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45화 (145/175)

145. 무너지는 건 산이 아니라 희망 (3)

원소는 악에 받혀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빌어먹을! 저놈들이 우리 진채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이냐?! 다들 어떻게 좀 해보아라! 이러면 산사태가 난다고 해도 이의민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지 않느냐?!”

원소의 외침에 전풍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 누구도 섣부르게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사실 하나를 원소에게 얘기했다.

“주군.... 이제는 인정 하셔야 할 것입니다.”

“뭐라? 대체 뭘 인정하라는 말이냐?”

“고람 장군이 둑을 무너뜨리기로 했던 시간이 무려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이건 분명 그냥 늦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고람 장군 쪽에 변고가 생겨서 둑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상황이 틀림없습니다. 산사태는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비통함 섞인 전풍의 얘기에 원소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산사태는 일어날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흑산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원소는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사실 원소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고람 쪽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그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태껏 엄청난 병력 피해를 감수해가며 이 대충 만든 진채를 그토록 지켜낸 이유가 무엇인가? 다 산사태 계획 하나만 바라보고 버티고 또 버텼던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지금 현실을 인정해버린다면 그간 원소가 했었던 것이, 그의 수하들이 군사들이 버텨왔던 것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원소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산사태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다고만 부르짖고 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일각? 아니. 한 시진만 더 기다려보자. 고람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원소가 이러는데 전풍이나 저수가 함부로 퇴각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든 이 진채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의민을 막아라!”

“벽을 넘어오는 군사들을 막아라! 벽 뒤로 목책이라도 다시 설치하라!”

전풍과 저수가 최선을 다하지만 둘 중 그 어느 것도 막아내기 힘들었다. 적토마를 탄 이의민은 당연하게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의민의 대부가 포물선을 그릴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튀고 뼈가 튀었다. 모두 원소군의 것들이다.

문추는 그런 이의민을 보고 이를 갈며 그에게 돌진하려 했다.

“이의민....! 안량의 원수! 반드시 갚겠다!”

하지만 문추는 이의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안량도 어린아이 다루듯 했는데 문추라고 다를까. 그래서 저수는 재빨리 문추의 앞을 막았다.

“문추 장군! 아니 되오!”

“비키시오. 저 군사. 어찌 내 앞을 막는 것이오? 내가 안량의 원수를 갚겠다는 사사로운 원한 만으로 움직이는 줄 아시오? 이의민이 지금 우리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고 있지 않소. 이걸 지켜만 보고 있으라는 거요?”

“문 장군. 그대는 절대 허무하게 죽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오. 지금 남은 장수들 중 유일한 희망이 바로 문추 장군이란 말이오. 지금 군사들의 희생은 어쩔 수가 없소. 문 장군은 우리 군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오. 이대로 이의민에게 가서 죽는다면 그것은 용기 있고 패기 있는 행동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주군과 군사들을 저버린 불충한 행위요.”

“크윽!”

결국 문추는 분루를 삼키면서도 저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원소군에 있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대로 행동한다면 정말 저수의 말대로 원소에게 가장 크게 불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내가 무얼 하면 되오?”

“저기 저 외벽을 넘어 오는 군사들이 보이시오? 저들을 막아주시오. 그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오.”

“알겠소.”

결국 이의민에게 가지 못한 문추. 그는 지금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외벽을 넘어오는 이의민군 군사들에게 모두 풀 작정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의민군에게 다가가던 문추는 눈에 띄는 한 장수를 발견했다. 바로 일전의 전투에서 자신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던 무명 장수, 감녕이었다.

“네 이놈! 일전에 못다 한 승부를 지금 여기서 결판내자!”

하지만 감녕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군사들만 열심히 상대하고 있었다. 문추는 감녕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다가갔다. 어찌 보면 기습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평소라면 비겁하다고 생각하고는 상대가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불렀을 문추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재수 없게 당했다고 날 원망하지 마라! 지금은 너희 이의민의 졸개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베어버려야 속이 좀 풀릴 것 같다. 이의민의 졸개가 된 너희 스스로를 원망해라!’

문추가 그렇게 감녕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다. 장수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많이 앳되어 보이는 자였다.

“비겁하게 기습을 하려 하다니.... 스스로의 명성이 부끄럽지 않느냐?”

“네놈은 뭐냐? 이런! 아직 어린놈이군. 젖비린내가 나는 놈이 감히 내 앞을 막다니 배짱이 좋구나. 네놈의 이름이 뭐냐?”

“나는 서량의 금마초다.”

“서량의 금마초라....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런데 이리 어린놈일 줄은....”

문추는 그제야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겉모습은 분명 앳돼 보이지만, 서량의 금마초라는 명성을 그냥 얻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곧 마초와 문추가 격돌했다. 둘 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일기토를 했다. 방심이나 탐색전 따위는 없었다. 문추는 그만큼 급했고, 마초 역시 하북 최고의 장수라는 문추를 상대로 적당히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수십 합을 넘어 백 합, 이백 합이 넘어 갔다. 저수는 그래도 문추가 마초 정도의 애송이 장수는 쉽게 상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여간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우위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초조해졌다.

그동안 이의민군의 장료나 감녕, 위연 등에게 입는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그건 약과였다. 이의민에게 박살이 나고 있는 원소군의 피해는 더 어마어마했다. 단 한명에게 당하는 피해라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 와중에 원소는 여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고람과 산사태만 찾고 있다.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전멸을 면치 못할 터, 전풍과 저수는 과감히 결단을 내려야했다.

“주군. 더 이상 고람 장군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진채를 버리고 업으로 퇴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다가 산사태가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가?”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산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간절함이 담긴 전풍의 호통에 원소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도 이제 머릿속으로 이미 인정하고 있던 사실을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 고람은 실패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산사태에 매몰되는 이의민과 그 군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어른 거렸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반드시 승리한다고 생각했던 그 계획들이 모두 백지화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그래도 원소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버틴다면 많은 군사들과 수하들을 다 잃을 것이고, 그리되면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원대한 꿈 역시 접어야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 결단을 내려야겠군. 모두 업으로 퇴각한다!”

원소가 결단을 내리자 전풍과 저수는 다시 바빠졌다.

“모두 진채를 버리고 퇴각한다! 대열을 흩트리지 말고 지키며 퇴각해라. 겁을 먹고 대열을 흩트린 채 퇴각한다면 더 쉽게 죽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버리고 간다!”

늦었지만 전풍과 저수는 퇴각을 위한 최선의 지시를 내렸다. 그만큼 원소군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퇴각을 감행하고 있다. 그래도 모든 원소군 군사들이 전부 무사히 퇴각할 수는 없다.

가장 먼저 마초와 맞붙고 있던 문추가 쓰러졌다. 이백 합까지는 마초와 대등하게 싸우던 문추. 하지만 그 이상 버티지 못했다. 끝내 마초의 창에 가슴이 관통당하며 쓰러졌다.

“무, 문추! 문추! 이럴 수는 없다... 안량도 모자라 문추마저 쓰러지다니....”

원소는 피눈물이 흐르는 심정으로 문추를 불렀다. 전풍과 저수도 문추의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그를 추모한답시고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주군! 어서 퇴각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진채 밖을 나가려는 원소. 하지만 이의민과 그의 군사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저기 원소다! 원소를 잡아라!”

너무 큰 피해로 인해 병력은 완전히 열세가 됐다. 거의 진채 안에서 포위당할 지경이 됐다. 전풍과 저수가 큰 소리로 군사들을 독려하며 퇴로를 뚫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겨우 진채 밖을 나가는 군사들도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어느새 황충이 궁병부대를 이끌고 진채 밖으로 퇴각하는 군사들을 저격하고 있었다.

결국 이대로 남은 군사들이 안전하게 퇴각하는 건 불가능했다. 반드시 누군가 미끼가 되어야만 나머지 군사들이 퇴각 할 수 있다.

저수가 전풍을 불렀다.

“원호. 잘 들으시오. 지금 상황에서 모두 퇴각할 수는 없소.”

“나도 알고 있소. 그럼 누구를....? 설마....? 아니 되오! 저 군사가 아니면 누가 주군을 모신단 말이오?”

저수는 자신이 미끼가 되려고 결심을 내렸다. 전풍은 그것을 깨닫고 안 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저수의 결심은 확고했다.

“원호, 그대도 있고 아직 순우 장군이 있잖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니면 주군이 퇴각하실 만한 시간을 끌지 못할 것이오.”

“그럼 차라리 내가....”

“나보다는 그대가 주군 곁에서 더 큰일을 할 사람이오. 어서 가시오!”

저수는 거칠게 전풍을 밀어냈다. 전풍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원망스럽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비는 우리에게 행운을 주는 비가 아니라 불행을 주는 비였구려.... 비 때문에 화계도 쓸 수 없고... 우리 모두가 계책 하나만 믿고 방만해 있었으니....”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소. 부디 내 희생이 헛되지 않게만 해주시오. 원호.”

“알겠소. 반드시 그리 하리다.”

전풍은 그렇게 원소를 데리고 진채를 빠져나갔다. 황충의 화살이 여전히 퇴각하는 원소군을 노리려 했지만 저수가 빠른 판단을 내리고는 절묘하게 그 앞을 막게 했다.

“남은 군사들은 방패를 들고 북쪽 출구로 간다! 주군께서 무사히 퇴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번다!”

이후로도 저수의 지휘가 빛을 발했다.

“1열부터 5열까지의 병사들은 움직이지 마라! 내가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나를 믿고 방패를 들어라! 거기! 앞만 보고 움직이지 마라! 그럴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더냐? 훈련 받은 대로만 움직여라! 그리 하면 살 수 있다!”

이의민은 그런 저수를 보면서 감탄을 터뜨렸다. 적의 참모지만 참으로 탐나는 인재였다.

“전의를 상실할 만도 한데 군사들의 투지를 저리 이끌어내는 지휘라니.... 대단하군.”

그런 저수의 활약 속에 원소는 끝내 퇴각할 수 있었다. 저수는 멀어지는 원소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끝까지 자신을 따라 남은 군사들에게 마지막 명을 내렸다.

“되었다. 이제 다들 무기를 버려라.”

마지막까지 남았던 원소군이 무기를 내리며 싸울 의지를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저수가 그들 앞으로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와 이의민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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