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뜻밖의 조우 (1)
병주 상당군 장자현.
그곳의 백성들은 매일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과거에는 흑산적이니 백파적이니 하는 도적들이 들끓어 살기 힘들었다. 관군이 있긴 했지만 그들을 전혀 토벌하지 못하면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낙양에서 토벌군이 온 후 도적들을 드디어 토벌하며 겨우 살만해지나 싶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별로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후 원소가 병주로 들어왔고 여포와 결탁하여 기존 병주자사였던 정원을 제거했다. 그리고는 여포를 앞세워 무리한 수탈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포가 병주를 떠난 후는 더 가관이었다. 병주자사 직위를 마음대로 강탈한 원소는 병주 백성들을 있는 대로 벗겨먹었다.
말도 안 되는 세율을 붙여서 세금을 받는가 하면, 별의별 명목으로 세금 징수 목록을 늘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하면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명목상 관군이지 사실상 도적떼들과 다를 바가, 아니. 흑산적과 백파적이 설칠 때보다 훨씬 더 심했다.
결정적으로 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후반의 남성들을 모두 징집해버렸다. 팔다리가 없는 정도의 장애를 가지지 않은 자는 모두 징집 대상이었다. 그들은 생산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인원들이다. 그런 인원들을 전부 징집해놓으니 농사든 사냥이든 상행이든 생산 활동이 제대로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세금 낼 환경을 최악으로 만들어놓고 세금은 가장 무겁게 부과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도적 그 이상이었다.
그러다가 원소는 아예 병주에서 징집한 병력들을 모두 데리고 철수해버렸다. 태수 치소와 현령 치소를 방어할 병력만 딱 남기고 그 외에는 최소한의 병력도 남기지 않고 다 빠졌다는 얘기다.
병주 전체에서 관의 영향력이 전부 사라졌다. 그러니 병주 외곽에 위치한 지역은 오랑캐들로 인해 난리도 아니다. 거의 지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나마 이곳 장자현은 병주에서도 외각 지역은 아니라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북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또 갑자기 어디서 도적들이 나타나서 살육과 약탈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면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장자현 백성들은 차라리 이전보다는 지금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관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한 적도 없는데, 지금처럼 세금이라도 떼어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랬는데 오늘 또 정체불명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장자현 백성들은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불만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모두 징집을 당한 터라 남은 백성들은 거의 여성이거나 어린아이들 또는 노인들뿐이었다. 그들은 군사들이 들리지 않게끔 서로 수군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놈들.... 이 마을에 남자란 남자는 죄다 끌어 가놓고는 또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러게 말이야. 아니 그래도 흑산적이니 백파적이니 하는 것들 때매 분위기 뒤숭숭한데....”
“이리 된 거 그냥 죽읍시다. 난 자식 놈들 모두 끌려가고 가족 중 나만 남았소. 저놈들에게 죽으나 굶어 죽으나 어차피 이판사판이요.”
그들 중 가장 백발이 성성하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촌장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잃을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그들이지만 마지막 하나 남은 목숨까지 뺏길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진정하시오. 군사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소.”
“빌어먹을! 들으라고 하시오! 배고파 뒤질 지경인 우리에게 먹을 걸 내놓으라고 할 놈들이요. 어차피 뒤질 거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저들이 진짜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온 것인지 아직 모르잖소. 자초지종을 물어봅시다.”
“보나마나 뻔하지. 여태껏 관군이라고 온 놈들 중에 다른 놈들이 하나라도 있었소?”
“그래도 확인도 하지 않고 아까운 목숨을 섣부르게 버릴 필요는 없소.”
결국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말을 듣기로 했다.
촌장은 대표로 나서서 다가오는 군사들을 맞이했다.
“나으리. 소인이 이 곳의 촌장입니다. 한데 무슨 일로... 저번에 이미 젊은 남자들은 죄다 끌려가서 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촌장이 다가가자 1만군사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바로 서황이다. 1만 군사들은 당연하게도 이의민이 병주를 점령하라고 서황에게 준 별동대고.
서황은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촌장을 얘기를 듣고 보니 그간 원소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수탈을 감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군.... 얼마나 백성들을 수탈했으면.... 정말 주군과는 너무 비교되는 행보이지 않은가.’
동시에 이의민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훌륭한 관리인지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
서황은 자신도 이의민처럼 백성들에게 인자한 관리가 되기 위해 최대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촌장에게 얘기했다. 물론 얼굴 때문에 인자함보다 험상궂음이 더 표출되었지만.
“젊은 남자라니? 오해 말게. 난 이곳에 징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그 반대일세. 병주 백성들을 보살피러 왔네.”
서황의 얘기에 촌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관군을 절대 믿지 않았다. 여태껏 좋은 얘기를 하며 왔다가 있는 대로 수탈해간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서황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생긴 것만 봐도 절대 좋은 사람 같지는 않다.
그런데 불현 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이 장군이 지금 들고 있는 무기가 대부....?’
병주 백성들도 승상 이의민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들어보았다. 그리고 소문을 통해 그가 대부를 주무기로 애용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실제로 이의민이 후장군이던 시절 병주 백성들을 흑산적과 백파적의 마수에서 구해준 인물이 아니던가. 게다가 낙양에서 들려오는 선정에 대한 소문도 무수히 들었다.
물론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라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 희망이 없으니 그런 소문에라도 희망을 거는 백성들이 점차 많아졌다. 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는 승상께서 오셔서 이 어지러운 병주를 낙원으로 만들어 주실 거라는 내 희망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인가....?’
“호, 혹시....?”
“왜 물어볼 게 있는가? 뭐든 물어보게.”
“스, 승상이십니까?”
“아... 그건 아니고....”
“아아.... 아니었구나....”
서황이 자신은 이의민이 아니라고 밝히자 금세 풀죽은 표정을 짓는 촌장. 서황은 그런 촌장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승상의 명을 받고 온 정동장군 서황이다.”
“스, 승상! 그럼 여기 이 군대는 승상의 군대가 맞습니까?”
“승상의 명을 받고 온 내가 이끄는 군대니 당연히 승상의 군대가 맞지.”
촌장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피어났다. 촌장은 바로 뒤돌아서 나머지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여기 이 군대는 그간 우리를 약탈했던 군사들이 아니오! 바로 승상! 승상의 군대란 말이오!”
촌장의 외침에 백성들도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스, 승상?! 정말 승상의 군대란 말인가?”
“이제 우리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건가?”
서황은 희망에 가득 찬 백성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여기 있는 그대들 역시 나라의 백성들이요. 병주라고 해서 다른 지역과 다를 거 없소. 승상께서 직접 오시고 싶어 하셨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나를 대신 보낸 것이오.”
“감사합니다. 승상.”
“감사합니다. 정동장군.”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서 연신 서황의 손을 잡아댔다. 서황은 천한 것들의 손이라며 뿌리치지 않고 일일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자들의 손이라 서황의 손도 금방 더러워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백성들을 위로한 서황은 앞으로 자신들이 정확히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해주었다.
“곧 기존 태수나 현령들이 쫓겨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적임자가 부임해 올 것이오. 그리고 그 전에 다들 생활이 궁핍해 보이니 식량과 농기구를 지원해주겠소. 그것 외에는 다른 어려움은 없는 것이오?”
다들 감격하는 마을 사람들. 그런데 서황의 마지막 질문에 모두 쭈뼛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었는데 여기서 뭔가를 더 요구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다들 왜 말을 못하는 것이오? 어려운 것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시오. 이건 결코 그대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아니오. 나라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오.”
여태껏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꿈만 같은 서황의 얘기에 마을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 실은... 백파적인지 흑산적인지 하는 산적들이... 이 마을에 있습니다요.”
흠칫!
순간 서황의 몸이 떨렸지만 한순간이었다.
‘백파적이라니....’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음... 어찌한다...?’
서황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다. 병주 구석구석 이의민의 이름으로 선심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주에 원소가 박아 놓은 태수와 현령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쫒아내야 했다. 그만큼 한 지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는데, 만약 흑산적과 백파적을 상대해야 된다면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병주를 평정하려면 이런 일들도 당연히 해야 한다.’
원소와의 전쟁만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병주 평정이라면 당연히 이런 일도 포함이었다.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겠소.”
서황이 나서니 마을 사람들은 호가호위라고 기세등등한 태도로 바뀌었다.
“당장 가서 쓸어버립시다!”
“암! 이 땅에 도적들이 발붙이면 아니 되지!”
산적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마을 어귀로 간 서황. 마을 사람들의 얘기대로 도적으로 보이는 자들이 움막 같은 것을 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캭! 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얼씨구? 왜 이렇게 떼거지로.... 허억!!”
산적 하나가 집 밖으로 나왔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서황의 군대를 보고 처음 놀랐고, 또 서황을 보며 두 번째로 놀랐다.
“서, 서 장사님....”
서황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안면이 있는 놈이었다. 즉, 저들은 과거 백파적이 확실했다.
반가운 인사대신 살기를 띠며 대부를 꺼내는 서황.
“옛 동료를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크나큰 실망감만 드는구나. 그 때 승상께서 분명 한번만 더 산적 질을 하면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텐데....”
“헉! 서 장사! 아니. 서 장군님. 오해입니다.”
“나도 옛 동료와 회포를 풀고 싶지 피바다를 보고 싶진 않다. 변명을 할 기회를 주겠다.”
서황을 알아본 백파적의 이름은 선곤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저희들이 어찌 후장군, 아니. 승상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흑산적 출신들과 산에 모여 살게 됐었습니다. 맹세코 단 한차례의 약탈도 없었습니다.”
선곤의 얘기에 서황은 촌장에게 물었다.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들이 마을에 오기까지 저희는 저들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이리 내려왔지? 슬슬 옛 시절이 그리워진 게냐?”
“그, 그게 아니라.... 실은 토박이 흑산적들에게 들은 이야긴데, 이리 폭우가 쏟아지면 저희가 있던 산이 자주 무너진다고 합니다.”
“무너져? 산사태라도 일어난다는 얘기냐?”
“맞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난다는데 어찌 산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가피하게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서 장사! 아니. 서 장군님! 제발 저희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촌장 어른! 미안하게 됐수. 하지만 우리도 처음에는 좋게 좋게 이야기 했잖수.”
“흠흠.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 와 빈 집을 알려달라고 하니....”
듣고 보니 딱한 사정이었다.
‘정말로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들은.... 잠깐? 산사태?!’
그런데 산사태라는 얘기에 서황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이! 거기! 이름이 뭐냐?”
“선곤이라 합니다.”
“선곤. 그 토박이란 놈은 어디 있나?”