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무너지는 건 산이 아니라 희망 (4)
저수는 이의민 앞으로 온 다음 바로 무릎을 꿇었다.
“승상. 소인 저수라 합니다.”
이의민은 저수가 마음에 들었다. 주인인 원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전투 때 보여준 그의 능력 역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저수의 모습은 살짝 실망이었다. 누가 봐도 이의민에게 투항하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모습 같지 않은가.
“그래. 저수. 이제 원소에게 의리는 충분히 보여줬으니, 내게 항복이라도 하겠단 건가?”
“아닙니다.”
“그럼 내 앞에서 이리 무릎 꿇은 이유가 무엇인가?”
“한 가지 청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 가지 청이라....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하는 건가?”
저수는 갑자기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냥 박는 시늉만 한 게 아니다. 쿵 소리가 제법 크게 날 정도였다.
“아닙니다! 승상! 부디 이 쓸모없는 소인의 목을 거두어주시고 뒤의 병사들은 살려주십시오.”
저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강렬한 눈빛은 그대로 느껴졌다. 이의민은 저수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지 않지. 휘하 군사들을 살리기 위한다는 저수의 얘기는 거짓이 아닌 진심이다.’
저수의 모습에 이의민의 표정이 다시 흡족해졌다. 역시 이번에도 저수는 이의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였다.
이의민은 은근한 목소리로 저수에게 물었다.
“그러지 말고 자네도 함께 오지 그래?”
하지만 저수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의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수많은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 소인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원소의 군사들이 죽은 것이 어찌 너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책임을 지라고 하면 원소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고 소인이 주군께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소인이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다 떠안고 가겠습니다. 부디 소인의 목을 베고 나머지 군사들은 살려주십시오.”
이의민은 혀를 찼다.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데 그 마음에 드는 점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힘들 것 같다.
그때 저수 뒤에 있던 원소군 군사들이 일제히 눈물을 뿌리며 외쳤다.
“저 군사님! 제발 승상의 제안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군사님이 그리 말씀하시는데 저희가 어찌 살려고 하겠습니까? 승상! 제발 저 군사를 살려주십시오!”
저수는 오히려 그런 원소군 군사들에게 역정을 냈다.
“닥쳐라! 어찌 나보고 주인을 배신하라고 등 떠미는가? 난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 저희들보고는 어찌 살라고 하십니까?”
“주군의 최측근에서 힘과 권력을 얻었던 나와 일개 병사들일뿐인 그대들이 어찌 처지가 같은가? 그대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말단들 아닌가? 그러니 책임질 일도 위치도 아닌 것이지.”
저수가 차분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병사들의 만류는 그치지 않았다.
“크흑! 그래도 제발 살기를 도모 하십시오. 저 군사.”
“그렇습니다. 원 자사가 도망치는데 스스로 미끼가 되셨으니 이미 그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키셨지 않습니까?”
결국 저수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못들은 체 할뿐이다.
“군사들에게 저 정도로 강한 신뢰를 받고 있다니.... 정말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로다....”
이의민은 저수를 포기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 순유가 다가와서 조언했다.
“주군. 편히 보내드리지요. 그것이 저수 선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순유의 얘기에 이의민은 아쉬운 듯 계속 입맛을 다시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이 생각해도 저수가 원하는 대로 목숨을 거둬주는 것이 옳아보였다. 만약 저수를 끝까지 살린다면 그의 목숨을 살리겠지만, 그의 긍지는 죽이는 게 된다. 그럼 저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린다 한들 저수가 이의민의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이의민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저수에게 마지막 얘기를 했다.
“안량도 그렇고 문추도 그렇고 자네도 마찬가지로 참으로 아까운 인재들이야. 사실 이전까지는 하북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내 잘못 생각한 듯싶어. 하북에도 인재가 참 많아. 그래서 원소가 더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는군. 뭐 원소에 대한 얘기를 해봤자 자네는 별로 듣기 좋지는 않는 얘기니 이만 마무리를 짓지. 저수, 자네의 뜻대로 하겠다. 자네의 목숨을 거두되 저들을 원소에게 돌려보내진 못하지만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자네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의민의 선언에 저수는 진심으로 감사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승상의 대자대비 함에 감사드립니다.”
저수는 이제 미련이 없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순유가 잠시 저수의 처형을 미뤄 달라고 한다.
“왜 그러는가? 자네가 저수의 뜻에 따라 그를 죽이라 했으면서....”
“사실 그에게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물어봐.”
“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군. 그럼.... 저 군사. 그대들이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진채를 죽도록 사수했던 이유는 흑산에서 일어날 산사태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맞소?”
“훗! 낙양의 공달은 앉아서 천리 길을 볼 수 있다더니, 그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군. 역시 알고 계셨구려. 맞소. 산사태를 일부러 일으키기 위해 둑을 터뜨릴 계획이었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 설마.... 그대가 처음부터 우리 계획을 다 알았고, 그래서 둑을 터뜨리러 간 고람 장군을 막은 것이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저수가 살짝 다르게 알고 있는 바를 정정해주었다.
“그건 아니오. 처음에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소. 병주에 우리가 보냈던 별동대가 우연히 알려준 사실을 근거로 마지막 전투 전에 추측할 수 있었소. 운이 좋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들의 계략에 꼼짝없이 당했겠지요. 그만큼 그대들의 계책은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소.”
순유는 거짓으로 전부 파악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을 앞둔 저수에게 그러고 싶지 않아 순순히 모든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저수는 순유의 얘기를 듣고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이제 곧 죽을 목숨이지만 마지막 순유의 극찬이 그리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랬구려... 고맙소. 이제는 정말 미련이 없을 것 같소.”
그렇게 저수의 목이 떨어졌다.
이의민은 잘린 저수의 목을 씁쓸하게 쳐다보더니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 자는 적이지만 끝까지 긍지를 잃지 않았던 영웅호걸이다. 그러니 영웅호걸답게 마지막까지 예우를 다하라!”
“예! 승상!”
“그리고 이 전쟁이 승리한 후 그의 가족을 찾는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어라!”
이의민은 저수에게 했던 약속 전부를 다 지킬 생각이다. 당연히 사로잡힌 군사들 역시 다 살려주려고 마음먹고 있다. 지금 당장은 포로로서 대우를 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전향을 하려는 자들은 다 받아줄 것이고, 설사 전향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고향에 보내줄 생각이다.
이때 순유가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주군. 지금 사로잡은 원소군 포로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들을 모두 일반 병사들과 다름이 없게 하시지요.”
“응?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포로들을 박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먹이자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저수 때문에 그런가?”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그리 하는 것이 아주 좋은 선전효과가 될 수 있으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포로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좋은지 도망친 원소군이 알게 된다면, 아니 그래도 승기가 많이 넘어간 마당에 투항을 해오는 군사들이 점점 늘게 될 것입니다.”
역시 순유는 이 상황에서도 남은 원소군을 흔들 계략을 생각해내고 있다.
“오오! 좋은 생각이군. 역시 공달이야. 가차 없어. 남은 원소의 군사들을 아주 쉽게 뿌리 뽑을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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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전장의 함성소리가 가득했던 조가현과는 달리 원소의 본거지인 업성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그 조용한 업성 안에서 화려한 권좌가 보였다. 지금은 주인이 없는 자리, 바로 원소의 권좌였다.
원소 밑으로 들어간 조조는 현재 빈 업성을 지키는 중이다. 원소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조에게 업성을 맡기자 많은 이들이 반대했었다. 하지만 원소는 조조를 믿는다며 기어코 그에게 업성을 맡겼다.
사실 원소는 조조를 믿기보다는 이의민과의 일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업성을 맡긴 것이었다. 어차피 업성에는 병력도 얼마 없으니 조조가 빼앗고 싶다고 빼앗을 수도 없다.
조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소의 권좌를 바라보며 욕심을 슬쩍 드러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길 생각은 아직 없다.
순욱이 그렇게 원소의 권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조조에게 다가와 물었다.
“주군. 아직 미련이 있으신 겁니까?”
순욱의 물음에 조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빤히 보이는 현덕의 이호경식에 걸려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이의민이란 대적을 앞둔 지금 어찌 내분을 일으키겠나? 아직은 아니야....”
조조는 지난 날 하북의 한 객잔에서 만난 유비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유비는 그때 조조에게 원소 밑으로 들어가라면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
“원소, 그 자는 허영심이 많고 기분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 안심할 수 없소. 그러니 그대가 원소를 잘 보좌하여 이의민과의 싸움에서 그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보시오.”
유비의 얘기를 그냥 들었을 때는 원소를 잘 이끌어서 이의민을 제거하는데 모두 힘을 합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순욱은 유비의 얘기에서 그 속에 숨은 그의 검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유비도 조조의 야망을 잘 아는 사림이었다. 조조가 결코 원소의 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는 뜻이다.
즉, 유비는 조조가 원소의 밑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본격적으로 야망을 드러내어 아예 원소의 세력을 차지하기를 기대하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이었다.
유비가 조조를 부추긴 까닭은 다른 게 아니다. 원소의 그릇으로는 결코 이의민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비는 그나마 조조와 자신만이 이의민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유비는 만약 자신과 조조가 힘을 합쳐 결국 이의민을 잡게 된다면 그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유비가 이대로 이의민을 물리치게 된다고 해도 결국 가장 큰 과실은 가장 위에 있는 원소가 다 가져가게 된다고 보았다.
유비는 그래서 조조의 야망을 이용해 원소 진영의 힘을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이의민이란 대적을 잡고 난 이후 들어올 엄청난 전리품들이 전부 원소의 손에 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정작 이의민을 잡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긴 하다. 어쨌든 유비는 자신과 조조가 손을 잡는다면 이의민을 충분히 잡을 거라 믿고 있었고, 그래서 조조를 더 부추겼다.
그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조조는 유비의 얘기를 떠올리며 권좌에 대한 욕심을 벌써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순욱에게 하는 말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지만 온 몸에서 드러나는 욕심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현덕은 언제 온다던가?”
“유주의 일을 마무리 짓고 오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흠!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의민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유주의 일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다른 것도 꺼림직 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원소도 그렇고 주군도 그렇고, 혹시 공손찬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유비가 전한 공손찬의 얘기를 전해 듣기만 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더 그렇군.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조조는 유비를 생각하면 할수록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더러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