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무너지는 건 산이 아니라 희망 (1)
서황은 고람을 쓰러뜨린 후 얼른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둑을 살펴라! 혹시라도 무너질 낌새가 있는지 확인하라!”
고람과 원소군이 밧줄을 제대로 잡아당기지 못한 것을 확인하기는 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저 둑이 무너지는 순간 조가현에 있는 이의민의 대군이 그대로 파묻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서황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둑은 아주 견고합니다!”
“휴우! 다행이군.”
역시 몇 명의 군사들이 잡아당긴 것으로는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기에는 턱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서로 친해진 흑산적, 백파적들은 둑을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하이고! 원소 이 놈. 대인군자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완전 미친 새끼였네.”
“그러게 말이야. 이걸 무너뜨렸으면 승상의 군사들은 물론 산 근처의 민가에까지 덮쳤을 것 아닌가? 여러 사람들 생매장 시켰겠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악귀가 따로 없군.”
서황은 백파적과 흑산적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다친 곳은 없는가?”
이미 안면이 있는 백파적들은 서황을 반겼고, 흑산적들은 다소 쭈뼛거리며 그를 맞이했다.
“헤헤! 싸움은 장군님께서 다 하셨는데 저희가 다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 흑산적도 정동장군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둑이 터졌으면 애써 지었던 저희 산채도 다 날아갔을 겁니다.”
“다들 고생 많았다. 그대들 덕분에 승상께서도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일단 자네들에게 밥과 고기, 그리고 술을 내리겠네. 물론 상은 그걸로 끝이 아닐세. 내 승상께 말씀 드려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야.”
서황의 얘기에 백파적들은 물론 흑산적들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딱히 상을 바라지 않고 한 일에 큰 보상이 따를 거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물론 차후에 줄 상보다 지금 당장 밥과 고기, 술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다.
“이들에게 당장 밥과 고기, 술을 내주어라! 너희들도 같이 먹고.”
그렇게 서황군과 백파적, 흑산적이 한데 어우러져 때 아닌 잔치를 벌였다. 백파적과 흑산적들은 정말 걸신이라도 걸린 듯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서황군 군사들도 바쁘게 손을 움직였지만 백파적, 흑산적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아무래도 틈만 나면 이 정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서황군 군사들에 비해 백파적과 흑산적들은 거의 먹지 못한 음식들이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서황은 살짝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소에 얼마나 제대로 먹지 못했으면....’
서황은 처음 만났던 백파적 선곤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을 걸었다.
“선곤이라 했지? 자! 받게.”
“아이고! 소인이 어찌 감히 장군님의 술을....”
“괜찮으니 어서 받아.”
선곤에게 술을 따라준 서황은 그들의 행색을 보며 슬쩍 물었다.
“아까 대충 듣기는 했네만... 자네들 사는 것은 어떤가? 이곳에서 먹고 사는 것이 쉬워보이지는 않네만...”
“그렇습니다. 그냥 하루는 사냥을 하고 하루는 채집을 해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 뿐이지요. 지금은 그나마 여름이라 조금 낫지만 겨울이 되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힘들었겠군....”
“그래도 어찌 보면 다행입니다. 산 속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면, 원소 그 놈에게 징병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 만약 저희가 원소군 소속이었다면 장군님이나 승상을 적으로 맞이했을 터인데....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끔찍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지요.”
“하하하! 이제 전쟁터에 나가는 게 두려운 것인가?”
“장군님! 우리가 언제 싸움을 두려워했습니까? 승상과 서 장군님의 적이 되는 게 싫을 뿐입니다.”
딱한 눈빛으로 선곤과 백파적, 흑산적들을 보던 서황.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주군께서는 예전에 이들을 모두 받고 싶어 하셨지만 그리 하지 못하셨지.’
당시 이의민은 모든 흑산적, 백파적 투항자들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서황은 사정이 달랐다.
이의민도 서황에게 병주에서 병력을 더 모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 모아보라고 했었다.
게다가 이들은 이번 일에 엄청난 공이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의민군이 몰살당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막았으니 어찌 큰 공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자네들과 흑산적들 말이야. 머릿수가 어느 정도 되는가?”
“글쎄요.... 여기 저기 흩어져 살다보니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예전 식구들을 다 끌어 모으고 여기 흑산적 식구들까지 모두 합류한다면... 대략 1만여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만이나 된다는 얘기에 서황은 귀가 솔깃했다.
“정말 1만이나 된다는 말인가?”
“예. 저희 예전 식구들을 다 합치면 그 정도 충분히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직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럼 자네들도 이제 승상을 따르는 건 어떻겠나? 이번 일에 자네들도 큰 공이 있으니 내가 승상께 말씀드려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겠네.”
서황의 제안에 백파적과 흑산적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들도 원하는 바였다.
“저, 정말이십니까? 저희들도 이제 승상의 군대가 될 수 있는 겁니까?”
“대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자들만 합류할 수 있네. 자네들도 알겠지만 승상께서는 우리가 지금껏 봐 온 위정자들과는 다르네. 그 분의 명예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해선 절대 아니 될 일이야.. 그런 놈이 있다면 내 대부가 바로 용서치 않을 것일세.”
“걱정 마십시오. 장군. 우리 식구들 중에 그런 놈은 없습니다. 그럼 놈이 있다면 우리 형제들이 먼저 처단할 것입니다.”
그렇게 흑산적과 백파적의 서황군 합류가 순식간에 이뤄졌다. 덕분에 1만 군사가 2만으로 불어난 서황이다.
“일단 승상을 따르겠다면 자네들이 병주에서 할 일이 있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기존의 병주 태수들이나 현령을 모두 쫓아낼 건데... 사실 그 일은 별로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 중요한 것은 지금 병주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흉노를 상대하는 일이야. 자네들은 토벌 이후 오랫동안 전투를 한 적이 없을 테니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서황은 살짝 걱정하면서 입을 열었는데, 막상 흑산적들과 백파적들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서황의 얘기를 받았다.
“걱정 마십시오. 아까 소인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승상이나 서 장군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래. 한번 믿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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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흑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곧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눈앞에 있는 이의민과 그 군사들을 덮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흑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뭔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원소는 불안한 표정으로 저수에게 물었다.
“둑을 터뜨리는 작업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직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시간이 예상보다 더 늦춰질 수도 있습니다.”
저수는 단순히 작은 변수로 인해 고람이 둑을 터뜨리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의민이 원소가 산사태와 물난리를 일으키려 세웠던 계략을 애초부터 눈치 챘더라면? 아마 절대 이 조가현을 전장으로 선택하지 않았을 터였다. 별동대를 보내서 고람을 막으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고람이 아니더라도 산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천재지변이란 것이 원래 예측하기 힘든 것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해가며 조가현을 전장으로 택할 이유가 없다.
원소도 저수의 말이 옳다고 여겨 군사들을 더 독려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있으면 저놈들은 모두 흙더미에 파묻힐 것이다!”
그렇게 산사태를 기다리는 원소.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산사태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소는 다시 저수를 다그쳤다.
“저수! 정말 조금 더 늦어지는 것이 맞는가?”
“그것이....!”
이번에는 저수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늦을 수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산사태를 기다리는 사이 원소군은 점점 더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원래 조가성에서라도 수성을 했으면 적당히 피해를 입는 선에서 전투가 마무리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원소는 산사태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이곳에 진채를 구축했다.
단단히 쌓아올린 성이 아니라 대충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진채이니 파죽지세의 이의민군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퇴각을 할 수도 없었다.
퇴각을 결정했다가 그때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그럼 그때가 더 문제였다.
원소군 진채를 점령한 이의민군은 산사태를 고스란히 피해갈 것이고, 도망치는 원소군은 반대로 산사태에 쓸려 내려갈 터였다.
그러니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퇴각을 할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원소군이다.
“크윽!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점점 피해가 커지고 있잖은가?”
원소의 분노서린 외침에 저수도 전풍도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산사태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 믿음만으로 지금까지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
그런 원소군 진채를 공격하는 이의민군의 기세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이의민을 필두로 신나게 원소군을 박살내고 있다. 원소군은 반격할 의지도 잃고 방어에 급급하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는 상대가 도망치는 것보다 지금 상황이 차라리 더 나았다.
그 와중에 순유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음.... 분명 뭔가 숨겨둔 계획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순유로서는 원소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승기는 완전히 이의민군 쪽으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진채를 버리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원소군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진채는 반드시 지켜야할 위치도 아니고 그만큼 공들여 지은 진채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원소군이 진채를 어떻게든 사수하려 한다는 것은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분명 있다는 것을 느낀 순유다.
‘척후들의 보고에는 진채 주변에 특별한 그 어떠한 것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저런 진채 안에 대단한 것을 숨겨 놓을 수도 없을 터고....’
순유는 이미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척후들을 통해 원소군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럼에도 전혀 특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순유는 계속 전투 시작 전부터 찜찜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찜찜한 느낌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기분은 찜찜하니 미칠 노릇이다. 항상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순유 입장에서는 더욱 생소한 경험이었다.
순유가 그리 찜찜함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선두에 있던 이의민이 돌아왔다.
“주군? 어쩐 일로 돌아오십니까?”
“지금쯤 자네의 조언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돌아왔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나?”
“부끄럽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공달이라고 어찌 모든 것을 다 알겠나? 어쨌든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다고? 그럼 일단 오늘 공격은 여기까지만 하지. 군사들도 지쳐가고 놈들도 꽤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 똑똑한 순유가 불안감을 느끼니 이의민도 예사로 넘길 수 없었다.
“공격 중지! 이만 우리 진채로 돌아간다!”
결국 군사를 물리고 진채로 돌아가는 이의민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