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뜻밖의 조우 (2)
서황은 바로 선곤이 얘기하는 그 토박이 흑산적을 찾아갔다. 흑산적들은 갑작스런 서황의 방문에 놀랐지만, 관군, 그것도 승상의 군대와 싸울 의지는 없었다. 그래서 서황에게 순순히 협조했다.
“만약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 것 같으냐? 혹시 조가현에도 피해가 가지 않겠느냐?”
서황도 조가현에서 이의민군과 원소군이 맞붙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조가현은 위치상 산사태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물론 조가현에도 산사태를 피할 만한 위치가 있긴 있습니다만, 아주 제한적인 지형 몇 군데만 피할 수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사태에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흑산적의 얘기에 서황은 골치가 아파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산사태가 일어나는 순간 이의민의 군대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었다. 물론 그 말인즉슨, 원소군도 같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전쟁에서 아군이 크게 불리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서황은 이의민군이 이길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굳이 산사태로 양 측 모두 큰 피해를 입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운에 맡길 수도 없었다. 흑산적의 말에 따르면 운 좋게 산사태를 피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한 수준이다.
“지금 당장 주군께 조가현에 산사태가 일어날 지도 모르니 피신하시라는 전갈을 올려라!”
“옛! 장군!”
전령이 전속력을 다해 뛰어갔지만 여전히 서황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이나 내일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아니. 이틀 정도 뒤에 산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전령이 이의민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산사태가 조가현을 덮칠 터였다.
초조해진 서황은 전령을 보내놓고도 계속 흑산적에게 산사태에 대해 물었다.
“그럼 실제로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
“그래도 최근에는 산사태로 피해를 보는 일이 많이 줄어들긴 했습니다. 며칠 전까지 미친 듯이 비가 쏟아졌는데도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잖습니까? 그럼 앞으로도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가...?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
다소 안심하는 서황. 그런데 흑산적의 얘기 중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서 피신까지 할 정도라면서, 며칠 전 그 폭우에는 정작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닌가? 그건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아! 그건 최근 원소가 둑을 쌓은 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덕분에 최근 산사태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사실 저희도 안심을 하고 계속 산 위에 있을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피신을 한 겁니다.”
흑산적의 얘기에 서황은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다름 아니라 둑을 쌓은 주체가 원소라니 의심이 절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뭣이? 원소가....? 하필이면 원소가 둑을 쌓았다고....?”
“원소 입장에서도 당연히 둑을 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비만 내리면 산사태로 피해가 크니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원소는 지금 조가현이 산사태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둑을 자기가 쌓았으니 잘 알겠지요?”
‘자기들도 산사태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굳이 조가현을 전장으로 삼았다라....’
서황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잠깐! 조가현에도 산사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걸 원소도 알지 않겠나?”
“당연히 알겠지요.”
“그렇군...! 만약 원소가 그 둑을 터트린다면 어찌 되겠나?”
“당연히 폭우에 둑에 있던 물까지 더해지면 지반이 약한산들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겠죠. 하지만 원소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희가 내려오기 하루 전, 원소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둑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봤습니다. 아무래도 비가 오니 관리를 하는 것 아닐까요?”
서황은 자신의 불안한 예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의민이라는 대적을 앞둔 원소가 병력을 빼돌려가며 둑까지 신경 쓸 확률은 낮았다.
‘그럴 바에야 아예 산사태 걱정이 없는 다른 곳을 전장을 삼았겠지...’
서황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당장 그 둑으로 간다! 너희들이 둑으로 가는 길 안내를 하도록!”
“예?! 피신했던 산으로 다시 가라고요?”
“산사태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여기 있는 우리 밖에 없다!”
“하지만 둑이 있어서 가능성이 낮은데....”
“그 둑을 원소가 직접 무너뜨린단 말이다!!”
흑산적은 영문을 몰라 했지만, 그래도 일단 서황의 말대로 길잡이를 하기로 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렸다고 하니 협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 도적이었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의민이 다녀간 뒤 나름 개과천선한 이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부탁이다.
졸지에 피신했던 산으로 다시 올라가게 된 흑산적들. 한참 올라가다가 한 곳을 가리키며 서황에게 일렀다.
“바로 저곳이 원소가 만든 둑입니다요.”
서황이 보니 확실히 거대한 둑이 있었고, 그 근처에 원소군으로 보이는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서황은 당장 그쪽으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저들을 덮치려면 몰래 덮쳐야 했다. 만약 서황과 군사들이 오는 것을 저들이 알고 지금 당장이라도 둑을 무너뜨린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그런데 수십 수백 명도 아니고 무려 1만의 군사가 다가오는데 모를 리가 없잖은가.
“저기까지 몰래 가야 하는데....”
서황의 고민에 흑산적이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저기까지 들키지 않고 가는 길이 있긴 있습니다. 허나....”
“무슨 문제가 있느냐?”
“길이 좁고 험해 다수의 군사들이 가기는 힘듭니다. 즉, 이 군사들이 다 가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서황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흑산적이 알려준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들 저들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따라와라.”
서황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혼자라도 가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는 생각이다.
**
둑을 지키고 있던 고람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근처에 있던 흑산적이 피신가는 것도 이미 확인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살폈는데 역시 자신들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저수 군사와 약속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이제 반 시진 정도 남았습니다.”
“반 시진이라... 흐흐흐! 생지옥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지 못해 유감이구나. 자! 슬슬 이 곳을 빠져나간다. 둑을 무너뜨릴 장치는 잘 확인했느냐?”
“물론입니다. 멀리서 이 밧줄만 잡아당기면 둑은 삽시간에 무너질 겁니다.”
고람은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것을 느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원소가 승리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콧노래까지 나왔다.
“자자! 다들 고생 많았다. 주군께서 너희들의 공도 잊지 않으실 것이.... 허억!”
얘기를 하던 고람은 본능적으로 대도를 들었다.
콰쾅!!
그리고 그 대도 앞에 대부가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고람을 공격한 대부의 주인은 역시 서황이었다. 그래도 고람은 원소의 상장군답게 서황의 기습공격을 피해 없이 막아냈다.
“웬 놈이냐?!”
“사실이었군. 미친놈들...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키려고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이 놈! 역적 이의민의 졸개로구나. 크흐흐! 그래.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키려고 하는 건 네놈 말이 맞다. 하지만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인 것 같군. 나와 이 많은 군사를 막아보려고 혼자 왔단 말이냐? 네놈이 이의민도 아니고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느냐?”
고람의 말대로 현재 서황은 혼자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군사들은 좁고 험한 길을 오느라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 무기를 가지고도 이리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자는 서황이 유일했다.
홀로 고람과 다수의 적군을 상대해야 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서황도 좁고 험한 길을, 그것도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길을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이미 체력을 상당히 소진했다.
그렇다고 서황은 남은 군사들을 기다리며 천천히 올 수도 없었다. 언제 고람이 둑을 무너뜨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람이 둑을 무너뜨리는 것을 저지한다는 일념하나로 홀로 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린 서황이다.
“나 혼자 네놈들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 보느냐?!”
서황은 다시 젖 먹던 힘을 끌어내며 고람에게 대부를 휘둘렀다.
고람은 감탄하면서 서황을 상대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틀림없이 서황이 고람을 압도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서황에게 너무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하구나. 그리 패기를 부릴 만 해. 허나 더 이상 네놈과 놀아줄 생각은 없다. 다들 뭣들 하느냐?! 이놈을 쓰러뜨려라!”
원소군이 순식간에 서황을 포위했다. 서황도 물러서지 않고 원소군을 상대하면서 고람을 도발했다.
“이놈! 사내답게 맞붙지 않고 군사들 뒤로 도망치려하느냐? 가운데 달린 것이 부끄럽지 않나?!”
“훗! 네놈이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다. 난 둑 만 무너뜨리면 된다.”
하지만 고람은 콧방귀를 뀔 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고람은 순간의 호승심으로 계획을 망칠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서황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군사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시 둑을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했다.
‘크윽! 저놈이 둑을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허사인데....’
서황은 어떻게든 원소군을 뚫고 고람에게 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군사들은 원소군 중에서도 나름 정예 중에 정예였다. 게다가 서황은 많이 지쳤다. 결코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고람은 서황이 발버둥 치는 것을 여유롭게 보면서 부관에게 물었다.
“시간이 되지 않았나?”
“아직 입니다. 대략 일 각 정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아직도 그만큼 남았나? 그럼 가만히 구경만 하며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고람은 일 각 이란 시간동안만이라도 서황을 상대하기 위해 다가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황의 대부는 춤을 추고 있다. 이의민 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그 어떤 이들보다 힘 있고 화려하게 대부를 휘둘렀다.
“대단하군! 네 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난 정동장군 서황이다!”
“서황이라.... 그렇군. 들은 적 있어.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물론 일대일로 붙고는 싶지만 네놈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에 그리 할 수는 없지.”
군사들과 함께 서황을 공격하는 고람. 서황의 손발이 더 어지러워졌다. 군사들만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상장군인 고람까지 가세하니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점점 서황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크흐흐! 이제 슬슬 끝내야겠군. 서황. 그래도 네놈의 패기는 기억해주겠다.”
그때 수풀 쪽에서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
“야이! 새끼들아! 감히 우리 서 장사를! 어이! 형제들! 서 장사가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건가?!”
“장군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서황의 군사들과 흑산적, 백파적들은 순식간에 원소군을 쓰러뜨렸다. 원소군은 정예들이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기습까지 당한 터라 손쓸 틈이 없었다.
이제 서황과 고람의 입장이 바뀌었다. 고람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줄을...! 줄을 당겨라!”
아직 쓰러지지 않은 원소군 몇몇이 다급하게 둑에 연결된 줄을 당겼다. 하지만 그들은 낑낑거리기만 할뿐 줄을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 거대한 둑을 무너뜨릴 줄이다. 적어도 백여 명 이상의 사람이 한번에 힘을 줘서 당겨야 했다. 몇 명의 힘만으로는 당길 수도 없는 줄이었다.
‘크윽! 아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줄을 당겨야 한다!’
고람은 자신이 직접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의민이 아니었다. 혼자 아무리 당겨도 둑은 무너지지 않았다.
뒤쪽에선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람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며 줄을 당기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제 네놈 하나 남았다.”
“끝난 건가....?”
고람은 손에서 줄을 놓았다. 그리고는 대도를 다시 손에 쥐었다.
“나는 하북의 상장군 고람이라고 한다.”
“그래. 내 이름은 아까 말했지. 자! 오게. 일대일일세.”
서황과 고람은 서로 반대의 입장이 되었지만, 서황은 고람과 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았다.
곧이어 서황의 대부와 고람의 대도가 맞부딪혔다. 서황은 일격에 끝내겠다는 듯 모든 힘을 대부에 실어 힘껏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동시에 1만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