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드러나는 검은 속내 (2)
유비가 그토록 찾았던 공손속은 혼비백산 한 채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관우의 예상대로 공손속은 이미 계성 밖을 벗어났다.
확실히 공손속은 아직 풋내기일 뿐이지만 그래도 유주의 지배자인 공손찬의 아들이었다. 유비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공손속은 계성을 도망칠 준비를 해놓았다.
나름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공손속은 유비의 추격대를 무사히 따돌렸다. 아니. 애초에 추격대에게 꼬리를 잡히지도 않았다. 공손속은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이가 보이지 않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구나. 살았어.... 크흐흑!”
드디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고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유비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만약 지금 도망치지 않았다면 공손속은 영락없이 유비의 꼭두각시로 살다가 버려질 때가 되면 허무하게 버려질 운명이었다. 공손속은 아비의 원수 밑에서 절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 유비. 이 더러운 놈.”
유비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공손속은 이미 정해놓은 목적지가 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서무산이라는 산이었다.
“휴우! 오긴 왔는데 여기서 그들을 어찌 찾지....?”
서무산 앞까지 올 때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막상 산 앞에서는 한숨을 내쉬는 공손속. 찾은 위치가 서무산인 것은 맞지만, 정확히 서무산 어디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올라가보면 답이 나오겠지.”
공손속은 바닷가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무작정 산을 올랐다. 그런데 그는 모르고 있다. 산 초입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산적처럼 보이는 그들은 공손속을 몰래 따라갔다.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이는 공손속을 습격해 돈이라도 뜯어낼 심산일까? 그럴 거였으면 진작 습격해도 됐을 텐데 관찰만 할뿐 딱히 공손속을 건드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공손속을 관찰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딱 봐도 멋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호기심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닐까?”
“아니야. 아직 몰라. 우릴 찾으러 온 공손찬의 졸개일 수도 있어.”
“그런데 저놈이 정말 공손찬의 세작이라면 저리 화려한 옷을 입고 눈에 띄게 다닐 이유가 있나?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더 지켜보자고....”
확실히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일반적인 산적들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공손찬과 관련이 있는 자들인 듯하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계속 공손속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공손속이 산속을 향해 외쳤다.
“여기 전주 선생 계십니까?! 전주 선생! 전주 선생!”
공손속이 산속에서 전주라는 자를 찾자 그를 감시하고 있던 무리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놈이 어찌 우리 대장을 알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수상한 놈이라니까! 당장 잡아야 해.”
결국 정체불명의 무리는 공손속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우호적인 모습으로는 아니다.
“이놈! 네놈은 누군데 우리 대장을 부르는 것이냐? 아니! 그 전에 우리 대장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어찌 안 것이냐?!”
그 무리들은 공손속에게 무기를 겨누고 흉흉한 기세로 물었다. 그런데 공손속은 오히려 반갑다는 듯, 이들을 맞이했다.
“혹시 전주 선생의 사람들이십니까? 저를 제발 전주 선생께 데려가주십시오.”
“네놈이 누군지 알고? 네놈의 정체부터 밝혀라.”
그들의 질문에 공손속은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들은 더 수상하게 여기고 칼을 바짝 들이댔다.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것이냐? 아무래도 수상한 놈이군. 그냥 여기서 죽여야겠다.”
무리들 중 한 명이 칼을 들자 공손속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 저는 공손찬의 장자인 공손속이라 합니다!”
그런데 공손속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무리의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
“뭐?! 공손찬의 장자?”
“아! 그 공손가의 꼬맹이가 바로 네놈이었구나! 다른 놈도 아니고 네놈이 대장을 직접 찾아오다니 정말 죽고 싶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소원대로 죽여주마!”
그때 분노한 무리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공손속은 그 목소리를 듣고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전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전주의 무리는 여전히 분노한 기색을 보이며 공손속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대장! 어찌 막으십니까? 이놈은 바로 공손찬의 아들놈입니다. 거기다 대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온 것입니다. 감히 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온다는 것입니까? 당장 잡아 죽입시다.”
전주는 혀를 차며 수하 무리들을 말렸다.
“되었다. 저놈도 이곳에 오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터.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걸 듣고 난 이후 죽이든 살리든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공손속. 날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냐?”
전주의 얘기에 공손속은 눈물을 뿌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가장 먼저 선생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체 이 전주라는 자는 공손찬과 무슨 악연이 있는 것인가?
전주는 과거 유우의 신하였던 자였다. 그러니 유우를 죽이고 유주를 차지한 공손찬은 전주에게 있어서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공손찬 휘하의 모든 자들과 그의 자식들인 공손속 역시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공손찬은 전주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전주는 당연하게도 공손찬의 제안을 한사코 거부했고 오히려 틈만 나면 그를 죽이려고 애썼다.
공손찬은 그래도 전주를 죽이지 않고 그저 옥에 가둔 후 끝까지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다가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던 유우를 죽인 것도 모자라 전주까지 가두고 있는 것에 대해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공손찬도 여론을 의식하여 그를 풀어주었고, 전주는 그 직후 이 서무산에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은거했다.
“그딴 사과를 듣자고 내가 널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온 목적을 바른대로 말하라.”
공손속은 그간 공손찬 진영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전주에게 얘기했다. 공손찬이 죽었고, 사실 그가 병환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비에 의해 죽은 것 같다고 의심하는 부분까지 모두 말이다.
“아버지를 진맥했던 의원들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올 때마다 말이 바뀌었습니다. 증좌고 뭐고 아무 것도 없지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유비, 그 자가 우리 아버지를 그리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 그렇군. 역시 그리 되었어. 역시 유비, 그놈이었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얘기하는 전주. 그런데 옛 주인을 죽인 원수가 죽었다는데 정작 전주의 표정은 그리 시원해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주도 진정한 복수의 대상이 공손찬이 아니라 유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주도 공손찬에게만 복수를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공손찬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는 서무산에 와서도 계속해서 그 누군가를 조사했다. 그리고 진정한 머리는 공손찬이 아니라 유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공손찬이 죽었다는 얘기에도 별로 기쁨을 느끼지 못한 전주다. 진정으로 복수해야 할 대상은 유비라는 걸 아니까. 그게 공손속을 보고서도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클클클. 어찌 보면 공손찬, 그놈도 불쌍한 놈이군. 결국 유비 그 놈의 사탕발림에 속아 비참하게 죽었으니....”
“반드시 유비, 그놈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순진한 얼굴이 크게 찡그려지는 공손속. 그답지 않게 이를 악물며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전주는 냉랭한 음성으로 공손속에게 얘기했다.
“그래서 그 복수를 나보고 대신 해달라고 온 것이냐? 잘 들어라. 공손가 역시 내 주인의 원수다. 유비가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나 결국 내 주인을 직접 죽인 것은 너희 공손가문이란 말이다.”
전주의 얘기에 공손속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전주의 얘기에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도 공손속은 전주에게 끝까지 매달렸다. 만약 그가 외면한다면 유비에게 복수할 길이 없으니까.
“전주 선생의 말이 다 맞습니다. 허나 결국 전주 선생께서도 유비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신다면 전 유주자사였던 유우님의 복수를 온전히 했다고 보실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 저와의 원한은 뒤로 미루시고, 지금은 유비를 상대하는 것만 생각하심이 어떠십니까?”
공손속의 간절한 설득에 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 감정 때문에 공손속에게 차갑게 얘기했지만 전주도 그럴 생각이었다. 결국 유비를 처단해야 진정한 유우의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반드시 유비를 처단할 이유가 있고, 너도 있지. 그러니 우리는 사실상 같은 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정말 네가 숙부라 부르던 사람에게 칼을 들이밀 준비가 되었느냐? 미리 말해두지만 네 자리를 찾아주겠다는 게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 유비의 제거뿐이다.”
“그런 악적이 무슨 숙부이겠습니까? 이제 유비는 나와 우리 공손가문의 원수일 뿐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으면 죽일 겁니다.”
“좋다.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것이다.”
그렇게 원래 삼국지에서는 끝까지 서로 원수였던 전주와 공손가문이 서로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유비를 상대하기 위해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것은....”
“유비도 우리가 이곳 서무산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 무슨 준비를 한다는 말이냐?”
“예? 유비가 전주 선생이 여기 있는 걸 안다고요?”
“네놈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잖느냐? 네놈도 아는 걸 유비가 모를까.”
전주의 말대로 공손속도 그가 공손찬에게서 탈출한 이후 서무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 온 것이고.
“그, 그렇군요. 그럼 유비는 왜 전주 선생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있단 말입니까? 진작 토벌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상대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우리는 모기,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귀찮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죽일 필요는 없는 존재 말이다.”
“그, 그런.... 그럼 선생도 유비를 상대하실 수 없다는 얘깁니까? 정녕 유비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는 겁니까?”
절망을 느끼며 묻는 공손속. 전주는 그런 그에게 씩 웃으며 답했다.
“방법이야 있지. 우리에게 그 힘이 없다면, 그 힘을 가진 자를 찾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누구....?”
“지금 유비를 처단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느냐? 유비의 적이면서 그가 두려워 할 만 한 힘을 가진 자, 딱 한 사람 밖에 없지 않느냐?”
“아!”
공손속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승상 이의민이다.
생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이의민은 공손가의 최고 적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의민은 공손가의 원수가 아니었다. 그저 천하를 놓고 다툴 경쟁자일 뿐이니 말이다. 그 천하를 욕심내지 않는다면 이의민과 적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 지금 당장 이의민이 있는 기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유비도 네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곧 알거다. 점점 우리에 대한 감시와 포위가 심해지겠지. 그럼 들키지 않고 기주까지 갈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평원으로 간다. 그 쪽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하니 말이다.”
“평원....? 그 쪽은 전예 장군이 있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더욱 그 곳으로 가야 한다.”
공손속과 전주의 목적지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