원소는 이제 자신의 패배 책임을 공손찬에게 돌리는 듯한 얘기를 꺼냈다. 그에 조조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이번의 패배는 본초 형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공손찬이 원군만 제때 보내줬어도 이 정도로 허무하게 대패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곧 원군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유주의 일이 정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체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원군을 미뤄왔단 말인가.... 아무튼 백규가 오면 좀 따져야겠군.”
그렇게 원소와 조조는 공손찬의 원군을 기다렸다. 얼마 후 조조의 말대로 공손찬군으로 보이는 대군이 지축을 울리며 도착했다.
성루에서 확인해보니 유주의 군사들이 확실했다. 선두에는 유비, 좌우에는 관우와 조운이 있으니 말이다.
그들과 함께 온 군사들은 대략 5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는데, 이는 업성으로 패퇴하여 돌아온 7만의 원소군보다 오히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군사들의 기세와 분위기는 패퇴한 원소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적은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많은 병력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원 자사! 원군이 왔소! 성문을 열어주시오!”
선두의 유비가 성루에 있는 원소를 향해 외쳤다. 그런데 태도가 이전과 살짝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공손찬의 사자로서 확실히 자신을 낮췄던 유비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원소와 대등한 관계라도 되는 듯한 말투를 썼다.
“오! 현덕. 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어서 오게.”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히 원군을 기다려왔던 원소는 미처 그걸 느끼지 못하고 유비를 환대할 뿐이었다.
유비에게 인사를 건넨 원소는 공손찬을 찾았다. 앞으로 이의민과 일전을 해야 하니 당연히 그가 직접 왔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공손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백규는 어디 있는가? 현덕. 설마 자네들만 보내놓고 오지 않은 것인가?”
원소의 질문에 유비는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원소가 여전히 공손찬을 찾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원소의 태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비는 불편한 표정으로 관우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관우는 자못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원소에게 노성을 터뜨렸다.
“원 자사는 말조심하시오! 이제 형님께서는 더 이상 그대의 아래가 아니오. 그대와 동등한 유주자사시란 말이오.”
관우의 얘기에 원소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현덕이 유주자사라니....?”
이에 유비가 가볍게 웃으며 관우를 말리는 척했다.
“하하. 운장. 그만하게. 여기 계신 분들이 사정을 어찌 알겠나? 상황이 급박하니 간단하게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전 유주자사였던 백규 형님은 최근 깊은 병환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원군을 빨리 파병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 비가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유주자사가 되었습니다.”
유비의 설명을 들은 원소는 더 황당해졌다. 공손찬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얘기인데, 그 뒤를 장자인 공손속이 아닌 유비가 이었다는 것이 더 황당했다.
“현덕. 정말 공손찬이 죽은 것인가? 그럼 어찌 자네가 유주자사가....”
유비는 다시 관우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이어 관우의 노성이 다시 터졌다.
“원 자사! 형님께 예를 갖추라 분명 얘기했소! 방금 전은 몰라서 그랬다지만, 설명을 다 했는데도 이러는 것이오?! 내 더 이상의 무례는 묵과하지 않겠소!”
불같이 화를 내는 관우의 모습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원소는 관우에게 건방지게 나선다고 마주 화를 낼 기회도 놓쳤다. 안 그래도 패퇴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관우를 꾸짖을 힘도 나지 않았다.
결국 원소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물러섰다.
“아, 알겠네.... 현덕. 내 실수를 했네. 아니. 실수를 했소. 유 자사.”
그제야 유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원 자사. 상황 상 다른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으신 것을 충분히 이해하오. 실수를 할 수도 있지요. 그나저나 이의민, 그 자가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한 가 보오. 원 자사께서 이리 패배하실 줄은....”
“참으로 면목 없소....”
원소의 이른 대패는 유비도 솔직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유비 역시 조조와 마찬가지로 원소 혼자서도 조금은 더 버틸 줄 알았다.
그래도 유비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조조를 통해 이호경식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군. 원소가 이리 군사를 잃고 사기도 꺾였으니, 이제 이 연합의 주도권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이제 내가 연합을 이끌고 이의민을 이기기만 하면, 바로 내가, 이 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꿈만 꿔 왔던 천하재패가 드디어 이뤄진다는 말이다...!’
유비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래도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요.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오. 어서 들어가서 이의민, 그 자를 어찌 상대할지 의논을 해보십시다.”
곧 업성 안에서 유비와 원소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현재 업성에 있는 병력은 기주군이 7만, 유주군이 5만이오. 반면 이의민의 병력은 10만이니 아직 병력은 우리 연합이 명백히 우위에 있소. 거기다 여차하면 평원에 있는 10만의 군사를 끌어올 수도 있으니, 그냥 소모전으로 가면 우리가 질 수가 없는 전쟁이 아니겠소?”
유비가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 전풍이 강하게 반박했다.
“그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유 자사. 이의민, 그 한 명이 가진 전력만 족히 수만의 병력과 동급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지요.”
“이의민을 직접 상대해본적은 없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미 귀가 닳도록 들어서 모르는 바는 아니요. 그래도 이의민이 그리 무서운 이유는 결국 그의 무력 때문이 아니오? 그건 내 아우들이 충분히 견제할 수 있소. 그대들도 내 아우들의 무위를 잘 알지 않소? 간단히 생각해보면 천외천의 무력을 가진 이가 적들 중에서는 이의민 하나라고 치면, 우리는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까지 있소. 설사 이의민이 내 아우들이나 조운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해도 두 명이서 그를 상대하면 되오. 그리 본다면 장수전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오.”
유비가 호언장담하자 원소는 과거 공손찬과의 전쟁을 떠올렸다.
‘그래. 현덕의 아우들이라면.... 이의민 역시 안량을 가지고 놀았지만, 관우나 장비 역시 안량과 문추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충분히 둘이서 이의민을 견제할 수 있을 테지.... 게다가 관우, 장비 못지않은 조운까지 있지 않은가?’
조가현에서 패퇴한 이후 처음으로 화색이 도는 원소의 표정이다.
**
원소가 업성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민의 대군 역시 업성 근교에 당도했다.
역시 사람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하던가? 이제는 감히 평지에서 이의민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업성 성문을 닫고 성 안에 숨어 있는 원소다.
이의민은 그런 업성을 보며 원소를 크게 비웃었다.
“본초! 그리 성에 틀어박혀 있으면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 어차피 버티다가 죽을 바에 얼른 항복하는 것이 어떤가? 안량이나 문추도 없는데 나와 맞서 싸울 장수도 없잖은가?”
이의민이 한껏 도발을 해봤지만 업성 안에 있는 그 어떤 군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겁을 먹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의민은 업성의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걸 대번에 느꼈다.
‘겁을 먹고 조용히 있는 게 아니다. 분명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군.’
도발을 끝내고 진채로 돌아온 이의민은 바로 순유에게 물었다.
“공달. 아무래도 저놈들이 쫄지도 않는 것이 뭔가를 믿는 것 같은데...? 장합이라는 놈이 합류를 한 건가?”
그런데 순유가 답을 하기도 전에 거대한 업성의 성문이 열렸다. 지금까지 봐왔던 장수들 중 가장 위풍당당한 체격과 긴 수염을 늘어트린 자가 홀로 성문으로 나왔다.
그는 이의민의 진채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하에 위명이 높은 승상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이 사람은 관우라 하오! 어디 오늘은 관직을 내려놓고 자웅을 한 번 겨뤄봅시다!”
그에 곽봉이 발끈했다.
“하여간 하북새끼들은 버릇이 없어. 아우... 아니. 주군. 저런 무명 졸장을 직접 상대하실 필요 있습니까? 장료나 황충 장군에게 싸우라 하시죠.”
하지만 이의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건 무조건... 무조건 내가 나가야 하오.”
이의민의 표정은 흥분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상대의 이름은 이의민도 익히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이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