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무너지는 건 산이 아니라 희망 (2)
기세 좋게 원소군 진채를 공격하던 이의민군이 일제히 멈췄다. 이의민군 군사들은 갑작스런 명에 영문을 몰라 했다. 지금처럼 압도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왜 공격을 멈춘단 말인가? 거기다 그 명을 내린 자는 다른 이도 아니고 이의민이다.
평소의 이의민이었더라면 끝까지 돌격하라 외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선두에서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 있을 것 아닌가.
의아한 건 한창 얻어맞고 있던 원소군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적들이 왜 공격을 갑자기 멈추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이군. 이대로 계속 공격을 받았으면 정말 전멸하는 게 아닐까 했어.”
원소군에게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패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상대가 스스로 물러가주니 말이다. 물론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숨 돌릴 기회만 얻은 것뿐이지만.
그렇게 이의민군이 자신들의 진채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대략 이틀 후 이의민과 순유 등을 경악하게 만들 소식이 그들을 찾아왔다.
바로 서황의 전령이 이의민의 진채에 도착한 것이었다.
“주군! 서황 장군이 전령을 보내왔었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그간 폭우가 너무 심하게 내려 흑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 지역 토박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만약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특히 이 조가현이 피해를 심하게 입으니 반드시 피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령의 얘기에 모두 대경했다. 지금 진채를 세운 조가현 땅 대부분이 흑산 아래에 있다. 그런데 산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주군! 어서 진채를 거두고 피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서 장군의 얘기대로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이곳 진채를.... 아니. 조가현 전체를 뒤덮을 정도일 겁니다. 단순히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조가현을 떠나셔야....”
모두 큰 소리를 내며 조가현에서 떠나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의민은 모두의 의견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서황의 보고를 듣고 당장 여길 떠야 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의견은 아직 듣지 못했다.
“공달.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그런데 순유는 다른 이들처럼 당장 호들갑을 떨지 않고 가만히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잠깐....! 흑산에서 산사태라니.... 그걸 원소는 정녕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설마 알고 있었다면....? 그럼 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진채를 죽도록 사수한 까닭이....?’
서황의 보고를 듣고 나니 지금까지 원소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가져왔던 의문들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가져온 이유를 몰랐던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이것이었구나!”
갑자기 순유가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니 이의민도 급해졌다.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닌가.
“공달. 어서 얘기해봐. 지금 시간이 없어. 공명의 보고대로 신속히 이곳을 떠나야 함이 맞지 않겠나?”
하지만 순유는 이의민의 얘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산이 무너진다는데 일단 피하고 봐야지.”
“주군. 그간 저들이 왜 그리 저 진채를 죽도록 사수하려고 했었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간 이 지역을 오랜 시간 동안 다스려왔던 원소입니다. 그런 그가 산사태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조가현을 전장으로 선택했겠습니까?”
“그렇군. 정말 이상한 일이군. 본초가 산사태를 정말 몰랐다? 그 정도로 무능한 인물은 아니지. 그런데 지금 본초가 피하지 않고 진채를 사수하고 있다라....”
“원소는 조가현에서도 산사태를 완벽히 피할 수 있는 위치를 알고 있고, 바로 저 진채의 위치가 그 곳이라는 얘깁니다.”
이제 순유가 한마디를 하면 바로 알아듣는 이의민. 그리고 순유의 얘기의 허점도 바로 찾아냈다.
“잠깐...! 원소가 그럼 산사태만 기다리며 저 진채를 사수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산사태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 날지, 과연 일어날지 말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원소가 단순히 운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는 얘기인가?”
“그것도 아닐 겁니다. 저들은 직전의 전투 이전에는 진채 밖으로 나와서 적극적으로 싸웠습니다. 그 말인즉슨, 언제 산사태가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마 이곳 조가현에 산사태를 막을 둑 같은 것을 미리 설치했을 겁니다. 그리고 주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그것을 이용할 계책을 세웠겠지요.”
역시 순유다. 서황의 산사태 가능성 보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꿰뚫었다.
“그렇군. 그런데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산사태로 우리 군사들을 쓸어버릴 기회가 많았습니다. 분명 다른 변수가 생겨서 차질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지요. 어쩌면 서 장군이 흑산에서 원소군의 계책을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찌 됐든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습니다. 어차피 이 많은 대군이 조가현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적잖이 걸립니다. 차라리 눈앞의 진채를 점령해서 산사태의 위험을 벗어나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설사 서 장군이 막아서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섬멸해야 할 적을 치는 것이니 다를 건 없습니다.”
순유의 얘기에 모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도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후진보다는 전진이 마음에 드는 것이 그의 성정 아닌가.
“그렇군. 이제 저 진채만 점령하면 산사태고 뭐고 승부는 끝난다는 얘기로군. 그럼 지체할 것이 없다! 다시 출정한다!”
지금까지는 적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서 이의민도 최대한 조심하면서 공격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의민의 지시에 성난 군사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그들도 당장 눈앞의 작은 진채를 박살내고 원소군을 섬멸하고픈 심정이다.
이의민이 또 선두로 나가려고 갑주를 입고 있는데 순유가 다가와 갑자기 고개를 조아렸다.
“공달? 왜 그러는가?”
“주군. 지난날이 부끄럽습니다. 이번에는 저 쪽의 군사들에게 한 방 크게 먹었습니다.”
“그런 천재지변까지 자네가 어찌 일일이 예측을 할 수 있겠나? 어찌 저 거대한 흑산이 무너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냔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아무런 피해도 없잖나.”
“서 장군이 운 좋게 막았든 아니면 저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든 운이 좋았을 뿐이 아니겠습니까? 군사로서 적들의 계략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운도 실력이란 말이 있지.”
“그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 수모를 오늘 전투에서 반드시 갚기 위해 숨겨둔 비장의 한수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공성을 할 때 준비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 가능한 진채를 빨리 점령해야 하니 아낌없이 쓰려고 합니다.”
“비장의 한수?”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란을 가져와라!”
순유의 명에 따라 수십의 통나무를 엮어 만든, 마치 망루와도 같은 거대한 목조 구조물이 등장했다. 그 정란이란 것은 하단부에 바퀴가 달려서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게 뭔가?”
“정란이란 것인데 적 성벽을 손쉽게 점령하기 위해 간의대부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입니다.”
역시 이 정란을 발명한 이는 유엽이다.
정란은 기본적으로 이동식 망루로서 꼭대기에 군사를 태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군사들이 정란을 타면 높은 위치에서 화살을 쏠 수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정란 위의 발판을 이용해 적 성벽이나 목책을 손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성벽을 목표로 만든 것인 만큼 지금 원소군의 진채는 훨씬 더 쉽게 넘을 수 있으리라.
“호오! 좋군. 당장 써 봐.”
이의민의 명에 의해 정란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등장했다. 병사 수십 명을 태울 수 있고, 높이는 거의 성벽만한 정란이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정란의 등장에 원소군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겁을 먹었다.
“저, 저게 무엇이냐?!”
“망루 같긴 한데... 망루가... 망루가 움직입니다!”
“망루가 움직인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모두가 정란에 주목하고 있을 때 이의민은 적토마를 타고 움직였다.
이의민도 호기심에 정란을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 그는 애마인 적토를 타고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그리고 이는 순유의 계책이기도 했다.
정란의 등장으로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원소군은 상대적으로 진채 출입구에 대한 방어가 소홀해졌다. 이의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적토마가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원소군 진채 출입구를 뚫었다.
“크어억!”
기병이 함부로 돌진하지 못하도록 목책이 세워져 있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의민과 적토마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목책은 대부에 완전히 박살이 났고, 창을 세워 그를 막으려던 군사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의민 홀로 진채 안으로 들어가서 원소군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놀란 눈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다.
“이, 이의민이다!”
저수는 멍청하게 이의민을 바라만 보고 있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이의민을 잡아라! 지금이 기회다!”
당연히 진채 안은 기병이 활개를 칠 만한 공간은 아니다. 막사나 목책 등 여러 구조물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말들이 제대로 탄력 받아 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토마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적토마는 일반적인 말들처럼 그냥 냅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자유자재로 방향 전환을 하며 이의민을 도왔다. 그러니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날뛰는 것 같은 효과를 보고 있다.
순간적으로 모든 원소군 군사들의 시선이 이의민에게 집중됐다. 순유는 그때 정란을 이끄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이다! 지금 정란으로 진채 벽을 넘어라!”
정란이 진채 벽에 바짝 다가가더니 발판을 진채 벽에 갖다 댔다. 그리고 정란 안에 있던 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는 장료와 마초, 감녕, 위연 등이 있었다.
이의민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원소군은 혼비백산했다. 갑자기 진채 벽을 넘어 수십 수백 명의 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니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저수 쪽에서는 이의민을 막으라고 소리치고 있고, 진채 외벽 쪽에서는 곽도가 정란에서 나온 군사들을 막으라고 소리치고 있다.
“뭣들 하느냐?! 진채 외벽 쪽을 막아라! 적들이 진채 안쪽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원소군은 도대체 누구의 명을 들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 와중에 정란에서 나온 군사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장료와 감녕, 위연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특히 마초의 활약이 발군이다. 마초가 창을 찌르면 일합에 쓰러지지 않는 원소군이 없었다.
말단 군사들만 그리 쓰러지는 게 아니었다. 원소군에서는 나름 명성을 쌓은 장의거가 마초 앞을 막았다.
“이 어린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날뛰느냐?!”
장의거는 기세 좋게 소리치며 마초의 앞에 나섰지만, 단 일합을 버티지 못하고 창에 목이 꿰뚫렸다. 그 사이 정란을 타고 진채 안으로 넘어 들어오는 이의민군 군사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원소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 깨물었다. 산사태만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산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이의민군이 이 진채 안으로 들어온다면 사이좋게 같이 산사태를 피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